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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로드 Feb 22. 2016

일본 시코쿠 기차 여행

남쪽 바다, 고즈넉한 시코쿠를 기차로 한 바퀴 돌아보자. 4개 현의 경계를 넘을 때마다 또 다른 풍경을 만난다.


다카마쓰 역(高松駅)


시코쿠(四國) 북동쪽의 평화로운 항구도시 다카마쓰에 서 기차 여행을 시작하자. 이곳은 가가와 현(香川県)의 현청 소재지이기도 하다. 아담한 시가지를 산책하며 새로운 가게를 발견하고, 식당마다 다른 우동 맛을 비교하다 보면 기차 탑승일을 미루게 될지도 모른다.

다카마쓰의 항구. © 임학현

우동 한 그릇 더!

“이건 내가 지금까지 먹어본 어떤 우동과도 달랐다. 우동 면발이 쫄깃쫄깃하고 신선하며 국물 맛도 좋았다. 게다가 가격도 깜짝 놀랄 만큼 싸다. 너무 맛이 있어서 한 그릇 더 시킨다. 덕분에 오랜만에 배가 불러서 행복한 기분이 된다.”(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 중)

다무라 카프카가 식욕 왕성한 15세 소년이고,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 그 이유만은 아니다. 소설 속 무대가 다카마쓰란 점을 감안한다면 말이다. 만일 당신이 다카마쓰에서 처음 우동을 맛본다면 면을 후루룩 삼키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지고, 만족스러운 미소가 퍼질 것이다. 우동을 좋아하지 않는 이도 예외가 아니다. 이건 그냥 우동이 아니라 사누키(讃岐) 우동이니까. ‘탱탱하고 쫄깃한 면발’ 같은 묘사도 그 맛에는 미치지 못할 테니 차라리 우동 먹는 방법에 대해 얘기하자. 사누키는 다카마쓰가 속한 가가와 현의 옛 지명이다. 사누키 우동은 기본적으로 뜨거운 가마아게(釜あげ)와 차가운 붓가케(ぶっかけ)로 나뉘며 별다른 간을 하지 않는 게 정석이다. 쫄깃한 면발을 오래 즐기고 싶다면 가게 우동에 쓰유를 곁들이는 붓가케가 좋다. 면을 한 젓가락 집어 들고서 생강과 파를 섞은 쓰유에 살짝 찍어 먹으면 된다. 겨자와 식초, 미소를 섞어 만드는 가가와 전통 소스도 있다. 면은 밀가루와 소금, 물만 섞어 손수 반죽한다. 면만 먹어도 맛있을 정도여서 면발에 집착하는 이는 소스를 생략하기도 한다.

“여름 방학이면 점심은 우동이었죠. 준비된 면을 3분만 삶으면 완성이니까요.” 다카마쓰 토박이 청년 쓰루미 가즈요시(鹤見一議)가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엄마들은 애들을 우동 가게로 심부름 보내곤 했어요. 1개에 50엔짜리 생면을 사오라고요.” 가가와 사람 누구나 우동에 얽힌 추억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다. 우리는 우동 그릇을 앞에 두고 잠시 애틋한 분위기에 젖는다. 지금이 한밤 중이고, 여기가 심야 영업하는 수타 우동집 쓰루마루(鹤丸)의 비좁은 2층 구석 자리고, 아래층에서 취객의 즐거운 외침이 들려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즈요시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이곳 쓰루마루에서 면을 삶는 일을 맡고 있으며 언젠가 가게를 물려받을 것이다. 우리는 아래층 주방에서 부자가 우동 만드는 것을 구경한다. 아버지 야스오(康生)가 반죽을 잘라 면을 만들고, 가즈요시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큼직한 솥에 면을 삶는다. “면발이 왜 그렇게 쫄깃하냐고요? 면 반죽은 신선한 재료로 만듭니다. 반죽을 손으로 내려칠수록 탱탱해지는데 너무 많이 치면 질겨지니 정도를 적당히 조절해야 해요. 면 반죽을 자른 뒤 바로 삶아 30분이 지나기 전에 손님에게 제공하니까 면발이 항상 쫄깃하지요. 가장 중요한 건 면의 맛과 질감을 늘 일정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거예요. 계절마다 물과 소금 양을 다르게 해야 하죠.” 야스오가 인심 좋게도 반죽 자르는 큼직한 칼을 내게 건네준다. 오이 썰듯 휙휙 내리치기만 하면 될 것 같은데 그게 꽤나 어렵다. 야스오는 면을 보고 빙긋 웃더니, 그대로 들고서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다.


사누키 우동 반죽을 만들고 있는 쓰루미 야스오. 35년 된 시내 우동집 쓰루마루의 우동. © 임학현


ⓘ 쓰루마루 
가마아게 · 붓가케 600엔, 소스 추가 시 100엔, 8pm~3am, 高松市古馬場町 9-34.


다카마쓰 힙스터는 부둣가 창고로 간다

다카마쓰에서 가장 새로운 풍경은 시내 북동쪽 부둣가의 80여 년 된 창고에 있다. 다카마쓰 항구로 들어온 선박의 화물을 보관하던 창고에 들어선 기타하마아리(北浜アリー). 수십 년간 버려져 있던 4동의 창고에 2000년부터 카페 겸 델리카트슨 206 츠마무(206 Tsu Ma Mu)를 시작으로 숍, 레스토랑, 바와 카페가 하나 둘 들어서기 시작했고, 현재 총 18개 매장이 운영 중이다.

206 츠마무 맞은편의 엘리먼트(Element)는 7년 전 문을 연 라이프스타일 소품 숍으로, 눈이 정신없이 돌아가게 만드는 곳이다. 사방에 아기자기한 디자인 제품이 널려 있고, 2층에는 알록달록한 구식 길거리 게임기가 빽빽하다. “100엔짜리 동전을 넣고 게임을 할 수 있어요.” 젊은 주인 후지사와 마사히로(藤澤昌弘)가 말한다. “오늘은 아쉽게도 쉬는 날이지만요. 이런 게임기는 일본에서도 희귀한 거예요.” 게임기뿐 아니라 귀여운 피규어와 문구류 등 소품 하나하나 주인의 취향이 밴 것들이니 이곳은 그의 아지트나 다름없다. 마사히로도 고개를 끄덕인다. “기타하마아리는 비밀 기지 같은 곳이지요. 시내에서 좀 떨어져 있지만 문화 예술에 관심 있는 이가 많이 찾아옵니다. 요새 우리 가게에서 인기 있는 제품은 이 천 가방인데, 태양계 일러스트레이션 위에 행성 모양의 브로치를 붙였다 떼었다 할 수 있어요.” 가방을 보여주는 그의 얼굴이 아이처럼 해맑다.

라이프스타일 숍 엘리먼트의 주인 후지사와 마사히로. © 임학현

기타하마아리의 어떤 가게는 위장술에 능하다. 엘리먼트 바로 뒤쪽 건물처럼 말이다. 탁 트인 1층은 각종 공구와 버려진 가구 등 잡동사니가 널려 있어 영락없는 창고지만, 2층으로 올라가면 독립 서점 북 마루테(Book Marute)가 영업 중이다. 서점 대표와 직원이 함께 책을 선별하는데 주로 사진집과 예술 서적을 다룬다. “세토나이카이(瀬戸内海)에 살고 싶어서 다카마쓰에 왔어요.” 점원 사토 유리(沙藤ユリ)가 말한다. 세토나이카이는 혼슈(本州)와 시코쿠, 규슈(九州) 섬 사이를 흐르는 바다를 말한다. “이 지역은 나오시마 예술 축제 등 문화 예술 활동이 활발한 곳이죠. 따뜻하고, 경치도 좋고요. 여기서 일한 지는 7개월 됐어요. 기타하마아리가 오래된 건물을 개조한 점이 마음에 들어요. 전 오래된 것을 좋아하거든요. 원래 이곳은 공구를 팔던 허름한 가게였는데 보시다시피 지금은 예술 책을 판매하고 있죠.” 그녀의 순수한 흥분이 손님에게 그대로 전염되는 듯하다.

기타하마아리에는 트렌디한 가게가 즐비하다. © 임학현

ⓘ 기타하마아리의 매장 정보와 소식은 kitahama-alley.jp에서 볼 수 있다.
ⓘ 엘리먼트 11am~8pm, blog.livedoor.jp/naja_plus
 북 마루테 1pm~8pm, facebook.com/BookMarute




도고온센 역(道後溫泉駅)


다카마쓰에서 출발해 시코쿠 북쪽 해안선을 따라 서쪽으로 가자. 이따금 차창 밖으로 보이는 바다가 마음을 시원하게 해줄 것이다. 에히메 현(愛媛県)의 현청 소재지이자 시코쿠 최대의 도시인 마쓰야마(松山)는 다카마쓰에서 160킬로미터가량 떨어져 있다. 기차로 약 3시간 30분 거리다. 마쓰야마 역 앞에서 구식 노면전차를 타고 25분쯤 달리면 종점인 도고온센 역에 도착한다.

 도고온센혼칸은 지은 지 100년이 넘었다. 도고온센 아케이드를 거니는 온천 순례객. © 임학현


성스럽고 달콤한 온천욕

자욱한 증기에 휩싸인 목욕탕 안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무색해지는 법이다. 오래된 목욕탕에선 더 그렇다. 아담한 대중탕을 에워싼 화강암 벽에는 세월의 흔적이 역력하다. 탕 한가운데에 온천을 다스리는 두 신 오쿠니누시노미코토와 엄지손가락만 한 스쿠나노히코나노미코토 석상이 미소를 띤 채 서 있다. 두 신의 발치에서 서너 명의 온천객이 무심한 얼굴로 몸을 담그고 있다.

이곳은 1894년에 지은 도고온센혼칸(道後溫泉本館)의 대중탕인 가미노유(神の湯)다. 일본 3대 온천 중 하나로 꼽는 도고온센 온천수의 역사는 3,000년이 넘었다고 한다. 3층짜리 도고온센혼칸 건물은 압도적이고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지만, 이곳이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모티프가 되었다는 소문은 사실 확인된 바가 없다. 다만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도련님>의 무대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나쓰메 소세키는 절친한 하이쿠 시인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가 살던 마쓰야마에서 2년 정도 지낸 적이 있는데 당시의 경험을 토대로 <도련님>을 집필했다고 한다. “나는 이곳에 온 이후로 매일 스미다의 온천에 다니고 있다. 다른 곳은 도쿄의 발뒤꿈치만큼도 못 따라 올 수준이었지만 스미다의 온천만큼은 훌륭했다.” 이런 구절에 작가의 진심이 묻어 있는 것이다.

낡은 나무 사물함, 동그란 계기판이 달린 구식 체중계, 나무로 만든 목욕탕 의자와 바구니, 온천을 다스리는 두 신을 그린 그림. 이 같은 정겨운 풍경과 도고온센 특유의 복잡한 온천욕 코스는 100여 년이 흐른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온천욕 코스는 총 네 가지인데 그중 가장 저렴한 것이 가미노유만 이용하는 코스다. 여기에 2층 휴게실에서 말차와 전병을 즐길 수 있는 코스, 고급 탕 다마노유(玉の湯)를 이용하는 코스, 3층 개인실을 이용하는 코스까지 있다. 참고로 나쓰메 소세키가 즐긴 것은 다마노유에 3층 개인실을 이용하는 코스였다고 한다.

뜨끈하게 몸을 데운 후엔 도고온센 앞의 아담한 아케이드로 가서, 색색의 유카타를 걸치고 게타를 끌고 다니는 온천객 무리에 합류하자. 불 밝힌 아케이드에는 먹거리와 기념품을 파는 상점이 즐비하다. 노란색, 녹색, 팥색의 동글동글한 삼색 당고, 에히메산 귤로 만든 젤리나 음료, 마쓰야마의 명물 타르트 등. 100년 전으로 돌아간 온천욕은 이렇게 달콤하게 끝난다.

도고온센의 고급 탕 다마노유. 마쓰야마의 명물 타르트와 말차. © 임학현


ⓘ 도고온센혼칸
가미노유 410엔, 다마노유 2층석 1,250엔, 6am~10pm, 가미노유는 11pm까지. 현재 영화감독이자 미술가인 니나가와 미카(蜷川実花)와 컬래버레이션한 작품으로 창문을 장식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2월 29일까지다. dogo.or.jp



이노 역(伊野駅)


마쓰야마에서 시코쿠 남부의 중심도시 고치(高知)까지 기차를 탈 경우, 해안선을 따라 돌아가므로 오래 걸린다. 버스를 이용하면 산맥을 가로질러 2시간 30분 만에 고치 역에 도착한다. 고치 시에서 전차로 10분 거리인 작은 마을 이노에는 특별한 즐거움이 기다린다.

이노 역의 한산한 일요일 오후. © 임학현

시골 맞아?

일요일 오후, 고치 역에서 이노 역으로 가는 전차 안에서 운전수와 차장은 1쌍의 인형처럼 완벽하게 합을 맞춘다. 운전수는 복잡한 구식 계기판을 악기 연주하듯 다룬다. 이따금 둘은 동시에 오른팔을 대략 45도 위로 쭉 뻗은 채 둘째손가락으로 위풍당당하게 앞쪽을 가리킨다. 둘 다 잠시도 한눈을 팔지 않고 열중해 마치 중요한 의식을 치르는 듯하다. 반면 뒤쪽의 좌석은 평화로운 풍경이다. 따뜻한 해를 쬐며 좌석에 앉아 있는 이들의 얼굴이 행복하게 빛난다. 대부분이 이웃 마을로 놀러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전차는 작은 마을과 들판과 수풀 사이로 난 좁은 철로 위를 달려 이노 역에 정차한다.

이노는 고치 현(高知県) 서쪽의 한적한 시골 마을이다. 전차에서 내려 일본에서도 맑기로 유명한 니요도 강(仁淀川)을 따라 택시를 타고 달린다. 이곳 주민 다수가 부추, 생강 등을 농사지어 자급자족하며 산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여행자를 기다리는 것은 의외로 전통 종이 공예와 프렌치 요리다.

“나무 판으로 물을 적당히 뜨고서 흔드세요. 풀 덩어리가 가라앉을 때까지 몇 초 기다린 뒤 물만 따라내세요.” 19년 경력의 도사 종이 공예 강사 이토(伊東)가 발랄한 목소리로 외친다. 그녀는 팔을 걷어붙인 채 굼뜨게 작업 중인 학생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작업을 도와준다. 이곳은 도사와시(土佐和紙) 공예 마을의 크라우드(Qraud) 공예 체험 공간. 도사와시는 ‘종이 뜨기’라는 전통 제조법으로 만든 닥나무 한지인데 이노 지역에서 생산한 도사와시는 수백 년 전부터 전국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 크라우드의 종이 뜨기 클래스를 신청하면 전통 방식 그대로 도사와시를 만들어볼 수 있다. 초보자도 쉽게 만들 수 있도록 닥나무 원액에 화학 풀과 펄프를 섞어서 사용한다는 점만 다르다. 이제 예술성을 발휘할 시간이다. 학생들은 닥나무 반죽 위를 꽃과 풀로 장식하는 데 여념이 없다. 이렇게 만든 도사와시를 30분 정도 건조시키면 완성이다.

도사와시 만드는 방법을 설명 중인 강사 이토. 건조하기 직전의 도사와시 반죽. © 임학현


종이가 마르는 동안 아담한 정원을 감상하며 프렌치 코스 요리를 맛보자. 공예 체험 공간 옆에 있는 내추럴 테이스트 레스토랑(Natural Taste Restaurant)에서 현지의 제철 식자재를 사용한 프렌치 요리를 낸다. ‘오늘의 런치’를 시키면 수프와 빵, 샐러드, 메인 요리, 후식까지 나온다. 오늘의 메뉴는 닭고기 푸알레(poeler). 요리에 사용한 채소부터 메인 요리까지 하나같이 산뜻하고 부드러운 맛이다. 더없이 평화로워진 기분으로 커피를 홀짝이고 있으니 직원이 두툼한 봉투를 가져다준다. 방금 서툴게 꽃을 붙인 도사 종이 엽서가 안에 들어 있다. 전통 종이와 프렌치 요리는 이렇게 어울렸다.

이노의 자랑 크라우드에서 맛보는 프렌치 요리. 고치의 지쿠린지에서 소원을 비는 소년. © 임학현


ⓘ 크라우드
이노에서 20년째 운영하고 있는 복합 문화 시설이다. 갤러리와 숙소, 스파도 있다. 도사와시 공예 체험 600엔(꽃 포함), 체험 프로그램은 웹사이트에서 예약 가능, qraud-kochi.jp

ⓘ 내추럴 테이스트 레스토랑
런치 코스 1,150엔부터, 11am~3pm, 6pm~9pm.



오보케 역(大歩危駅)


이제 시코쿠 내륙으로 갈 차례다. 고치 역에서 동북쪽으로 오보케 역까지는 기차로 1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여기는 시코쿠 산맥의 한복판이다. 오보케 역은 무인 역이고, 현지 교통편도 마땅치 않으니 숙소 측에 미리 교통편을 요청하자. 시코쿠에서 가장 외딴 고장에 온 것을 환영한다.


이야 계곡의 악명 높은 덩굴다리 가즈라바시. © 임학현

섬의 한가운데서

“시골 버스는 오래됐어~” 낡은 스피커에서 지지직거리며 경쾌한 멜로디가 흘러나오자 승객들이 웃음을 터뜨린다. <이웃집 토토로>에 나온 것과 똑같은 새파랗고 귀여운 보닛(bonnet) 버스가 덜컹거리며 아찔한 협곡 위를 지난다. 이 버스는 일본 각지에서 수십 년 전 운행하던 차종이어서 일본인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도쿠시마 현(徳島県) 서부의 미요시 시(三好市)는 시코쿠 내륙 한복판에 자리한 산골 마을. 광활한 시코쿠 산맥이 솟아 있는, 시코쿠에서 가장 외딴 고장이다.

아름다운 오보케 계곡(大歩危渓)과 이야 계곡(祖谷渓)을 돌아보는 보닛 투어 버스는 이렇듯 향수와 일말의 미스터리를 싣고 달린다. 가끔씩 절벽 위 코너를 돌다가 기우뚱하기도 하면서. 수묵화인 듯 첩첩이 짙푸른 산맥을 온통 안개가 휘감고, 거대한 계곡 밑바닥에는 짙푸른 강물이 유유히 흐른다. 이야 계곡은 이야 강(祖谷川)을 따라 20여 킬로미터 뻗어 있다. 투어 코스는 놀이기구처럼 스릴이 넘친다. 버스는 200미터 높이의 절벽 끝에서 있는 오줌싸개 소년 동상, 듬성듬성한 발판 틈새로 금세 발이 빠질 듯한 덩굴 다리 가즈라바시(かずら橋) 앞에 차례로 정차한다. 나이 지긋한 버스 안내원은 입을 다물지 못하는 승객을 향해 반쯤은 자랑스럽고, 반쯤은 귀여워하는 듯한 미소를 짓는다. “여기는 미요시 시에서도 가장 외딴 고장이지요. 미요시 시내에 사는 저도 6년 전 보닛 투어 버스에 취직하면서 처음 왔답니다.”

요시노강에서 잡은 생선 화로 구이. 이야 계곡을 달리는 보닛 버스. © 임학현


이야 계곡을 둘러본 후엔 서쪽으로 향할 차례다. 일본에서 가장 험한 강 중 하나로 꼽는 요시노 강(吉野川)은 장장 2억 년에 걸쳐 이곳에 오보케 계곡 그리고 그보다 살짝 규모가 작은 고보케 계곡(小歩危渓)을 형성했다. 이야 계곡보다 신비로움은 좀 덜하지만, 끝없이 펼쳐진 듯한 웅장한 협곡과 짙은 에메랄드빛 강물이 여전히 탄성을 부른다. 투어에 포함된 오보케 계곡 관광 보트는 그 절경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는 수단이다.


모험심 많은 이라면 오보케 계곡에서 꼭 노를 저어 보길 권한다. “우리는 단지 강을 사랑할 뿐입니다.” 래프팅 가이드 테루(Teru)가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며 무뚝뚝하게 말한다. 그는 호주 케언스(Cairns) 출신의 마크 트레스턴(Mark Treston)이 운영하는 래프팅 전문 업체 해피 래프트(Happy Raft)의 창립 멤버다. 철길 한쪽에 있는 해피 래프트 사무실은 오보케 계곡을 내려다보고 있다. 컨테이너 건물 앞에 주차한 버스 여러 대는 파스텔 톤으로 알록달록하게 칠했고, 멋진 글씨체로 ‘Happy Raft’라고 써놓았다. 그 뒤쪽에는 고무 보트와 큼직한 노들이 걸려 있다. 테루는 17년 전 오보케 계곡으로 이주하고서 생전 처음으로 래프팅을 배웠고, 금세 빠져들었다. “요시노 강은 일본에서 래프팅하기 가장 좋은 강이에요. 우리에게는 천국이지요. 산과 해변. 시코쿠에는 모든 게 있어요.” 섬의 한가운데, 2억 년 된 골짝에는 젊은 활기가 넘쳐흐른다.


ⓘ 오보케 · 이야 정기 관광 투어 버스
이야 계곡과 오보케 계곡을 둘러보는 5시간 45분짜리 코스 7,500엔(점심 식사·관광 시설 입장료 포함), 현지 호텔 및 아와 이케다 버스 터미널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예약 가능. 3~11월 운영, yonkoh.co.jp

ⓘ 해피 래프팅 
하프 데이 래프팅 투어 5,000엔부터, 겨울철 휴무, happyraft.com



도쿠시마 역(徳島駅)


이번 여정의 종착지는 시코쿠 동부 해안 도시이자 도쿠시마 현의 현청 소재지인 도쿠시마 시다. 오보케 역에서 기차로 1시간 45분 거리에 있다.

도쿠시마 역 앞의 시내 풍경. © 임학현

바닷가 도시에서는 모두가 춤춘다

기차 여행의 마지막 도시인 도쿠시마는 언뜻 평범해 보이는 작은 해안 도시다. 이렇다 할 역사 유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현대적 도시긴 하지만 시내가 눈에 띄게 세련된 것도 아니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머리를 비우고 유유자적 쉬어가기 좋은 곳이란 얘기가 된다. 아기자기한 시가지는 느긋하게 걷기 좋고, 바닷가에 자리해 1년 내내 싱싱한 해산물을 맛볼 수 있다.

그래도 이 도시에는 남다른 명물이 있다. 바로 아와오도리(阿波おどり) 춤이다. 이를 확인하려면 디스코텍이나 클럽이 아니라 아와오도리 회관(阿波おどり会館)으로 가야 한다. 아와오도리는 400년 역사를 지닌 도쿠시마 전통 춤인데 도쿠시마 사람은 누구나 이 춤을 출 수 있다고 한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아와오도리 수업을 받는 덕분이다. 춤을 정말 좋아하는 이는 아와오도리 그룹인 렌(連)에 가입한다. 매년 8월에 열리는 아와오도리 축제 때는 840여 개의 렌이 길거리에서 밤새도록 춤을 추고, 100만여 명의 관광객이 이를 보러 몰려든다.

“얏토사! 얏토! 얏토!” 무대 위에서 기모노 차림의 무용수들이 신나게 구호를 외치며 춤을 춘다. 한쪽에서 악단이 경쾌한 템포의 전통 음악을 연주한다. 무용수들은 지친 기색 없이 내내 환한 얼굴이다. 아와오도리는 단순한 동작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춤이다. 무용수들은 무릎을 구부린 채 리듬에 맞춰 한쪽 팔을 머리 위로, 다른 쪽 팔은 앞쪽으로 번갈아 뻗으며 나아간다. 동작이 쉬워 보이지만 실제로 따라 해보면 꽤나 어렵다. 우선 앞으로 뻗은 팔과 같은 쪽 발을 들어 나아가야 하고, 손끝과 발끝은 절도 있게 휘둘러야 한다. 춤은 직접 춰봐야 제맛인 법. 공연 도중 지원자를 무대 위로 불러 춤을 가르쳐주는 이벤트에 꼭 참여해보자.

1시간여의 공연이 끝난 뒤 밖으로 나온 관객들은 무용수와 사진을 찍느라 여념없다. 아와오도리 회관에서는 여러 렌이 돌아가면서 공연하는데 이번은 아오리 렌(あおり連) 차례다. 아오리 렌의 리더인 오니시 마사시(大西斉史)는 아와오도리를 춘 지 50년이 넘었고, 그중 40년을 아오리 렌에서 보냈다. “각 렌마다 저마다 전통과 개성을 지니고 있어요. 우리 아오리 렌은 다채로운 무늬의 기모노를 입고 부채를 사용한답니다. 연을 본 딴 동작도 특징이죠.” 열한 살의 하토리 소라(羽鳥空)의 붉게 상기된 얼굴엔 아직도 무대의 흥분이 남아 있는 듯하다. “엄마가 시켜서 시작했어요.” 춤을 추게 된 사연에 대한 하토리의 대답은 단순 명쾌하다. “지금은 왜 하냐고요? 즐거우니까요.”

400년 된 도쿠시마의 전통 춤 아와오도리. © 임학현

ⓘ 아와오도리 회관
낮 공연 500엔, 저녁 공연 700엔, 하루 4회 공연, awaodori-kaikan.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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