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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로드 Jan 22. 2016

겨울, 강릉에서 만나다

강릉. 그곳에 남겼을 젊은 날의 반복되는 신파. 그래도 우리는 이 겨울 또다시 강릉으로 떠난다. 낯선 공간과 마주하고 옆 사람과의 인연을 기대하며. 묵혀둔 마음을 파도에 흘려 보내고, 잔잔한 위로를 청하기 위해.



바다


기차는 바다를 싣고


“저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강릉 하면 왠지 모르게 로맨틱한 느낌이 들지 않나요?” 강릉에서 만난 현지인의 해맑은 표정을 보며 ‘왜’ 라는 의문 대신 ‘아’ 하고 수긍의 반응을 보이고 말았다. 누구에게나 강릉은 계획된 여행지보다는 즉흥적으로 떠난 일탈의 장소였을 테니까. 첫 차를 뽑은 친구의 운전 실력을 아랑곳하지 않고 여럿이 앉아 동해 바다를 외쳤을 것이고, 혼자 올라탄 기차가 정동진행이었을지 모른다. 물론 영화처럼 로맨틱한 일 따위를 기대해서가 아니다. 강릉은 바다만으로도 충분히 짜릿하게 다가오고, 종종 이렇게 우리의 즉흥 여행지가 되곤 한다. 현지인의 말 한마디에 묵혀둔 기억을 ‘로맨틱’이라는 말과 연관지을 수 있었던 것도 ‘바다’라는 극적인 무대장치때문이었을 터. 강릉 바다가 인생의 최고는 아니더라도 제일 먼저 떠오르는 추억의 바다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듯하다.

정동진역은 우리나라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운 철도역이다. © 오작

바다 앞에 멍하니 앉아 시간을 보내는 일이 영화의 잔잔한 롱 테이크 장면처럼 아름답지만은 않다. 바다는 말이 없고, 어느덧 지겹게 왔다 갔다 하는 파도가 심심해지고, 머릿속은 다른 풍경을 상상할지 모른다.


10시 30분, 정동진역에서 출발하는 바다열차를 곁에 두고 형형색색 등산복을 차려입은 아주머니들은 열차 출발 시간 1분 전까지 사진을 찍느라 마음이 급하다. 연신 방송에서는 기차가 곧 출발한다고 겁을 주지만, 정동진 바다는 w그들을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정동진부터 삼척까지 이어지는 56킬로미터의 해안선을 따라 펼쳐지는 동해 바다의 진풍경을 기차에 편안히 앉아 감상하기. ‘기차가 촌스럽네’ ‘단체 관광객뿐이네’ 하는 말은 일단 한 귀로 흘려보내자. 기차가 아무리 뻔해도, 그 풍경은 뻔할 리 없다. 느릿한 기차에서 바라보는 창밖 풍경은 바닷가 모래사장에 놓인 벤치에 앉아 있는 것보다 극적인 재미를 선사한다. 일단 매서운 바닷바람부터 피할 수 있을 테고.


객차 4개가 이어진 열차는 가족실과 특실, 일반실로 나뉜다. 좁다란 방에 연인이 들어갈 수 있는 ‘프러포즈 방’과 간단한 식음료를 파는 카페도 마련했다. 좌석은 모두 바다를 향해 놓여 있고, 속이 시원할 정도로 뻥 뚫린 창밖으로 바다를 마주하면 마치 공연장의 VIP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든다. 잠수함을 재현한 조잡한 패턴의 시트지가 신경 쓰이더라도, 시선을 창밖에 고정시키면 이내 마음에 평온이 찾아온다. 그러나 디제이로 변신한 승무원의 목소리는 어쩔 도리가 없다. 열차가 안인 바다로 향하면서 ‘여행을 떠나요’를 선곡하더니, 바위가 등장하자 어느새 배경음악을 ‘바위섬’으로 바꾼다. 정동진역에서 굽이굽이 올라 옥계 바다로 향할 때쯤엔 80년대 팝 모음집에서 가져왔을 법한 ‘모닝 트레인(Morning Train)’이 흘러나오고 디제이가 본격적인 라이브 방송을 시작한다. 누군가가 보내는 문자에 그는 실시간으로 대답을 하고, 신청받은 음악을 틀어주느라 바쁘다. 그래도 구간이 바뀔 때마다 덧붙이는 장소 설명은 잊지 않는다.

바다열차를 타고 창밖으로 펼쳐지는 바다를 감상한다. © 오작

2007년부터 시작한 이 관광 열차는 분명 여행객이 혹할 만한 요소를 갖췄다. 느릿느릿 달리는 기차, 아날로그적 감성, 로맨틱한 바다. 도시 통근 열차였던 통일호를 개조해 만든 이 미니 열차는 삼척 해변에서 동해, 추암, 묵호, 정동진까지 비교적 짧은 거리지만 동해의 비경을 관광객에게 선사하고 싶었을 것이다. 물론 그 결과는 성공적이다. 인기에 힘입어 객실 1량을 더 추가해 지금의 4량짜리 열차를 완성했고, 누적 탑승객 100만 명(2015년 4월 기준)이 넘었다. 물론 1시간 20분간 어지럽게 장식한 기차 내부와 중구난방으로 울려 퍼지는 음악이 두려운 여행객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묵호역이나 추암역에 내려 사적인 바다 감상을 즐긴 후, 돌아오는 하행선을 타고 정동진으로 되돌아가고 싶을지도 모른다. 일단 혼자 탈 계획이라면, 가족석을 피하자. 방음이 아주 잘되는 이어폰을 끼고 시선을 오직 차창 밖으로만 두면 눈앞에 펼쳐진 저 바다가 벗이 되어줄 것이다.

묵호역을 지나 정동진역으로 향하는 바다열차. © 오작



강릉 맥주의 맛


커피와 술은 강릉의 탁월한 지형이 빚어낸 산물이다. 백두대간 정기를 받은 물과 드넓은 평야에서 자란 풍부한 곡물은 맛 좋은 술을 만들고, 강릉의 바다는 커피 맛에 일조했다는 풍문도 전해온다. 강릉의 양조장을 부활시킨 버드나무 브루어리가 반가운 이유 또한 ‘강릉 술’이라는 낯설면서도 익숙한 어감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옛 강릉탁주공장을 개조해 수제 맥주를 만든다는 발상은 마치 고루한 선비가 상투를 자르고, 신문물을 받아들이는 변화의 신호로 들리지 않는가.

버드나무 브루어리 양조실은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개방하고 있다. 이곳에서 최소 2주 동안 발효와 숙성 기간을 거친 수제 맥주를 바로 옆에서 맛볼 수 있다. © 오작

“전 세계적으로 산과 들, 바다에 둘러싸인 도시가 많지 않은데, 강릉이 그중 하나일 거예요. 지형적인 이유로 이곳에 왔지만, 커피처럼 술과 관련한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버드나무 브루어리를 지키는 배효선 점장의 말이다. 그녀에 따르면, 우리나라 수제 맥주 시장은 핸드 드립 커피의 대중화 과정과 꽤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다고. 이제 사람들은 커피든 맥주든 좀 더 진중한 맛을 원하고 특별한 지역성을 찾는다. 이곳에서는 한국의 풍미를 담은 맥주를 적극 개발하고 홍보한다. 예를 들면 국화나 솔, 창포, 매실을 훈제한 오매 같은 부재료를 넣은 맥주처럼.


국화 바이젠이나 강릉의 솔 향을 담은 파인시티 세종은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대표 메뉴다. 알코올 도수 6.6퍼센트의 국화 바이젠은 알싸한 맛이 나면서 끝맛이 짙고 풍부한 향이 오래 남는다. 그녀가 직접 따라준 맥주를 겁없이 벌컥 들이켜고 나니, 밀 맥주의 여운이 꽤 오래간다.

버드나무 브루어리에서 만드는 기본 에일 맥주 세 가지. 블론드 에일, 앰버 에일, 발틱 포터. © 오작

양조장의 전신인 경월소주는 1926년에 문을 열어 강릉의 여러 양조장이 통합되고 나눠지길 반복하는 과도기 시절을 겪었다. 그동안 소주에서 탁주로 모양새가 여러 번 바뀌었지만, 지금의 브루어리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디자인 카페라 해도 손색없는 버드나무 브루어리는 오랜 세월을 버틴 양조장의 아날로그적 감성과 젊은 트렌드 사이를 오간다. 입구에 들어서면 맥주를 발효하는 여러 개의 스테인리스 통이 훤히 보이고, 부수다 만 시멘트 벽이 공간을 나눈다. 2층에 오르면 황토색 페인트를 칠한 나무 문 위에 ‘실험실’이라는 오래된 손글씨가 그대로 남아 있다. 배효선 점장이 말한다. “불편함이 없다면 청소는 하되, 새로 덧대거나 포장하지 말자. 이야기가 깃든 공간, 그 때의 시간을 남겨두자. 딱 이거였어요.” 누군가에게 삶터였고, 일터였고, 배움터였던 양조장. 굳이 설명하지 않고 찾아보지 않아도 지난 시간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버드나무 브루어리는 탄생했다. 묵혀둔 시간을 다시 꺼내 단순히 공간만 되살린 것은 아니다. 우리 술의 새로운 문화를 젊은 브루어리를 통해 만들어가면서 지역 마을과 상생하는 세계적 ‘코리안 비어’를 꿈꾼다. 문을 연 지 이제 막 3개월. 일단 강릉 맥주 1잔을 맛 보고 나면 그들의 다부진 미래를 판가름할 수 있을 것이다.



골목


문화가 흐르는 청춘 골목


2011년 12월, 강릉 명주동에 동네 사랑방이 등장했다. 카페도 아니고 방앗간도 아닌 곳. 그렇다고 동네 어르신들에게 딱히 놀 거리를 선사한 것도 아니었다. 집 앞에 자동차 1대만 서 있어도 코앞의 풍경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좁은 골목에 영화를 찍는 젊은이들이 들어온 후였다. 그들은 지붕이 반쯤 날아간 ‘문화방앗간’의 간판을 ‘봉봉방앗간’으로 바꿔 달고 골목의 새 식구가 됐다.


봉봉방앗간을 찾아가기 위해 여러 번 유턴하고 몇 개의 골목을 돌고 돌아야 했다. 좁은 골목마다 연말맞이 나무 장식을 하기 위해 사다리차가 멈춰 있거나 비뚤게 세운 자동차가 야속하게 길을 막으며 텃세를 부린 것이다.

골목에 오래된 방앗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카페 봉봉방앗간. © 오작

“식사는 하셨어요?” 카페 자리를 미리 선점한 동네 주민에게 ‘봉마담’이라 불리는 유미선 씨가 인사를 건넨다. 마치 카페 안으로 들어선 우리가 “주말은 잘 쉬셨어요?”라고 되물어야 할 것처럼 정겨운 말투다. 영화와 다큐멘터리 같은 영상을 제작하는 지인 4명과 함께 명주동에 입성한 지 이제 4년째. 그녀는 봉봉방앗간을 지키는 안주인으로 통한다. “사실 처음부터 카페가 목적은 아니었어요. 문화를 위한 대안 공간을 만들고 싶었지요.” 외지인에게는 잠깐 입성하는 것조차 힘겨웠던 골목인데, 젊은 사람들의 문화공간을 골목은 쉽게 허락했을까? 그들의 고충을 넘겨 짐작했으나, 이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주민들은 오히려 정겨운 방앗간이 사라진 자리를 누군가가 다시 채운다는 생각에 기대감 반, 걱정 반이었다고. 혹시라도 외진 골목으로 들어와 장사가 잘 안 되면 어쩌나 하고.

핸드 드립 커피만 판매하는 봉봉방앗간에서 유미선 씨가 직접 커피를 내린다. © 오작

명주동은 옛 성터로 여전히 지하 깊숙이 파묻힌 유물이 종종 발견되기도 하는 보존 구역이다. 따라서 함부로 집을 허물거나 신축이 불가능한 상황. 다시 말해, 하루아침에 카페가 옷 가게로 바뀌는 (서울에서) 비일비재한 일이 이곳에선 일어날 수 없다는 얘기다. 우리가 고생 끝에 차를 세운 주차장을 예로 들어보자. 텃밭이었던 자리에 집을 지으려다 유물이 발견되는 바람에 강릉시 관할 주차장으로 바뀐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말하지 않아도 이곳 동네 사람들이 느꼈을 새로운 공간에 대한 갈증이 짐작은 간다. “명절 때마다 종종 연락하거나 찾아오는 사람이 있어요. 떡을 하러 오겠다고.” 마치 1988년도 골목이 응답할 것 같은 좁은 길은 그렇게 시간이 멈췄다. 동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봉봉방앗간에서 내는 커피 1잔도, 2층 호호갤러리에서 열리는 소소한 공연과 전시도 이곳 사람에게는 신선한 재미다. 명주동 골목에서 봉봉방앗간은 50대 이상의 나이 지긋한 마을 어른이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는 사랑방, 혹은 참새처럼 드나드는 방앗간으로 통한다. 방앗간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쓰는 이유도 이 골목의 추억의 장소를 그대로 남겨두고 싶어서였다고. 비록 명절이면 줄을 서서 고춧가루를 빻고 떡을 만들던 공간이 지금은 새로운 문화를 수혈하는 쉼터로 변해버렸지만.


이곳은 애써 새로워지려고 하지 않는다. 오래된 시멘트 벽을 그대로 사용하고, 낯설지 않은 오래된 소품이 가게 안에 가득하다. 일러스트레이터가 남기고 간 엽서와 덕지덕지 붙은 전시 포스터조차 원래 그 자리를 장식하듯 벽을 채우고 있다. “여기는 뛰어난 아티스트만의 공간이 아니에요. 동네 할머니부터 전시 공간이 필요한 학생, 독립 영화를 틀고 싶은 사람들까지, 저희와 감성이 맞으면 함께하는 것이죠.” 10년 동안 서예를 연마한 할머니는 2층 호호갤러리에서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는 것으로 칠순 잔치를 대신했고, 매주 수요일 저녁마다 열리는 ‘수요 다방’에서는 다 함께 모여 음악을 듣고 이야기를 나누는 문화 활동을 즐긴다. 봉봉방앗간이 오래된 골목과 젊은 문화를 잇는 매개 역할을 하고 있는 셈. 그들이 애초에 계획했던 대안 공간처럼 동네 사람들이 모여 골목 문화를 창조하는 곳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오늘도 우리가 머무는 동안 옆자리에 앉아 있던 동네 주민이 자리를 쉽게 떠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이곳의 하루 분위기가 대충 알 듯 하다. “저희 커피 1잔 더요.” 아마도 그들은 오늘 오후도 이곳에 반납한 게 분명하다.

카페에서 직접 구운 초코칩 쿠키 향이 실내를 가득 채운다. © 오작


눈 덮인 구름 길을 향해


해발 1,100미터의 고산지대에 자리한 안반데기 마을. 새벽 6시 운유촌 앞은 이미 50미터 앞도 제대로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안개가 자욱하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 여행객의 숙박을 책임지는 운유촌의 주인은 “안개 때문에 내일 해가 보일지는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 안개 낀 마을을 기대한다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던 말을 반쯤 주워 담고 싶을 정도로 짙은 안개가 아득히 내려앉아 있다. 여름에는 산비탈을 촘촘히 채운 고랭지 채소밭과 감자꽃이 장관을 이루고, 겨울에는 눈 덮인 산으로 기막힌 설경을 이룬다는 이곳. 지금 느낄 수 있는 것은 단지 발밑에 쌓인 눈뿐이다. 그렇지만 한겨울 안반데기에 오른 사람이라면 머리가 쇠하기 시작한 아저씨의 머리처럼 듬성 듬성 보이는 눈 조각이 아니라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길을 걷더라도 온통 하얀 세상을 조우하고 싶은 것이다. 축축한 물안개를 맞으며 일출전망대로 향하는 외길로 발걸음을 옮긴다.

고랭지 채소가 자라는 대지. 겨울에는 새하얀 눈이 그곳의 시간을 덮는다. © 오작

운유촌에서 멍에전망대를 거쳐 피득령, 일출전망대를 찍고 돌아오는 6킬로미터의 안반데기 운유(遊雲)길은 초보자에겐 가파른 언덕부터 고행이다. 백두대간을 따라 경포와 정동진까지 산과 바다를 지나는 350킬로미터의 강릉바우길 중 17구간에 속하는 이 길은 이름 그대로 ‘구름이 노니는 곳’. 하늘 아래 첫 동네라 불리는 마을에서 우리는 희뿌연 장막 속을 묵묵히 걷는다. “어딘가에 풍력발전기가 있을 텐데….” 동행한 사진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머리 위로 서서히 안개를 뚫고 풍력발전기의 날개가 모습을 드러낸다. 운유쉼터에서 일출전망대까지는 천천히 오른다 해도 30분이면 충분하다고 한다. 두 번의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면 일출전망대가 나오고, 거기서 옥녀봉 헬기장까지는 완만한 능선 길이다.


밤새 내린 눈이 꽤 쌓였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에 발을 디디면 발목까지 푹 빠지고 만다. 미끄러지지 않도록 두 다리에 바짝 준 힘이 풀릴 때쯤이면 등장하는 일출전망대. 나무 덱으로 만들어놓은 전망대에 오르면 넓은 고랭지 밭과 저 멀리 백두대간 위를 노니는 구름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물론 안개가 없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하지만 한겨울 깨끗한 하늘에 붉은 태양을 기대하는 것은 이곳에선 오히려 겸연쩍은 일일지 모른다. 바람에 흩날린 눈이 나뭇가지에 겹겹이 쌓여 세세한 결을 만든 모습, 안개 자욱한 넓은 대기에 외딴집 1채가 홀로 자리한 풍경, 아무도 밟지 않은 하늘 아래의 첫눈. 그것만으로 한겨울 이곳에 오를 이유는 충분하다. 정상이 가까워오자, 문득 티베트에서 오체투지 순롓길에 오른 여인이 사원에 다다를 수록 걸음 속도를 줄이는 이유가 떠올랐다. 한 걸음 한 걸음 그 자체가 목적임을 되새기는 마음. 물론 이곳은 공기가 희박한 고원도 아니고, 네 발로 걸어 올라갈 필요도 전혀 없는 곳이다. 단지 눈앞에 보이는 구름과 안개 속에 서 있으면 그만이다.

눈과 구름, 안개로 뒤덮인 안반데기 언덕은 짐짓 영화 <겨울왕국>을 상상하게 한다. © 오작


숲에서 즐기는 만찬


강릉의 맛을 보기 위해 바닷가 근처 횟집을 기웃거리거나 원조가 판을 치는 두부 거리를 서성이는 대신 우리는 숲으로 향한다. 사실 강릉에서는 여행자를 들뜨게 만드는 먹거리를 떠올리기 힘들다. 현지인에게 물어도 딱히 혹할 만한 대답이 돌아오는 건 없다. 역시나 바닷가 근처라 하면 공식처럼 떠오르는 싱싱한 회와 매운탕, 물회. 그도 아니면 원조 교동짬뽕 정도다.


숲 속 컨테이너에 자리한 레스토랑 말미는 ‘로컬 비스트로’라는 홍보 문구로 여행객의 마음을 흔든다. ‘강원도 식자재로 만든 셰프의 음식’이라는 수식은 서울에서 흔히 들었어도 강릉에서만큼은 특별하게 다가온다. 산해진미. 그야말로 강릉을 둘러싼 바다와 산에서 난 먹거리를 머릿 속으로 하나 둘 나열하다 보면 서서히 입맛이 돌고 마니까.


말 꼬리처럼 길게 뻗어 있다 해서 동네 이름이 말미. 마을 이름을 그대로 딴 레스토랑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꼬불꼬불한 외길을 의심하며 올라가야 한다. 마을을 지나 빽빽한 소나무 숲을 거쳐야만 외딴 컨테이너 1개가 등장한다. 외로운 섬처럼 컨테이너만 우뚝 솟아 있는 ‘말미(MALMI)’레스토랑이다. 영어로 썼지만, ‘끄트머리, 혹은 일정한 직업이나 일에 매인 사람이 갖는 여가나 휴가’라는 우리말 뜻이 좋아서 붙인 이름이라고. 컨테이너 2개를 연결해 공간을 완성한 황준성 셰프의 디자인 솜씨는 요리만큼이나 훌륭하다. 레스토랑 안에서 바라보는 창밖 풍경은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과도 같다. 사계절 울창한 소나무 숲이 음식 맛을 보기도 전에 허기를 채운다. 2개의 커다란 유리창과 오픈 주방은 천장이 낮은 컨테이너에서도 숨통 트이게 만든다.

훈제기 앞에서 참나무로 불을 때는 황준성 셰프. © 오작

강원도 태백 출신의 황준성 셰프는 재작년 이곳에 자신만의 레스토랑을 만들고, 지난해 7월 본격적으로 요리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바다가 있고 먹거리가 풍부한 강릉은 강원도 내에서 최고의 여행지라고 생각해요. 저는 여행자를 위한 식당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그의 말대로라면, 말미는 강릉 경포대 앞에 있어야 할 듯하다. 여름이면 현지인보다 관광객이 더 많다는 그곳 말이다. 그러나 그는 연식이 오래된 자동차 내비게이션은 위치 추적조차 못하는 장소에 컨테이너를 세웠다. “몇 해 전 일본 홋카이도 지방에서 1년간 일한 적이 있어요. 한적한 시골 생활에 매료되고 나서는 조용한 동네에 레스토랑을 열고 싶었죠.” 촌각을 다투는 서울의 유명 호텔 주방과 이탤리언 레스토랑에서 일했던 그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고, 사방으로 소나무 외에는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없는 숲 속을 택했다. 입구에 자리한 훈제기는 모두 이곳에서 직접 만든 것. 최근에는 미국식 바비큐에 주력한다고 그가 자신 있게 설명한다. 바비큐를 택한 것은 도시에서 벗어나 먹는 대표 음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그렇다고 바다의 맛을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오징어나 홍합 등 각종 해산물이 바비큐만큼이나 푸짐하게 곁들여 나오고, 직접 훈제한 고등어, 명란을 넣은 파스타 등 그날 식자재 수급에 맞춘 특별 요리도 준비되어 있으니까. 그런데, 이 산속까지 누가 찾아오냐고? 이미 많은 여행객이 말 꼬리 같은 외길을 따라 파도처럼 드나들고 있다. 잔잔한 위로의 말미를 위해.

(왼쪽)말미 레스토랑의 대표 메뉴인 BBQ플레이트. (오른쪽)파스타에 들어갈 고등어를 훈제 중이다. © 오작


유미정은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의 에디터다. 사진가 오작은 안반데기 일출을 담기 위해 3일 아침 내내 그곳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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