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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로드 Jul 09. 2019

빈의 기억법

과거를 온전히 품고도 현대적인 곳. 빈에서 발견한 도시의 명민한 기억법.

과거를 온전히 품고도 이토록 현대적일 수 있다는 것. 
지난 시간을 곱씹어 독창적 미래로 삼을 수 있다는 것.
오스트리아 빈에서 발견하는 도시의 명민한 기억법.



도시의 박물관 혹은 뿌리, 링슈트라세

합스부르크 왕궁과 그 앞을 지나는 관광 마차 휘아커(Fiaker). ⓒ 오성윤


비엔나를 여행할 예정이라고 하면 으레 이런 반응이 돌아온다. “비엔나 커피 마셔보겠네요?” 그나마 소시지를 거론하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도시 이름을 ‘빈’이라 고쳐 발음해도 사정은 비슷하다. “그럼 클래식 공연 같은 것도 관람할 예정인가요?” 긍정적으로 해석하자면 ‘비엔나커피’로 회자되는 아인슈페너나 빈 고전파음악이 워낙 유명하기 때문일 터. 사실 이런 반응은 빈이 풍기는 오랜 스테레오타입의 발로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며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의 이미지, ‘지적이고 우아하되 고답적이고 낡은 도시’라는 선입견 말이다.

빈 최고의 번화가 케른트너 거리 (Kärntner Straße)를 걸으며 그런 편견을 다시 한번 곱씹는다. 그야말로 눈 돌리는 곳마다 카페를 발견할 수 있으며, 600미터 남짓 걷는 동안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는 거리 예술가를 여러 명 맞닥뜨렸으니까. 고급 브랜드 상점과 쇼핑센터로 채워진 거리인데도 대부분의 건축물이 전통 양식이다. 개중 심심하게 생긴 건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지은 것일 확률이 높다. 전쟁으로 자금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옛 유산을 최대한 복원하려 노력한 것이다. 수첩을 꺼내 이런 문장을 적는다. “세간에 빈이 보수적이고 깐깐한 도시라는 선입견이 있다면, 거기에는 빈 자체의 탓도 적지 않을 것이다.”

또 한 명의 거리 예술가를 지나치는 순간, 시선이 성 슈테판 대성당(Stephansdom)에 멈춘다. 완공된 지 800년이 넘은 초거대 유물이자 여전히 빈 시민의 정신적 대들보로 기능하는 성지. 시내 투어의 가이드를 맡은 오현주 씨는 대뜸 손을 뻗어 그 맞은편으로 주의를 돌린다. 근방에서 보기 힘든 현대적 건축물, 하스 하우스(Haas House)다. “처음 하스 하우스의 설계안이 나왔을 때 시민들의 반대가 극심했다고 해요. 빈의 자랑인 성 슈테판 성당 옆에 포스트모던 건축물이 들어서는 걸 용납할 수가 없었던 거죠. 건축가는 고심 끝에 건물 전면에 거울 유리를 사용하기로 해요. ‘현대 건축물이지만 표면을 거울로 만들어 주변의 전통 건물들을 비추도록 하겠다.’ 시민들은 그 아이디어를 좋아했죠.”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옮기자 하스 하우스의 외벽에 반사된 파스텔 톤의 건물들도 따라 흐른다. 건물의 끝자락에 다다르니 성 슈테판 성당도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가 이내 사라진다. “어떤 사람들은 그래요. ‘빈 사람들은 조상 잘 만나서 참 편하게 산다’고요. 하지만 그건 잘못 본 거예요. 빈의 저력은 과거를 잘 보존하고 새로운 것을 유연하게 받아들인 시민들에게서 나온 거니까요.” 빈이 유독 전통을 숭상하는 도시인 건 맞지만, 그 숭상에는 입체적 측면이 있다는 뜻이다.



(좌) 콜마르크트 거리에서 바라본 합스부르크 왕궁. (우)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얼굴을 담은 사진가 루이기 토스카노(Luigi Toscano)의 작품 'The Faces'.


케른트너 거리에서 출발한 도심 산책은 반지 모양의 순환도로인 링슈트라세(Ringstraße)를 따라 이어진다. 이 도로의 본래 정체는 성벽. 빈의 범주가 오늘날처럼 넓어진 것은 도시 성벽을 허물고 그 자리에 폭 57미터, 길이 4킬로미터에 달하는 도로를 설치한 이후의 일이다. 그렇기에 성 슈테판 대성당이나 합스부르크 왕궁처럼 역사가 오래된 건축물 대다수가 이 원 안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오페라하우스, 미술사 박물관, 의사당, 궁정극장, 시청, 빈 국립대학 등 19세기 이후의 공공시설도 대개 링슈트라세 도로변을 따라 들어섰다. “빈 관광이라고 하면 보통은 링슈트라세를 따라 합스부르크 왕조가 남긴 400년의 유물을 훑어요. 패키지 여행에서는 이 주변만 돌아보고 다른 도시로 떠나는 경우도 많죠.” 시민정원(Volksgarten)을 거닐며 오현주 가이드가 말한다. 요 며칠 비가 내린 후 기온이 내려가서인지 시민정원의 자랑인 장미는 여태 듬성듬성하다. 인적도 드물다. 유모차를 끄는 가족들과 나른하게 하프를 뜯는 거리 연주자가 있을 뿐. 하지만 합스부르크 왕국의 앞마당 격인 헬덴광장(Heldenplatz)에 발을 들이자 가히 인파라고 할 만한 관광객 무리를 마주한다.

작년 한 해 빈을 방문한 관광객은 자그마치 750만 명. 평균 투숙 기간은 이틀 정도에 그친다. 인접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이동할 때 들르듯 여행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관광객이 합스부르크 왕궁이나 성 슈테판 성당, 쇤부른 궁전, 벨베데레 박물관 등 ‘박제된 곳’을 훑는 선에서 여행을 마치니, 빈이라는 도시에 유독 피상적인 이미지가 떠도는 것도 그리 놀랄 게 아니다. 빈을 취재하는 동안 만난 현지 사람 대부분이 이런 인식의 차이를 인지했다. 그들은 대부분 ‘빈의 오늘’을 다루겠다는 기획을 아주 흥미로워했다. 그럼에도 꼭 이런 종류의 사족을 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래도 OOO(역사적 명소)는 꼭 가보세요.” 자기 역사와 문화유산에 대한 극진한 애정이겠지만, 어쩌면 역사적 뿌리를 건너뛰고는 도무지 빈의 오늘을 알 방법이 없다는 힌트였을 수도 있다.

ⓘ 합스부르크 왕궁 hofburg-wien.at




훈데르트바서와 녹색 수도

(좌) 쿤스트 하우스 빈의 옥상 정원에 설치된 벌통. (우) 쿤스트 하우스 빈은 비정형성, 불규칙성,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한 훈데르트바서의 건축 철학을 담았다.  ⓒ 오성윤


오해할 수 있겠다. 빈이 현대 건축물을 무작정 기피하는 것은 아니다. 뭐니 뭐니 해도 건축가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Friedensreich Hundertwasser)를 낳은 도시니까. 으레 바르셀로나의 가우디에 비견되곤 하는 이 건축가 겸 예술가는 언제나 비정형성, 불규칙성, 자연과의 조화를 최고의 가치로 삼았고, 빈 곳곳에 기상천외한 작품을 남겼다. 그가 생전에 기거하기도 한 쿤스트 하우스 빈(Kunst Haus Wien)도 그 중 하나. 오늘날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 건물은 그가 지향하는 공간 철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울퉁불퉁한 바닥은 흡사 들판이라도 걷는 듯한 감흥을 안겨주고, 각양각색의 타일, 폐자재, 빈병 등의 디테일이 섞여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넘길 수 없게 한다. 나무가 건물을 비집고 자라도록 설계한 데다가 옥상은 아예 통째로 정원으로 만들었다. 꽃이 아무렇게나 피도록 두고, 잔디 한 번 다듬지 않았기에 ‘정원’ 같은 곱상한 표현이 적합한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옥상 정원에 벌통을 놓아보자고 한 건 잡담을 나누다 우연히 나온 이야기였어요. 사실 성공 여부는 저도 확신하지 못했는데, 금세 벌들이 날아들더군요. 훈데르트바서가 생전에 옥상 위에 소를 키우려다 구청장에게 퇴짜를 맞은 적이 있거든요. 그의 정신을 이어받자는 의미였죠.” 쿤스트 하우스 빈의 옥상에서 일하는 양봉업자 토마스 젤렌카(Thomas Zelenka)가 벌통에 연기를 뿌리며 말한다. 훈연을 맡은 벌은 이를 산불로 오해해 꿀을 잔뜩 머금고 이사 준비를 한다. 자연히 행동도 굼뜨니, 전문 지식이 없는 사람도 안심하고 구경할 수 있게 된다. 벌의 비행 소리가 잦아들자 젤렌카가 조심스러운 손놀림으로 판 하나를 꺼내 든다. 빽빽이 들어찬 꿀벌이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다. 벌통은 기껏해야 책상 서랍만 한 크기의 박스 예닐곱 개뿐이지만, 여기서 꿀을 만드는 벌만 900만 마리가 넘는다. “물론 생산량이 그리 높지는 않습니다. 꿀의 품질이 다른 자연산 꿀보다 월등히 뛰어나다고 하기도 어렵고요. 하지만 상징성이 있죠. 훈데르트바서의 철학과 도시에 사는 벌의 의미를 아는 이들은 꿀을 구매합니다. 기꺼이 더 비싼 가격을 치르고 말이죠.” 



빈의 명물인 관람차 비너 리젠라트(Wiener Riesenrad)에서 내려다 본 도심 공원 프라터와 빈 시내. ⓒ 오성윤
(좌) 칼스플라츠역과 연결된 레셀파크. 도시 면적의 절반이 녹지인 빈에는 280여개의 크고 작은 공원이 있다. (우) 갖은 액티비티를 즐길 수 있는 알테 도나우. ⓒ 오성윤


훈데르트바서가 주창한 철학의 영향인지 특유의 기질인지, 빈은 여전히 토지의 절반을 녹지로 가꾼다. 국민의 4분의 1이 거주하는 오스트리아의 수도인데도 말이다. 280여 개의 크고 작은 공원 중에서도 녹지에 대한 빈의 철학이 잘 묻어나는 곳으로는 늘 프라터(Prater)가 꼽힌다. 옛 합스부르크 왕가의 사냥터에 들어선 600만 제곱미터 규모의 이 공원은 4.5킬로미터 길이의 일직선 산책로 하웁트알레(Hauptallee),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놀이공원 부르스텔프라터(Wurstelprater)를 비롯해 무수한 숲길, 공터, 연못을 품고 있다. 각종 액티비티를 즐길 수 있는 알테 도나우(Alte Donau), 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조성된 인공 강변 뉴 도나우(Neue Donau), 도심을 가로지르는 도나우카날(Donaukanal)까지 도나우강의 각 구역도 빈 시민에게 휴식이 어떤 의미인지 가늠하기 좋은 장소다.

ⓘ 쿤스트 하우스 빈 입장료 12유로, kunsthauswien.com

ⓘ 프라터 관람차 비너 리젠라트 탑승권 12유로, praterwien.com




글/사진. 오성윤

오성윤은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의 에디터다. 한국에서부터 달고 간 인후염 때문에 취재 내내 기침에 시달렸으나 귀국하는 날 아침에 씻은 듯이 나았다. 빈의 깨끗한 공기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마셔댄 화이트 와인 덕분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 취재 협조 비엔나관광청 wien.info/en




'빈의 기억법'에 이어진 이야기

▶ 빈의 기억법 pt.2 - 예술, 커피와 술

빈 여행 노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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