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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로드 Mar 18. 2016

특별한 여행자 5인을 만나다

색다른 것을 좋아하고, 오직 자신만의 취향으로 여정을 만들어가는 여행자들의 고백. “나는 여행 능력자입니다.”


베트남 국수에 빠지다

여행자 진유정 씨. © 박상수

떠남과 머묾. 익숙함과 낯섦이 반복되는 여행. 미지로 향하는 표를 끊고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진유정 씨가 떠올리는 건 오직 한 가지다. 밥보다 가볍고, 빵보다 따뜻한 국수 1그릇. 헛헛한 위를 달래고, 설렘과 두려움이 뒤섞인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국수의 시간. 그녀가 베트남 국수에 빠져 여행을 시작하게 된 것은 묵혀둔 기억 속의 한 장면 때문이다. 야간 버스를 타고 새벽녘 하노이 도심 어딘가에 도착한 날, 아직 사위가 어두운 거리를 터덜터덜 걷다가 한 국숫집의 불빛을 발견했다. 나무 장작을 때느라 천장과 벽면이 까맣게 그을린 식당 안은 후루룩 면발을 빨아들이는 소리로 가득 찼고, 퍼(Phở)를 맛본 순간 낯선 타지에서의 긴장이 탁 풀려버렸다고 한다. 이때부터 그녀는 헌책방에서 보물을 발견하듯 소박하고 따뜻한 국수를 찾아 매번 베트남으로 향하게 되었다.


“2001년에 호찌민에서 한국어 교사를 하면서 2년 동안 지냈어요. 오전 수업이 7시에 시작해 10시에 끝나면 현지 학생과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국수를 먹으러 가곤 했죠. 저에겐 아침 식사로 국수를 먹는 식문화도 꽤 새로웠지만, 수업을 끝내고 느긋하게 먹는 아침 국수가 하노이에서 맛본 새벽 국수처럼 특별하게 느껴졌어요.” 노천 식당에 앉아 커다란 나무 사이로 내리쬐는 태양을 기분 좋게 맞이하며 먹은 국수는 후띠에우남방(Hủ tiếu Nam Vang). 삶은 돼지고기와 간, 허파를 듬뿍 넣은 국수를 먹으며 그녀는 ‘아, 여기에서 평생 살아도 되겠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맑은북엇국처럼 속을 달래는 후띠에우남방은 지금도 그녀가 현지에서 가장 맛있게 먹은 국수로 꼽는다.

호찌민의 국수 먹는 풍경. © 진유정

베트남 국수의 면 종류는 대략 아홉 가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퍼 외에도 타피오카 가루를 섞어 쫄깃한 바인까인(Banh Canh), 중간 정도 굵기의 말린 쌀 면 후띠에우(Hủ tiếu) 그리고 당면이나 라면으로도 국수를 만든다. 면마다 다른 소스와 육수를 사용하고, 곁들이는 향채에 따라 맛도 달라진다. 지역마다 내는 특유의 맛과 주재료도 모두 제각각이니, 국수의 가짓수를 세자면 수도 없이 늘어날 터. 따라서 베트남에선 목욕탕 의자에 간신히 엉덩이만 걸치고 앉아 먹는 길거리 국수부터 세끼 비용을 쏟아부어야 하는 고급 식당의 국수까지 모두 맛봐야 할 것이다.


진유정 씨가 국수 여행을 시작한 계기도 바로 무궁무진한 베트남 국수에 대한 욕심에서 비롯했다. 국숫집 중심으로 동선을 그리다 보니 여행 기간에 몇 끼를 먹을지 미리 세어보고, 새롭게 맛볼 음식을 찾는다. 일단 베트남 어느 도시에 가든 여행의 시작은 국수를 맛보는 일이다. 시장을 둘러보고 국수 1그릇을 든든히 먹고 나면 현지인이 된 것처럼 마음이 여유로워진다고. “맛이 그리워 계속 가는 거예요. 한국에 머물 때도 문득 해 질 녘 베트남에서 먹었던 국수가 떠오르면 그때의 행복을 찾아 또다시 짐을 싸곤 하죠.” 그래서 그녀의 다음 여행지는 언제나 베트남. 그곳엔 아직 맛보지 못한 수많은 국수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그깟 국수 1그릇’ 때문에 몇 번이나 다녀온 도시를 가고 또 가는 무모한 여행자라 불릴지라도 그녀는 퍼의 본고장을 찾아 또다시 떠날 계획이다. “이달 말에는 베트남의 북쪽 도시 남딘(Nam Định)에 가서 퍼를 처음 만든 가족을 만날 거예요. 중부 호이안까지 내려갈 예정인데, 또 어떤 국수를 맛볼지 벌써 기대돼요. 그리고 베트남에 소수민족이 54개 정도 되는데, 그들은 어떤 음식을 먹는지도 알고 싶어요. 소수민족의 국수만 먹으러 간다고 해도 아직 54번은 더 남은 셈이네요.”

(오른쪽)후띠에우남방. (왼쪽)베트남 퍼.


<나는 그곳에 국수를 두고 왔네>(효형출판, 1만5,000원)는 진유정 씨가 쓴 미식 에세이로, 15년간 베트남을 오가며 맛본 국수 이야기를 풀어냈다.


촬영 협조 레호이(070 4242 0426)




전 세계 코카콜라를 수집하다

여행자 김근영 씨. © 박상수

누구나 저마다의 시간을 기록한다.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물건을 간 직하며. ‘콜라병 수집가’ 김근영 씨는 콜라병으로 삶의 기억을 더듬는 여행자다. 그가 코카콜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때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무렵. 우연히 슈퍼에서 발견한 올림픽 특별 에디션 콜라캔을 버리지 않고 집으로 가져오면서다. 시드, 올리, 밀리. 당시 올림픽 마스코트 이미지가 담긴 콜라캔부터 시작해 지금 그가 소장하고 있는 코카콜라 관련 아이템은 어느덧 1,500점에 이른다. 그러나 애초부터 그가 작정하고 수집가의 길로 나선 것은 아니다. 마케팅 관련 일에 종사하기에 세계적 브랜드 코카콜라의 스포츠 마케팅은 늘 그의 관심사였다고. 시장조사차 떠난 여행지에서 발견한 그 나라만의 코카콜라 패키지, 판촉물, 특별 MD 상품, 책 등을 기념품처럼 사 모으다 보니 어느덧 코카콜라광이 되어버린 것이다.


“저에게는 코카콜라 수집이 브랜드에 대한 애정이자 공부예요. 그래서 패키지에만 국한하지 않고, 코카콜라 로고가 새겨진 모든 것을 모으죠. 해외에 나가면 장난감 가게에서 코카콜라 자동차를 사기도 하고, 빈티지 소품 가게에 들러 오래된 판촉물을 구해 오기도 해요.” 최근에는 온라인을 통해 각국의 코카콜라를 교환하거나 판매하는 경우도 꽤 많아졌다고. 특히 올림픽이나 월드컵처럼 국제적인 축제가 열리는 해에는 한정 제품으로 출시하는 코카콜라를 손에 넣으려는 전 세계 컬렉터의 경쟁이 스포츠 경기만큼이나 치열하다. 그가 지금까지 가장 아끼는 소장품 중 하나도 2002년 한일 월드컵 본선 조 추첨 행사용으로 배포한 코카콜라병. 오직 그날을 위해 제작한 패키지는 행사에 참석한 3,000명의 VIP에게만 제공했는데, 우연히 지인에게 선물 받아 현재는 자신의 품에 있다.


“수집은 추억을 기록하는 저만의 방식이고, 과거의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예요. 여행지에서 구한 콜라병을 보며 그곳에서 보낸 시간을 되새기고, 2002년 한일 월드컵이나 김연아 선수가 금메달을 딴 밴쿠버 올림픽 때 나온 코카콜라 패키지를 보면 당시에 느꼈던 감동이 떠오르죠.” 맹목적인 수집가와 달리 김근영 씨가 모으는 것에는 모두 스토리가 담겨 있다. 개인적 추억이든 글로벌 브랜드의 창의적 마케팅 수단이든 그가 병을 지그시 바라보며 늘어놓는 이야기에는 애정이 뚝뚝 묻어난다. “베르사체, 미쏘니 등 이탈리아에서 명품 디자이너 8명과 협업해 내놓은 특별 컬렉션이 있어요. 세계적 디자이너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담은 콜라병을 소장할 수 있다는 것도 의도하진 않았지만 코카콜라 수집가로서 꽤 큰 기쁨이에요.” 국내에도 그처럼 콜라병을 모으는 수집가가 점차 늘어나는 추세지만, 이미 코카콜라의 본거지 미국에서는 1974년에 조직된 수집가 클럽이 전 세계적으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고, 말레이시아에서는 수차례 그들만의 박람회를 개최할 정도로 마니아가 많다고. 별것 아닌 음료수병 하나로 전 세계 사람과 교류하고 정보를 나눌 수 있다는 점도 수집의 재미라고 그는 덧붙인다.


김근영 씨가 소장하고 있는 코카콜라 패키지 중 일부. © 박상수

“여행을 갈 때마다 ‘그곳에 가면 또 어떤 콜라병을 만날 수 있을까’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남들보다 더 설레요. 전 세계 어디를 가든 콜라는 있으니까요.” 여행을 떠나기 전, 그곳에서만 구할 수 있는 코카콜라를 사전 조사해서 찾아간다는 김근영 씨. 그가 계획하는 다음 행선지는 코카콜라 본사가 있는 미국 애틀랜타다. 코카콜라 박물관에 들러 다양한 제품을 구경하고 브랜드 역사를 훑어보는 일. 오직 한 가지 목적만으로도 그가 떠날 이유는 충분하다.


김근영 씨가 운영하는 코카콜라 블로그(www.cocacolaworld.co.kr)에서 그가 지금까지 모은 코카콜라 컬렉션과 전시, 브랜드 정보 등을 엿볼 수 있다.



론리플래닛 가이드로 세계를 누비다

사진가 박종우 씨. © 박상수

박종우 씨는 전 세계 문명이 닿지 않은 오지로 깊숙이 들어가 소수민족의 삶을 카메라에 담고 영상으로 전달한다. 그의 본업은 사진가. 오지 전문 다큐멘터리 감독도 겸하고 있지만, 사실 그는 20년 넘게 전 세계 100여 개국을 돌아다니고 있는 진정한 여행 고수기도 하다. 1980년 중반, 지금처럼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에도 그는 망설임 없이 비행기에 올랐다. “저한테 여행은 언제나 가장 쉬운 일이에요. 책을 보다가 혹은 전 세계 어딘가에 무슨 사건이 일어났을 때, 문득 사진으로 찍어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날로 짐을 싸서 다음 날 바로 떠나지요. 그러면 그날 저녁쯤엔 늘 현장에 도착해 사진을 찍고 있어요.” 무모할 법한 그만의 즉흥 여행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바로 론리플래닛 가이드북이다.


1987년, 박종우 씨가 처음 접한 론리플래닛 <인도> 편. 파키스탄을 돌아 이란, 터키, 아시아를 종단하는 여정으로 떠난 인도 장기 여행에서 그는 처음 제돈을 주고 론리플래닛을 샀다. “배낭여행이 일반화되기 전, 여행자 사이에서는 토니 휠러가 갔던 코스를 따라 여행하는 게 로망이었어요. 런던에서 싱가포르까지 아시아를 육로로 여행한 책을 보고 저도 동참한 거죠. 당시에는 우리나라가 중국과 수교를 맺기 전이라 저는 인도로 향한 것이고요.” 소문으로만 듣던 론리플래닛을 보고 그가 느낀 충격은 대단했다. ‘가이드북의 신세계’처럼 여행자의 입맛을 만족시킨 책을 만난 것이다. 여행자에게 필요한 정보는 5장만 넘기면 모두 찾을 수 있었고, 책 속에 나온 정보는 신기할 정도로 정확했다(심지어 손으로 그린 지도의 축적까지 딱 들어맞았다고). 이후로 어디로 떠나든 박종우 씨의 한손엔 카메라, 다른 손엔 론리플래닛 가이드북이 있었다. 지금이야 검색창에 나라 이름을 다 치기도 전에 수십 장의 사진과 정보가 쏟아지지만 당시만 해도 바다 건너는 그야말로 미지의 세계. 여행지에서 론리플래닛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그의 여행에 빛이 되기도 혹은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심지어 새로운 개정판이 4년 넘도록 나오지 않은 나라는 불안해서 여행을 안 간 적도 있다고. 당시에는 촘촘한 글 사이에 들어간 작은 사진 1장조차 귀중한 정보였고, 모든 여정을 론리플래닛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왼쪽)1980년대 출간된 론리플래닛 <인도>편. (오른쪽)론리플래닛으로 가득찬 박종우 씨의 책장. © 박상수


박종우 씨의 손때가 고스란히 묻은 각국의 론리플래닛은 여전히 그의 책장을 가득 메운다. 그곳엔 그의 첫 론리플래닛, <인도> 편도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여행 후에 모아둔 책 중 일부는 지인에게 주기도 하지만, 이내 책장은 다시 새로운 나라의 론리플래닛 가이드북으로 채워지곤 한다. 20년 넘도록 론리플래닛을 읽고 있는 만큼 책을 보는 그만의 노하우도 있다. 바로 저자의 행간을 읽는 것. 행간을 보면 좋다, 나쁘다라는 표현의 정도를 어느 정도 걸러낼 수 있어 가끔 책을 보다가 혼자 웃을 때도 많다고. 더불어 지독한 론리플래닛 애독자로서 팁 하나를 공개하자면, 각 나라의 문화와 역사 정보를 절대 지나치지 말라는 것. 인문학적 지식은 여행지의 감흥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줄 뿐더러 그 나라의 사정을 알고 나면 무얼 보든 이해도가 훨씬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여행은 곧 제 삶이고, 그런 의미에서 저는 살면서 모든 정보를 론리플래닛에서 얻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아쉬운 점은 제가 남들이 안 가는 오지를 주로 여행하다 보니, 늘 정보가 부족하고 페이지 할애도 굉장히 적다는 거예요. 그럴 때마다 제가 직접 가서 개척해야겠다는 투지가 불타올라요.”

가이드북 손 지도에 남아 있는 여행의 흔적. © 박상수

사진가 박종우 씨는 <티벳 소금계곡의 마지막 마방> <차마고도-1000일의 기록> 등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그의 블로그(blog.naver.com/khampa)에서 전 세계 오지를 여행하며 찍은 사진을 감상할 수 있다.




미지의 술을 탐닉하다


“소주는 싫고, 대형 공장 맥주는 맛이 없다. 이왕이면 맛있는 술을 먹겠다.” 오지 여행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프로듀서 탁재형 씨가 술을 찾아 다니는 이유는 단순하다. 자신이 담당하던 TV 프로그램 <세계테마기행>에서 출연자로도 얼굴을 비친 적 있는 그는 맛있는 술 앞에선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알프스 산자락의 이글루 호텔 노천 온천에서 글뤼바인을 마시며 감동하던 표정은 그대로 전파를 타기도 했다. 50여 나라를 여행하고 취재로 오지를 떠돌며 도락으로 삼은 것은 각 나라의 술을 맛보는 일이다. 그가 생각하는 술이란 한 민족이 살고 있는 자연환경과 그들의 본성, 특질이 농축된 문화의 결정체. 따라서 여행지에서 술을 마시는 순간을 그 지역의 문화와 접신하는 흥분의 찰나로 맞이한다.


“특별한 술이 늘 인상 깊게 남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것. 대표적인 게 루마니아 북부 시골 마을에서 맛본 빨링꺼(Pálinka)예요. 증류 탭에서 바로 받아 마셨는데, 최소 2년은 푹 숙성시킨 것처럼 시큼한 냄새가 나는 증류주였죠. 마셔보면 정말 기막혀요.” 탁재형 씨가 본격적으로 음주 기행에 눈을 뜬 것은 이탈리아에서다. 위스키와 코냑이 전부인 줄 알던 유럽에서 그라파(Grappa, 와인용 포도즙을 짜고 남은 찌꺼기를 발효시킨 뒤 증류한 술)를 맛보고는 ‘어느 나라를 가도 각 지역을 대표하는 전통 술이 있을 텐데, 그 술만 다 먹어보고 다녀도 행복하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이후로 취재를 다닐 때면 현지인이 마시는 술을 곁눈질하고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그들과 섞여 놀았다. “한곳에서 오래 취재해야 하는 일정이면 머무는 동안 술집이든 밥집이든 딱 한 곳만 줄기차게 가요. 잠깐이지만 그 지역에 단골집을 만드는 것이죠. 그러다 보면 누군가는 저를 기억해서 친구가 되곤 해요. 그때부턴 뭐….” 스스로 ‘놀자 중추’가 몸을 지탱하고 있다고 말하는 그는 여행에서 만난 어떤 인연이든 그 자리엔 늘 술이 빠지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탁재형 씨가 직접 페루 국민 칵테일 피스코 사워(pisco sour)를 만들어 낸다. 발효한 포도즙을 증류해 만든 남미식 브랜디 피스코에 시럽과 라임을 첨가한 피스코 사워는 달걀흰자로 낸 부드러운 거품이 먼저 입술에 닿고, 이내 달콤한 술이 목을 타고 내려온다. 그는 집에서 술을 마실 때면 자신만의 의식을 반드시 거친다. 조명은 최대한 어둡게 하고, 향을 피운 뒤 그 나라에서 가져온 음악을 트는 것. 취재를 핑계 삼아 그의 술 라이브러리를 점령한 우리에게 그가 조용히 말한다. “자, 이제 향 하나 피울까요?”

러시아 카프카스 마을. 결혼식에 참석해 현지인과 보드카를 마셨다. © 탁재형


<스피릿 로드>(시공사, 1만3,000원)는 탁재형 씨가 세계 각국에서 맛본 기이한 술과 에피소드를 담은 여행책. 그는 현재 <탁피디의 여행수다> 팟캐스트를 운영 중이다.




일드와 애니메이션을 따라 성지순례

이지성 씨. © 박상수

한 분야에 열중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 특정 취미와 사물에 깊이 몰두하는 사람 혹은 이를 연구하는 사람. 바로 오타쿠다. 이지성 씨는 일본 드라마와 영화, 만화에 등장한 촬영지에 관해서는 진정한 오타쿠가 되길 원하는 여행자다. “고등학교 때 접한 일본 드라마와 영화에 빠져 늦은 나이에 무작정 일본으로 어학연수를 떠났어요. 당시 아는 일본어라곤 영화 <러브레터>에서 들은 ‘오겡키데쓰카? 와타시와 겡키데쓰!’뿐이었죠.” 그는 일본에서 아침저녁으로 신문을 돌리고 낮에는 열심히 일본어를 배우며 틈날 때마다 일본 드라마 촬영지의 발자취를 좇았다.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드라마 <1리터의 눈물>에 등장한 요코하마의 코시다 두부 가게(越田屋豆腐店). 일반인에게는 평범한 두부 가게로 향하는 여정이 기이해 보일지 몰라도 지성 씨는 그곳을 심장이 쿵쾅거릴 정도로 설레던 첫 드라마 여행지로 추억한다. 그렇게 그는 대략 70여 편이 넘는 일본 드라마와 영화, 애니메이션까지 실제 배경지를 찾아 일본 전역을 돌았다.

(왼쪽)일본 오타쿠와 인터뷰 후 함께 남긴 1컷. (오른쪽)일본 코믹마켓에서 만난 50대 오타쿠.© LEE JI-SUNG


촬영지에 도착하면 이지성 씨는 주인공이 머물던 장소에서 영상과 똑같은 포즈를 취해 사진을 찍고, 음식점에서는 드라마에 등장한 음식을 직접 시식하기도 한다. 촬영 당시의 에피소드를 듣기 위해 주변 취재도 빠뜨리지 않는 게 그만의 여행법.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영화 <러브레터>의 촬영지였어요. 나카야마 미호의 집으로 등장한 곳이 삿포로와 오타루 중간쯤에 위치한 제니바코(銭函) 지역인데, 찾아가니 불에 타서 담벼락만 남아 있더라고요. 저 같은 영화 팬에게는 성지와 같은 곳이라 무척 가슴 아팠어요.” 찾아갔는데 세트를 철수해서 허허벌판이거나 막상 현실에서 마주하니 초라해 보일 때도 많다. 더구나 관광지가 아닌 경우엔 찾아가는 교통편부터 까다롭다고. 예컨대 영화 <스윙걸즈>의 촬영지인 요네자와(米澤)는 대중교통 이용이 쉽지 않아 자전거로 50킬로미터를 돌아다녀야 했다. 하지만 만화 <슬램덩크>나 <명탐정 코난>의 배경지를 찾아다닌 여행은 일본에서 애니메이션의 힘을 다시금 느낀 의미 있는 여행으로 기억한다. “<슬램덩크> 연재가 끝난 지 20년이 지났지만, 만화에 등장한 노면전차와 건널목 역을 보기 위해 전 세계 팬이 배경지인 에노시마와 가마쿠라를 찾아요. <명탐정 코난>은 한 편의 시리즈를 제작할 때 특정 지역을 스토리 안에 넣고 그에 맞춰 지역 관광 상품과 특별 철도 패스를 함께 만들기도 하죠.” 이미 그를 앞선 현지 일본 드라마 오타쿠는 지금도 촬영지 여행에 많은 도움을 주는 숨은 조력자다. “제가 생각하는 오타쿠는 고약한 취미를 가진 사람이에요. 흔히 오타쿠 하면 부정적 이미지만 떠올리는데, 실제 엽기 복장으로 거리를 나서는 사람도 평범한 회사원이거나 대학생인 경우가 많아요. 다만, 남들과 다른 특이 취향을 가진 것뿐이죠.”


이지성 씨가 독특한 여행을 멈추지 않는건 한 사람의 특별한 취향이 새로운 문화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오타쿠라는 수식어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시작한 무모한 여행이 어느덧 3권의 책이라는 결과물을 낳은 것처럼, 앞으로도 자신의 가치관을 고수하며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 예정이라고. 일본을 섭렵한 그의 다음 행선지는 유럽으로, 고전영화 촬영지를 찾아 떠날 계획이다.

영화 <러브레터> 촬영지에서 주인공과 똑같은 포즈를 취했다. © LEE JI-SUNG

<만화를 찾아 떠나는 일본여행>(어문학사, 1만7,000원)은 이지성 씨의 세 번째 책으로, 만화 배경지를 찾아 다닌 기상천외한 일본 여행기를 담았다.


 유미정 ∙ 사진 박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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