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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로드 May 03. 2016

해산물 천국 통영에서 먹다

통영은 맛있는 항구도시다. ‘맛있다’라는 단어에는 몇 가지 뜻이 담겨 있다. 당연히 맛있는 음식을 내는 식당이 많다. 멀리까지 소문난 집뿐 아니라 지역 주민이 즐겨 찾는 숨은 맛집도 많다. 지역 특산물을 잘 살린 혹은 향토 음식을 잘 계승한 솜씨 좋은 식당이 수두룩하다. 맛있는 도시 중에는 주요한 식자재를 외지에서 공급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통영은 그 자체가 해산물의 거대한 공급 기지이자 집산지다. 이곳의 항구와 어촌은 허울만 근사한 빈껍데기가 아니다. 국내 굴 생산량의 약 80퍼센트를 담당하는 곳이 통영이고, 거제와 더불어 전국 멍게 생산량의 약 70퍼센트를 차지하는 곳이 통영이다. 통영에는 맛있는 계절이 따로 없다. 철철이 다양한 산물을 선보이니 언제 찾아도 짜릿한 식도락을 즐길 수 있다. 중앙시장이나 서호시장에 가보면 ‘해산물 파라다이스’란 말이 실감난다. 가짓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채로운 식자재가 좌판을 가득 메우고 있다. 선도가 좋은 것은 기본이고, 시장 아지매들과 말 섞는 재미는 덤이다.

통영의 해산물은 전국에서 인정받는다. 도처에 멍게 양식장이 있고전국에서 멍게를 가장 많이 생산한다. © 노중훈

알싸하고 쌉싸래한 맛, 제철 멍게


도착하자마자 산양읍 영운마을부터 찾았다. 통영 봄 해산물의 간판스타인 멍게를 무더기로 생산하는 곳이다. 수온이 섭씨 7~10도 정도로 유지되고 조류가 지나치게 빠르지 않은 통영의 바다는 멍게가 자라기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 1973년 우리나라에서 멍게 양식을 처음 시작한 지역도 통영이다. 마침 마을 주민이 멍게 선별 작업에 여념이 없다. 갓 수확한 멍게를 바라보기만 해도 산뜻하게 비릿하며 절묘하게 쌉싸래한 특유의 맛이 연상돼 입안이 아려온다. “아침부터 보통 오후 4~5시까지 작업을 하죠. 올해는 수확량이 지난해보다 많은 편이에요.” 쪼그려 앉은 채 쉴 새 없이 손을 놀리는 한 아주머니의 귀띔이다. 멍게 마을답게 이곳 사람들은 온갖 요리에 멍게를 넣는다. 시금치를 무칠 때도, 된장국을 끓일 때도, 심지어 라면 삶을 때도 ‘천연 조미료’ 멍게를 곁들여 맛을 더한다. 초고추장에 찍은 멍게를 배추 속대나 겉대에 올려 함께 먹기도 한다. 입도 즐겁고 귀도 즐겁다.

갓 손질한 멍게. © 노중훈

영운마을을 뒤로하고 도남동에 위치한 식당인 통영비빔밥(055 642 1467, 발개로 138) 앞에서 멈춰 선다. 예전부터 눈여겨본 토속 음식인 통영식 비빔밥을 먹고 싶어서다. 알다시피 비빔밥으로 유명한 고장은 여럿이다. 그 대명사 격인 전주비빔밥은 무척이나 화려하다. 고슬고슬 잘 지은 밥에 갖은 나물과 쇠고기, 황포묵이 오른다. 나물을 볶지 않고 삶거나 데쳐서 사용하는 진주비빔밥은 한 뼘 더 부드럽다. 진해에는 해초비빔밥이 있다. 그릇 안에 강렬한 바다 향이 응축돼 있다. 통영비빔밥 역시 나물이 주를 이룬다. 콩나물, 당근, 고사리, 시금치, 호박, 버섯, 두부 등 익숙하고 친숙한 식자재가 들어간다. 거기에 함께 어우러지는 톳과 물미역에 방점이 찍힌다. 담백한 통영비빔밥에 마치 스타카토처럼 긴장감을 부여하고 또렷한 맛을 심어준다. 심심하다고 느껴질 때쯤 해조류에서 한 떨기 바다 내음이 피어난다.

통영 전통 음식 유곽의 주재료인 개조개. © 노중훈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통영비빔밥에는 고추장을 넣지 않는 것이 좋다. 아무래도 고추장이 들어가면 각 식자재가 지닌 고유한 개성을 잃기 쉽다. 고추장이 없어도 통영비빔밥은 잘 비벼진다. 비빔밥과 함께 나오는 두부탕 국물이 몇 숟가락 정도 밥 아래 깔려 있기 때문. 홍합과 바지락 등을 잘게 썰어 넣은 두부탕국은 시원하고 짭짤해 간이 세지 않은 비빔밥과 궁합이 잘 맞는다. 때에 따라 문어가 합류하기도 한다. 이 식당에는 유곽비빔밥이란 메뉴도 있다. 유곽은 다진 개조개 살을 참기름, 된장, 파, 마늘 등의 양념에 버무려 볶은 통영의 전통 음식이다. 완성되면 단단한 조개껍데기에 담아 낸다. 양념된 개조갯 살에 김 가루와 상추를 곁들인 유곽비빔밥은 통영비빔밥보다 맛이 훨씬 더 즉각적으로 다가온다. 조갯살 씹는 느낌도 남다르다. 식당 주인은 “거제에서 들여오는 개조개는 주로 물살이 센 곳에서 서식한다”며 “사철 먹을 수 있지만 지금이 가장 맛있을 때”라고 일러주었다. 이웃한 통영과 거제의 바다는 하나의 몸이다.해산물이 풍성한 통영에는 회와 밥을 함께 내어주는 식당이 있다. 부산에도 이런 식의 회백반을 판매하는 곳이 더러 있기는 하다. 항남동의 수정식당(055 644 0396, 항남5길 12-21)에서 회정식을 주문하니 공깃밥과 밑반찬 몇 가지가 먼저 놓인 다음 광어회, 농어회, 멍게가 한 접시에 담겨 나온다. 물론 철마다 다른 횟감을 사용한다. 혼자 먹기에 양도 섭섭하지 않을 뿐 아니라 숙성 회가 뿜어내는 감칠맛이 도드라진다. 복국이나 도다리쑥국 같은 국물도 공깃밥 옆에 마련해준다. 이 모든 게 단돈 만 원이다. 봄철 한정 메뉴인 도다리쑥국도 따로 시키니 도다리의 살은 위태로울 정도로 노글노글했고, 섬에서 해풍을 맞고 자란 쑥은 투명한 국물 속에서도 진한 향을 풍겼다. 봄빛을 닮은 개운한 국물이 몸속을 파고들자 어제 마신 술이 남김 없이 씻겨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다른 테이블에서 쑥을 다듬고 있던 식당 아주머니들은 “통영에서는 5월 초까지 도다리쑥국을 먹어요. 이후에는 도다리에 기름이 많이 올라 보통 회로 먹죠”라고 입을 모은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봄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왼쪽)해풍을 맞고 자란 봄 쑥. (오른쪽)봄철 가장 짙은 향을 내는 도다리쑥국. © 노중훈


활어처럼 펄떡거리는 시장


통영 해산물의 진면목을 확인하려면 역시 재래시장에 가야 한다. 중앙과 서호는 통영 시민의 먹을거리를 책임지는 마르지 않는 곳간이자 관광객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은 ‘투톱’ 시장이다. 활어, 반건조 생선, 건어, 해조류 등 바다의 품에서 태어나고 바다가 길러낸 수많은 것이 나와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서호만 바다를 매립해 조성한 서호시장은 역사가 제법 오래됐다. 근현대의 아수라를 통과하면서 신정시장, 새터시장, 아침제자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중앙시장보다 규모가 작은 서호시장의 한 어물전에서 발길을 멈춘다. 분홍빛을 띠는 꽃돔이 철사에 꿰어져 머리를 아래로 한 채 가지런히 걸려 있는 모습이 퍽 아름답다. 구덕구덕하게 말린 볼락, 깨돔, 우럭, 쥐치, 삼배기 등은 플라스틱 소쿠리에 다소곳하게 담겨 있다. 깨돔의 본명은 강담돔인데 몸통의 얼룩무늬 때문에 교련돔으로도 통한다. 누가 처음에 이름표를 붙였는지는 몰라도 재치 만점의, 웃음이 비죽비죽 새어 나오는 별칭이다. 바로 앞 가게 아주머니도 다양한 어물을 펼쳐놓았는데, “통영에서는 말린 장어를 삼겹살과 함께 구워 먹는다”고 알려준다. 불판 위에 나란히 누워 지글지글 익어가는 장어와 삼겹살이라니, 그야말로 황송한 조합이 아닐 수 없다. 말린 장어의 시세는 2마리에 2만5000원. 또 다른 가게에는 톳, 다시마, 곰피 등도 수북하게 쌓여 있다. 아쉽게도 이 갈조류들은 거의 끝물이라 시장에서 곧 자취를 감출 것이다.

줄줄이 매달려 있는 꽃돔. © 노중훈

시장 내 여러 상점에서 멍게를 취급한다. 꼬챙이를 들고 능숙하게 멍게 껍질을 까는 아낙의 손길이 분주하다. 막 세상의 빛을 본 주홍색 속살이 탐스럽다. 껍질을 벗기지 않은 멍게 1킬로그램의 가격은 5,000원. 멍게 풍년의 영향으로 지난해보다 가격이 내려갔다고 한다. 젓갈 가게에는 멍게젓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다른 젓갈과 달리 멍게젓은 푹 삭히지 않고 담가서 바로 먹는다. 사실 통영 하면 볼락젓갈을 더 알아준다. 예전에 비해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볼락김치도 통영의 별미 중 별미다. 봄은 조개의 계절이기도 하다. 산란을 준비하기 때문에 살이 오동통하게 오른다. 앞서 말한 개조개를 비롯해 2월부터 4월까지 미식가를 유혹하는 새조개도 보인다. 새조개는 익히면 금방 질겨지기 때문에 끓는 물에 살짝 데쳐 먹어야 한다. 농어는 5~6월이 제철이다. 농어, 도다리, 볼락 등을 취급하는 한 상인은 “지금 농어 가격이 1만5,000원인데 비쌀 때는 3만5,000원까지 뛰어오른다”고 말한다.

통영의 주요 어종 중 하나인 볼락. © 노중훈

그런데 또 다른 봄맛 전령사인 미더덕과 봄 멸치가 눈에 띄지 않는다. 시장 한쪽에서 수굿한 인상의 할머니가 다듬고 있는 것은 겨울 멸치. 통영의 봄 멸치로 만든 멸치회무침과 멸치시래깃국을 먹었던 몇 년 전 기억이 떠올라 하릴없이 입맛만 다신다. 미더덕 역시 최대 산지인 창원시 진동면에서는 이미 출하됐지만 4월 초순의 서호시장에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비가 안 와서 미더덕이 잘 안 붙었다”라는 설명을 들었는데, 강수량과 미더덕 양식이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새벽부터 부지런을 떠는 서호시장과 달리 중앙시장은 오후 들어 더욱 활기를 띤다. 힘 좋은 생선들이 펄떡거리는 모습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물 좋은 생선을 하나라도 더 판매하려는 상인들의 목청 또한 활기차다. 중앙시장은 연중 문 닫는 날이 없고 주변에 동피랑벽화마을, 남망산 조각공원, 강구안 문화마당이 포진하고 있어 여행객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통영의 온갖 해산물이 모였다가 떠나가는 강구안. © 노중훈


자연이 그대로 올라앉은 밥상


통영에 오면 적어도 한 번쯤은 다찌에 가봐야 한다. 통영의 바다가 베푸는 해산물의 향연을 한 상 위에서 만끽할 수 있다. 다찌는 술을 시키면 안주가 딸려 나오는 통영식 술집을 말한다. 술을 추가 주문할 때마다 새로운 음식을 가져다준다. 마산의 통술집, 진주의 실비집, 전주의 막걸릿집과 같은 원리다. 다찌의 어원을 두고 어떤 사람은 ‘다 있지’의 줄임말이라며 농을 던지고, 또 어떤 사람은 일본식 선술집 ‘다찌노미’에서 왔다고 주장하는데,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사실 요즘 다찌와 예전 다찌는 차이가 있다. 원래 다찌집에는 기본 상(보통 2인 기준 6만 원)이란 개념이 없다. 다찌가 유명해지면서 손님들이 술은 별로 마시지 않고 ‘안주빨’을 너무 세우다 보니 그 나름의 안전 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물보라다찌(055 646 4884, 동충4길 48)는 비가 오는 주중임에도 방송 프로그램의 영향 때문인지 손님이 적지 않았다(얼마 전 <수요미식회>에서 이곳을 소개했다). 2인 상에 깔리는 음식 종류가 무려 스무 가지에 달한다. 꼬막찜, 톳김치, 국물이 자작한 아귀수육, 문어숙회, 매콤한 양념을 끼얹은 해삼, 달달한 양념옷을 입은 장어조림, 알싸한 멍게비빔밥, 씨알 굵은 굴무침, 고춧가루 뿌린 가자미구이, 가리비, 촛대고둥, 개불, 전복, 미더덕 등등. 병당 1만 원인 소주를 2병 추가하니 가오리 내장, 갓김치를 곁들인 가오리회, 쫄깃한 볼락구이, 데친 오징어, 털게, 성게 등이 가세한다. 뜻밖에 고춧가루나 고추장을 사용한 음식이 많은데, 전반적으로 간이 세지 않아 입안이 텁텁하거나 금방 물리지는 않는다.

물보라다찌의 푸짐한 상차림. © 노중훈

노중훈은 여행의 맛을 탐구하는 여행 칼럼니스트다. 여러 신문과 잡지 등에 기고하고 있으며, MBC 라디오에서 매주 토요일 아침 <노중훈의 여행의 맛>을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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