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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로드 May 16. 2016

유럽의 낭만, 잘츠부르크를 경험하다

유럽 지도를 펼쳐놓고 중간을 짚으면 그곳은 오스트리아일 확률이 높다. ‘유럽의 심장’이라 불리는 이곳은 동서 유럽의 접점에 자리하며 8개의 국경과 맞닿아 있다. 정식 명칭은 오스트리아공화국(Republic of Austria). 중세 신성로마제국이 주축이 되어 세웠고, 수도 빈과 잘츠부르크를 포함해 9개 연방 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오스트리아 서부에 자리한 잘츠부르크는 8세기 가톨릭 주교가 통치하면서 가톨릭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한 곳. 바로크 양식의 교회와 궁전, 알프스 산맥에 둘러싸인 천혜의 자연환경은 이 도시를 대표하는 매력이다. 잘츠부르크의 구시가는 당장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찍어도 될 만큼 옛 흔적이 가득하고, 문화적 자긍심도 대단하다. 부유했던 그때를 상기 시키듯 울려 퍼지는 클래식 음악과 거리의 마차는 그림처럼 도시 풍경과 어우러진다. 겨울과 봄 사이, 잘츠부르크의 속살을 들여다보기 위해선 일단 차에 올라 도시를 둘러싼 알프스로 향해야 한다.

알프스 산맥에 둘러싸인 잘츠부르크 도심. 바로크 양식의 교회와 파스텔 색의 건물이 골목을 촘촘히 메운다. © 이규열

 The Mountain

알프스 파라다이스 속으로


봄이 오는 속도가 영 더딘 것일까? 사방을 둘러싼 산은 여전히 두꺼운 솜이불을 덮고 도통 초록 잎을 드러내지 않는다. 안개 자욱한 어스름한 새벽, 바트 호프가슈타인(Bad Hofgastein) 마을에서 바라보는 전경은 갤러리에 걸린 풍경화처럼 빛난다. 해발 1,000미터 이상에서 자라는 침엽수가 촘촘히 산기슭을 메우고 고개를 조금만 들어 올리면 새하얀 눈이 소복한 겨울 알프스. 그 아래 마을은 이스터 휴가에 막바지 스키를 즐기러 온 여행객으로 북적인다. 오스트리아 전통 목조 가옥이 즐비한 이곳은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대문을 열고 불쑥 튀어나온다 해도 크게 놀라지 않을 만큼 동화적이다. 호텔에서 막 조식을 마친 이들이 두툼한 스키복을 입고 뒤뚱거리며 활보할지라도.


잘츠부르크 도심에서 남쪽으로 약 1시간 거리에 떨어진 가슈타인 밸리(Gastein Valley). 알프스 산맥 아래에 3개 마을이 사이좋게 모여 있다. “이곳은 오랫동안 왕족의 휴양지로 불렸어요. 특히 온천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후 엘리자베스가 사랑했던 곳이지요.” 가슈타인관광청에서 일하고 있는 마르티나 엘마우어(Martina Ellmauer)가 온천 물에 대한 자랑부터 시작한다. 미모가 빼어난 엘리자베스 황후가 드나들었다 하여 이곳 온천에서 목욕을 하는 건 유럽 여성이 꿈꾸던 휴양이었다고. 또한 가파른 산속 동굴로 들어가 땀을 뻘뻘 흘리며 즐기는 라듐 온천의 치료 효능이 알려지면서 지금까지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바트 호프가슈타인(Bad Hofgastein), 바트 가슈타인(Bad Gastein), 도르프가슈타인(Dorfgastein) 세 마을 중 온천이 있는 곳에는 바트(온천)라는 이름이 붙는다. 대부분 수영복을 입고 남녀노소가 함께 온천을 즐기지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남녀가 함께 들어앉은 사우나도 경험할 수 있다.

바트 호프가슈타인에 자리한 알펜테름 온천(Alpentherme Gastein)의 노천탕. © 이규열

겨울철 산맥을 넘나들며 수렵을 하던 여기 사람들에게 스키는 이동수단으로 먼저 자리 잡았다. 현재는 총 208킬로미터의 광활한 슬로프로 스키 마니아를 불러 모은다. 4개의 스키장에 걸쳐 있는 리프트만 60개, 산맥을 아우르는 어마어마한 슬로프 규모에서부터 입이 떡 벌어진다. 알프스 산맥을 휘저으며 만끽하는 풍경 또한 압도적이다. 이토록 화려한 스키 슬로프를 두고 동계 올림픽 개최지 선정에서 세 번이나 탈락한 것이 의아할 정도로. “스키 시즌은 11월부터 시작해 2월까지 피크지만, 3월 말 이스터 휴가에는 지금처럼 북적이죠. 가장 높은 봉우리에서는 5월 첫째 주까지도 스키를 즐겨요. 물론 모든 건 날씨가 정하지만요.” 엘마우어가 말한다. 그녀가 몰고 온 차를 타고 구비구비 올라 산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동안 고도는 서서히 높아진다. “오늘 같은 날은 스키보다 하이킹이 좋아요.” 베테랑 가이드 나글마이어 한스(Naglmayr Jans)는 간밤에 소복하게 쌓인 눈에 찬사를 쏟아낸다. 스키 플레이트의 3분의 1밖에 안 되는 짧고 넓적한 스노 슈즈를 건네받고 그와 함께 길을 나선다. 어느새 새벽 창밖으로 보던 그림 속에 들어와 이제 두 발은 눈 속에 푹 파묻혀 있다. 사방은 키 큰 나무가 빽빽하게 둘러쌌다. “이곳은 저만의 작은 파라다이스예요.” 스키장 입구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한스는 이제야 자신의 집에 들어온 걸 환영한다는 듯 말을 시작한다. 그는 오스트리아 알프스 품에서 태어나 머리카락과 턱 밑의 수염이 눈처럼 하얗게 샌 지금까지 이곳을 떠나본 적이 없다. 산은 그의 직장이자 삶의 터전인 셈. “매일 새벽에 일어나 숲을 걸어요. 걷다 보면 잠이 깨고, 고요한 기분을 만끽하다 보면 행복하고, 나중엔 점점 피곤해지지요.” 우거진 나무를 헤치고 스키를 타듯 쭉 언덕을 내려간 다음 다시 폴대를 짚고 산을 오르는 동안 어느새 고도는 20미터나 높아졌다. “휘익-, 쓰윽, 툭.” 봄기운을 감지한 산새의 울음소리, 스노 슈즈가 눈에 미끄러지는 소리, 나뭇가지에 걸린 눈 뭉치가 힘없이 내려앉는 소리뿐이다. 마치 이 세상에 한스, 사진가와 함께 단 3명만 남은 듯 조용하다.

산골짜기를 타고 시원하게 떨어지는 바트 가슈타인의 폭포(Gasteiner Wasserfall). © 이규열


“자, 8분 후에 해발 2,250미터에 도착합니다.” 3시간짜리 하이킹에 지친 일행을 위해 한스는 조금 쉬운 방법을 택했다. 곤돌라를 타고 슈투브너코겔(Stubnerkogel) 봉우리에 도착한 우리는 길이 140미터 폭 1미터의 아찔한 현수교를 눈앞에 두고 서 있다. 2개의 봉우리를 잇는 다리는 유럽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세워졌다. 애석하게도 이 다리를 건너야만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해발 3,798미터의 그로스글로크너(Groβglockner)의 전망을 감상할 수 있다고. 슐로샬름(Schlossalm)–앙거탈(Angertal)–슈투브너코겔로 이어지는 87킬로미터의 스키 슬로프는 가슈타인 밸리에서 가장 긴 코스다. 조금 전, 스노 슈즈를 신고 산속을 헤매는 동안, 플레이트를 밀며 쏜살같이 사라지던 스키어가 바로 여기에서 내려온 것이다. 스키 실력이 출중하다면 약 400미터를 더 올라가 가슈타인 밸리에서 가장 높은 슬로프인 크로이츠코겔 스포트가슈테인(Kreuzkogel Sportgastein)에서 내려오기도 한다.


오스트리아 알프스 정상에서 보내던 시간은 곤돌라에 오르는 순간 마치 타임머신의 시계바늘처럼 푹 내려앉는다. 다시 해발 1,000미터. 바트 가슈테인에 도착한 우리는 따뜻하게 데운 욕조에서 몸을 녹이며 왕실의 휴양을 재현한다. 가만히 눈을 감으니, 고요한 산속에서 한스가 반복해서 얘기하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정말 평화롭지 않나요?”


ⓘ 알펜테름 온천 1일 이용권 31유로, alpentherme.com
ⓘ 스키 아마데(Ski Amadé) 1.5일권 스키패스 85유로부터, skiamade.com


(왼쪽)스노 슈즈 하이킹을 하면서 호젓한 알프스 풍경을 만끽한다 (오른쪽)가슈타인 밸리의 최고봉에 올라 알프스 겨울을 즐기는 여행객. © 이규열

해 질 녘, 바트 가슈타인 마을의 불빛이 멋진 야경을 선사한다. © 이규열

마을 The Village

왕가의 휴양지에 머물다


“다음 행선지는 어딘가요?” 레스토랑에서 만난 현지인이 묻는다. “푸슐(Fuschl)에 이틀 정도 머물 예정이에요.” 이내 주변에선 온갖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남은 여정에 당장이라도 따라붙고 싶은 표정을 하고선 말이다. 아름다운 호반 마을로 알려진 푸슐은 오스트리아의 대표 휴양지로 손꼽히는 잘츠카머구트(Salzkammergut)에 위치한다. 잘츠부르크 도심에서 동쪽으 로 차를 타면 30분 정도의 거리. 해발 500~800미터의 구릉지에 자리했는데, 마을을 둘러싼 산봉우리는 해발 2,000미터에 달한다. 국토의 3분의 2를 산악지대가 차지하는 내륙 국가 오스트리아에서는 호수로 해변을 향한 갈증을 해소한다. 따라서 잘츠카머구트에 있는 76개의 아름다운 호수 주변으로 아기자기한 마을이 들어차 있는 게 당연한 일.

전통 목조 가옥이 촘촘히 자리한 할슈타트는 마을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 이규열

“지금부터 마음을 편안히 가지세요. 이곳에선 전혀 서두를 필요가 없어요. 한적하게 자연을 느끼고, 오스트리아 전통과 현대를 온몸으로 경험하세요.” 푸슐 마을에 도착해서 만난 쉐라톤 호텔의 매니저 파올라 하르틀레벤(Paola Hartleben)은 아름다운 전원 풍경에 흥분한 우리의 마음을 능숙하게 달랜다. 그녀의 말대로 이곳에선 물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깨끗한 호수에 뛰어들어 수영을 하고, 벤치에 누워 망중한을 즐겨야 마땅하다. 조금 더 낭만적인 분위기를 느끼고 싶을 땐 호숫가에 오롯이 자리한 오두막에서 시간을 보내면 더할 나위 없다. 관광지로 잘 알려진 할슈타트(Hallstatt)와 바트 이슐(Bad Ischl), 모차르트의 어머니가 살았던 장크트 길겐(St. Gilgen)도 잘츠카머구트 소속이다. 3곳 모두 푸슐에서는 자동차로 30분이면 도달할 수 있고, 마을을 잇는 버스도 운행한다. 1시간에 겨우 1대뿐이지만.


“소금은 잘츠카머구트를 대표하는 특산품이에요. 할슈타트와 바트 이슐 그리고 바트 아우셀(Bad Aussel) 3곳에선 지금도 소금을 채굴하지요. 특히 이곳 할슈타트 소금은 히말라야 소금과 함께 세계 3대 소금으로 꼽혀요.” 바트 이슐 출신의 가이드 라이트너 브리기테(Leithner Brigitte)가 말한다. 기원전 2,000년 세계 최초로 발견한 할슈타트 소금 광산은 도시의 부를 키운 주요 자원이다. 황금과 맞먹는 가치를 지닌 소금은 말 그대로 금값이었으니까. 비록 산비탈에 층층이 자리한 집과 푸른빛의 호수가 어우러진 마을은 오늘날 소금 사업보다는 관광 사업에서 더 큰 수혜를 얻고 있지만 말이다. “할슈타트가 가장 예쁠 때가 언제인 줄 아세요? 평일 오후 5시 이후입니다. 그때가 제일 한가하거든요.” 매일같이 관광객이 북적이다 보니, 인파를 피해 호젓하게 마을을 감상하기엔 평일 오후가 제격이라는 옆 동네 주민 브리기테의 조언이다. 사실 그녀는 할슈타트에 오기 전, 자신의 동네로 우리를 먼저 이끌었다. 이름에서 눈치챘겠지만, 바트 이슐 또한 바트, 즉 온천으로 유명한 마을이다. 특히 치료 효능이 뛰어난 소금 온천을 경험하기 위해 유럽에서 사시사철 여행객이 모인다.

(왼쪽부터)장크트 볼프강 마을 호숫가에서 온천을 즐기는 휴양객, 오스트리아 전통 옷을 멋스럽게 차려 입은 현지인, 바트 이슐 거리는 아기자기한 상점이 줄지어 있다. © 이규열


바트 이슐을 개인 휴양지로 가장 먼저 낙점한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1세(Franz JosephⅠ) 황제로 알려져 있다. 마을 중심부의 빛바랜 노란색 건물이 바로 황제가 여름 별장으로 사용한 카이저 빌라(Kaiservilla). 황실의 여름 거주지를 중심으로 주변은 온통 알록달록한 파스텔 색 건물의 향연이다. 대부분 황제가 휴양을 올 때마다 함께 따라 온 왕실 가족과 음악가, 예술가, 유명 인사 등이 머물던 집. 건물마다 누가, 언제까지 머물렀는지 역사가 적힌 작은 간판도 붙어 있다. 소금물의 치료 효능을 발견한 비레르 박사(Dr. Wirer), 7년간 이곳을 드나들며 <대학축전 서곡>을 완성했다는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의 동상도 거리에서 만날 수 있다. 브람스 동상 맞은편은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엘리자베스 시시(Elizabeth Sisi)가 약혼한 곳으로 유명한데, 현재는 바트 이슐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수백 년 전, 우리가 걷는 이 길을 똑같이 왕족과 세계적 예술가가 누볐다고 상상해보세요. 정말 멋지지 않나요?” 동네 1바퀴를 천천히 걸은 시간은 1시간 남짓. 브리기테의 말대로 왕가가 즐기던 호화로운 휴가의 단편을 엿본 듯 기분이 묘하다.


호반 도시 잘츠카머구트의 진가는 장크트 볼프강(St. Wolfgang)을 건널 때 제대로 발견할 수 있다. 장크트 길겐 마을에서 유람선을 타고 볼프강 마을로 향하는 길. 옥색 빛의 호수와 웅장한 알프스 산맥, 아기자기한 목조 가옥이 절경을 이룬다. 독일 3대 성인 중 1명으로 알려진 장크트 볼프강 또한 신이 빚어놓은 듯한 이곳 자연 풍광에 반해 거처를 짓고 수행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가 이곳에 오고 829년부터 시장 마을은 활기를 띠었다. 역사 깊은 상점과 레스토랑, 호텔은 여전히 그 골목을 지킨다. 그리고 12세기 순례자가 모여 살던 곳에 지금은 관광객이 길을 거닐고, 푸른 호수를 배경으로 온천을 즐긴다. 오전에 호텔에서 만난 하르틀레벤의 조언대로, 어느새 이곳에서의 시간은 더디 흐르고 잔잔한 물결처럼 마음도 고요해진다.


ⓘ 잘츠카머구트 카드를 구입하면 할슈타트, 바트 이슐 등을 경유하는 대중교통과 관광지 입장료를 25퍼센트 할인받을 수 있다. 홈페이지에서 투어 신청도 가능하다. 카드 4.90유로, salzkammergut.at

장크트 길겐 마을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츠볼페르호른(Zwolferhorn) 정상에 오를 수 있다. 호수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풍경이 장관을 이룬다. © 이규열

걸작 The Masterpiece

전통을 잇는 거리의 장인을 만나다


2년 전 잘츠부르크 여행 중 한눈에 반한 곳은 바로 이곳 게트라이데가세(Getreidegasse)다. 여기저기 관광객을 유혹하는 기념품 가게가 가득하고, 자라나 맥도날드 같은 글로벌 체인 기업이 들어차 번화한 좁은 골목이 왜 좋았냐고? 오직 간판 때문이다. 서울에 첫 상경한 시골뜨기처럼 고개를 들고 두리번거리며 작품을, 아니 간판을 감상했다. 배가 퉁퉁하게 나온 인상 좋은 남자가 어깨에 빵 보따리를 메고 있는 그림 간판 아래에는 여지 없이 베이커리가 자리했다. 재단에 쓰이는 가위와 실이 얽혀 있는 곳은 옷 가게, 패스트푸드점의 간판은 독수리가 부리로 알파벳 ‘M’을 물고 있는 형상. 문맹이 많았던 중세시대에 간판의 그림은 이처럼 상호를 대신한 것이다.


철제 세공의 간판을 현재도 변함없이 유지하는 게트라이데가세는 거리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폭이 좁은 골목엔 5층짜리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숨통을 틔우듯 아치형으로 뚫린 통로로 들어가면 숨은 수공예품 가게도 가득하다. 이 거리의 간판 장인 크리스티안 비버(Christian Wieber)를 만난 장소는 큼지막한 황금 열쇠 간판이 매달려 있는 철공소 비버 슐로세라이(Wieber Schlosserei). 가게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자 여기저기 철제 간판이 쌓인 그의 작업실이 등장한다. 게트라이데가세의 간판 대부분은 수공예 세공 기술로 대를 이어온 비버 집안의 작품이다. 철공소는 1415년 처음 문을 열었지만, 집안의 역사를 거슬러 오르면 꽤 복잡하다. 가족이라고 가게를 무조건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보통 함께 일하는 보조가 가족처럼 일을 배우면서(딸과 결혼해서 실제 가족이 되기도 한다) 기술을 전수받기도 했다고. 그리하여 철제 세공 전통은 60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2,000년부터 이곳을 맡아 운영 중인 비버는 우리나라로 따지면 인간문화재쯤으로 불러야 마땅하다. 마에스터 자격증을 지닌 그를 비롯해 지금 이곳에서 일하는 기술자는 고작 5명. 워낙 체력적으로 힘든 일이다 보니 꾸준히 장인의 길을 걷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잘츠부르크에는 오래된 집이 많아요. 철문이나 창살, 열쇠, 거리의 간판 등을 끊임없이 보수하고 다시 만들어야 하죠. 덕분에 우리가 먹고살아요.” 정갈하게 장비를 정리해놓은 작업장에선 누군가의 집에서 떨어져 나온 철창에 색을 덧칠하느라 여념이 없다. 한쪽엔 철공소가 문을 열 때쯤 들여놨다는 쇠를 녹이는 화덕이 골동품처럼 자리해 있다.

철제 세공 간판이 줄을 잇는 게트라이데가세. 자세히 들여다 보면 소재와 색깔, 아기자기한 그림의 미묘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 이규열

“우리는 간판을 보수할 때도 소재나 디자인 모두 옛것과 가장 비슷하게 만들죠. 주변 경관을 해치지 않게요.” 오전부터 어딘가의 부름을 받고 급히 간판을 점검하러 가는 길, 비버는 다부진 목소리로 자신의 노하우를 설명한다. 그의 머리 위로 1656년 당시에 사용하던 가게 간판이 보인다. 자그마한 마차 바퀴가 쭉 늘어져 있고 그 위에는 마차를 고치는 과정을 섬세하게 세공했다. 지금 당장 가져다 게트라이데가세에 걸더라도 전혀 어색함이 없는 디자인. 그가 가게를 떠나고 작업장을 둘러보는 동안 철을 두드리고 담금질을 하며 바쁘게 움직이는 수백 년 전 작업 현장이 눈에 선하게 스친다.

거리의 전통을 잇는 것은 철제 간판만이 아니다. 거리에선 민속의상 트라흐트(Tracht)를 걸친 현지인과 꽤 자주 마주친다. “트라흐트는 우리의 정체성이나 다름없어요. 일할 때만 입는 게 아니라, 저는 가끔 시장 갈 때도 입는걸요.” 잘츠카머구트에서 만났던 브리기테의 말대로 평소 전통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은 단순히 관광객을 위한 전시용만은 아니었다. 1408년부터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가죽 바지 가게 얀 마르클(Jahn-Markl)은 귀여운 반바지를 그려 넣은 간판을 사용한다. 할머니 때부터 가업을 이어온 주인장 가브리엘 예너(Gabriele Jenner)는 가죽 바지에 한 땀 한 땀 수를 놓는 장인.

“가죽 바지는 새것보다는 좀 낡아 보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역사 깊어 보이거든요. 그래서 황제는 종종 새 가죽 바지를 만들면 부하에게 먼저 입고 다니라고 했대요.” 프란츠 요제프 1세 또한 바트 이슐로 사냥을 떠날 때마다 이곳에서 만든 가죽 바지를 입었다고 한다. 예너는 2개의 가죽 바지를 펼쳐놓고 기계식 자수와 손자수를 비교하라고 권한다. 2주 동안 정성 들여 새긴 자수는 가죽 위로 볼록 튀어나온 질감이 손끝에서부터 느껴진다. 가장 최상의 것은 노루 가죽으로 만들며 최대 50년까지 입는다고. 100퍼센트 맞춤 제작, 천연 실크 실로 2주 동안 수를 놓기 때문에 가격도 2,000유로에 달한다. “가죽 바지를 비롯해 우리가 만드는 전통 옷은 지금까지도 인기가 많아요. 굳이 사냥을 하러 가지 않더라도 가죽 바지를 입는 건 여전히 자랑스러운 일이니까요.” 그녀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마침 독일에서 온 손님이 옷을 맞추기 위해 샘플 컬러 북을 뒤적이다가 홀연히 사라진다. “분명 다시 올 거예요. 여기에서 옷을 보고 간 손님 중 절반은 꼭 다시 오거나 전화로 주문하죠. 어제는 3년 전에 보고 간 손님이 간절히 요청해서 뮌헨까지 치수를 재러 다녀왔다니까요.” 어쩐지 이번에도 그녀의 예감이 들어맞을 것만 같다.


ⓘ 비버 슐로세라이 Getreidegasse28, 5020 Salzburg.
ⓘ 얀 마르클 Residenzpl. 3, 5020 Salzburg, jahn-markl.at

중새시대를 재현하듯 거리엔 관광용 마차가 자주 지나다닌다. © 이규열


음악 The Music

여행은 멜로디를 타고


잘츠부르크 도심은 유구한 역사의 건축과 수준 높은 음악을 통해 부유하던 과거를 보여준다. 이곳은 오래전 암염 광산으로 경제적 부를 쌓은 덕분에 일찍이 문화와 예술이 꽃피울 수 있는 기반을 닦았고, 오늘날 예술의 도시로 거듭났다. 도시의 풍경은 웅장하고, 한없이 여유로우며, 여기저기에선 모차르트의 선율이 들려온다. 음악뿐 아니라 그의 얼굴이 선명하게 박힌 초콜릿과 술, 향수를 비롯한 기념품과 카페, 레스토랑도 거리에 난무한다. ‘죽은 모차르트가 먹여 살리는 도시’라는 소리가 근거 없이 흘러나온 것은 아닌 듯 보인다. 게트라이데 9번지. 모차르트가 태어난 생가는 하루 종일 쉴새 없이 관광객이 드나든다. 그는 이곳에서 태어나 17년 동안 잘츠부르크에서 가족과 함께 살았다고 전해져 온다. 4층짜리 노란색 건물 안엔 모차르트가 태어난 대리석 방과 생전에 사용하던 피아노, 악보 등과 함께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그의 머리카락까지도 전시 중이다.

모차르트 디너 콘서트에서 열창 중인 소프라노. © 이규열

클래식에 문외한인 여행객이라도 이곳에선 천재 작곡가의 음악에 절로 흥얼거리게 될지 모른다. 이번 기회에 본격적으로 모차르트의 음악에 심취해봐도 좋다. 성 페터 성당(St. Peter’s Archabbey) 앞 파란색 방패 모양의 간판을 내건 슈티프츠켈러 장크트 페터(Stiftskeeler st. Peter) 레스토랑. 이곳에서는 오래 전부터 캐주얼한 모차르트 디너 콘서트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803년에 문을 열어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레스토랑으로 꼽히는데, 입구에 들어서면 중정에 은밀하게 자리한 야외 테이블부터 꽤 인상적인 모습이다. 공연이 펼쳐지는 2층 바로크홀 안은 적절한 복장을 갖추지 못한 여행객이 대다수지만, 정갈한 차림으로 모차르트 음악을 기다리는 신사도 눈에 띈다. “여행객을 상대한다고 해서 음악 수준을 낮춰보진 마세요. 무대에 서는 음악가는 언제나 최고를 자부합니다.” 15년 넘게 이곳 레스토랑에서 일해온 매니저가 공연이 시작되기 전 당부의 말을 전한다. <돈 조바니> <피가로의 결혼> <마술피리> 등 모차르트를 대표하는 오페라 3곡이 코스 요리가 준비되는 사이마다 울려 퍼진다. 객석을 오가며 노래를 부르는 남녀의 퍼포먼스는 2시간의 식사 시간 동안 지루함 없이 흘러간다. 모차르트로 분한 음악가의 연주에 흠뻑 취하면 그만이다.

수도원을 개조한 슈티프츠켈러 장크트 페터 식당 내부. 레스토랑 스테인드글라스에 모차르트의 그림을 장식했다. © 이규열


도시를 먹여 살리는 멜로디를 하나 더 꼽자면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등장한 ‘도레미 송’이 아닐까? 이른 아침부터 영화 속 촬영지를 돌아보는 투어 버스엔 관광객이 가득하다. 명작을 사랑한 각국의 여행객이 모인 것이다. 유쾌한 가이드 피터(Peter)는 능숙한 말투로 이방인의 웃음을 자아낸다. “<사운드오브 뮤직>은 미국, 아시아 등 전 세계적으로 아주 유명한 영화입니다. 잘츠부르크에서만 빼고요.” 영화로 인해 잘츠부르크는 전 세계 영화 팬의 성지가 됐지만, 정작 오스트리아에선 영화를 보지 못한 이가 더 많았다고 그는 너스레를 떤다. 알고보니 이곳에선 영화 속 실화를 독일 다큐멘터리를 통해 먼저 접했고, 떠들썩하게 촬영지 순례를 도는 여행객과 달리 현지의 반응은 덤덤했다고 한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은 분명 잘츠부르크의 아름다운 풍경을 모두 섭렵했다. 여주인공 마리아가 아이들과 도레미 송을 불렀던 미라벨 정원, 폰 트랍 대령의 집으로 등장한 레오폴츠크론 성(Leopoldskron Palace), 결혼식 장면을 촬영했던 몬드제 교구 미카엘 성당(Mondsee Basilica of St. Michael) 등. 한 번 가보면 반할 만한 장소임엔 틀림없으니까. 그리고 도심에서 시작해 외곽으로 도는 여정은 꽤 알차다. 마치 아름다운 풍경을 속성으로 축약한 반나절 여행처럼 말이다. 도보 여행자라면 버스 창밖으로 펼쳐지는 도심 외각의 전원 경치를 감상하는 재미도 투어의 덤처럼 느껴질 것이다. 단, 버스에서 내려 사진을 찍고 영화를 추억하는 시간은 굉장히 짧으니 너무 깊게 빠져선 안 된다. 피터가 여자 목소리를 흉내 내며 촬영 뒷이야기까지 보태면 잊고 있던 원작을 당장이라도 구해서 보고 싶은 심정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후자는 걱정 마시길. 돌아오는 버스에선 여정을 복습하듯 영화의 주요 장면을 편집한 영상을 틀어준다. 부작용이라면 다음 여정을 이어가는 내내 <사운드 오브 뮤직>의 멜로디가 입에서 맴돈다는 것뿐.


ⓘ 모차르트 디너 콘서트 보통 저녁 7시 30분에 시작한다. 3가지 코스 요리를 포함하며, 식사와 함께 콘서트 시간은 총 2시간 정도다. 5월부터 성수기에는 거의 매일 진행하지만, 사전에 예약하고 방문하는 것이 좋다. 가격 56유로, skg.co.at

ⓘ 사운드 오브 뮤직 투어는 하루에 2번, 오전 9시 15분과 오후 2시에 미라벨 광장(Mirabell Square)에서 출발한다. 미라벨 정원에서 시작해 헬브룬 궁전, 논베르크 수도원(Nonnberg Abbey), 볼프강 호숫가 마을 등을 돌고 몬드제에서 일정을 마무리한다. 총 4시간 소요, 성인 42유로, panoramatours.com

사계절 꽃이 만발하는 미라벨 정원 © 이규열


글 유미정 ・ 사진 이규열
취재협조 잘츠부르크 관광청(salzburgerlan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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