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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로드 Jul 06. 2016

나만의 평창 여행 리스트

My Own Private PyeongChang

나는 강원도 평창 하고도 방림면에 산다. 방림은 인구가 겨우 2,600명 정도밖에 안 되는, 평창읍 인근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평창읍이나 정선, 영월로 가기 위해 그저 지나쳐 가는 마을로 조용한 것 하나는 훈장인 곳이다. 아마 가장 유명한 것은 허영만의 <식객>에 소개된 방림 막국수 그리고 무슨 식당 위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운교리 밤나무(그래 봬도 천연기념물 제498호)가 전부인 듯 보인다. 심지어 마을 여행 정보 책자에서는 얼마나 소개할 것이 없으면 ‘멋’ 하나 없는 ‘멋다리주유소’ 옆 ‘멋다리’를 다루며, 아직 오픈하지도 않은 평창 보타닉가든과 10년째 줄곧 일반인 출입을 막아놓은 창수동 계곡을 떡하니 소개하고 있다. 심지어 길이 끓긴 채 귀신 나올 것 같은 폐가를 도보 여행자의 펜션으로 안내하는 둘레길도 있다. 아이구,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래저래 그냥 촌구석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잘난 구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이는 동네를 일부러 찾아다니는 사람도 있는 법. 바로 우리가 그렇다. 심지어 서울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한 5년 정도 되었나 보다.

막동계곡은 1급 청정수에서 서식하는 물고기들의 보금자리다. © 윤춘길

청명한 숲과 물, 맑은 공기 그리고 한적함. 보잘것없지만, 바로 이런 이유로 세상 어느 곳보다 귀히 여기는 곳. 장작을 패고, 텃밭을 가꾸고, 개와 함께 녹음이 우거진 산길을 걷고 있노라면 뭐 하나 부러울 게 없다. 아마 우리가 동경하던 한적한 시골 생활 때문이었을 것이다. 모든 의구심과 빈축을 뒤로하고, 시골 동네에 감히 ‘LP and ART Stay’라는 콘셉트의 게스트하우스를 오픈할 수 있었던 것은 말이다. 다행히 손님의 반응이 꽤 좋은 편이다. 하지만 사실 여행자가 혹할 만한 게 거의 없는 이런 곳을 찾아온 손님에게 때로는 미안할 때도 있다. 오자마자 짐을 풀고 멀리 동해나 강릉, 혹은 삼척까지 다녀오는 사람도 더러 있다. 아무리 기운이 좋아도 그렇지, 무려 왕복 4시간 거리다. 종교와 자본이 만나 출중한 자태를 뽐내는 오대산 월정사는 그나마 나은 편이어서 편도 1시간 거리고, 워낙 넓어서 버스로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대관령삼양목장이나 양떼목장도 1시간 넘게 걸린다. 정선의 레일바이크를 타기 위해서 78킬로미터를 자동차로 달려가는 이도 있고 관광객이 버글거리는 봉평 오일장이나 이효석 생가에 다녀오는 이도 있다. 사실 이런 이유로 나부터 한 번쯤 동네를 둘러보고 싶었다. 우리 동네(방림면)와 이웃 동네(미탄면)는 어떠한지, 잘 알려지지 않은 평창을 여행자로서 겪어보는 거다. 그리하여 완성한 나만의 비밀스러운 평창 여행 리스트를 이곳에 소개한다.

평창팜에서 송어 맨손 잡기를 하며 즐거워하는 여고생들의 모습. © 윤춘길

1. 청옥산 육백마지기

평창 최고의 드라이브 길

© 윤춘길

기사를 위해 여러 곳을 다니면서 ‘이곳에 이런 절경이 있었네’ 하며 놀라고 또 놀란다. 그중에 청옥산은 진즉 가보지 못한 것을 크게 후회한 곳 중 하나다. 높이가 무려 해발 1,256미터. 이 높은 산 정상에 화전민이 정착해 약 59만 제곱미터에 이르는 넓고 거친 땅을 개간해 우리나라 최초의 고랭지 채소밭을 만들었다. 일명 ‘육백마지기’라고 불리던 곳을 평창에 이사 온 지 4~5년이 넘어서야 찾아왔다. 일단 산으로 올라가는 드라이브 코스부터 장관이다. 이곳 평창에 살며 다닐 만큼 다녀봤지만 이만한 드라이브 코스는 사실 많지 않다. 정상 부근에서 바라보는 조망 또한 일품이다. 주변 산을 아우르며 편안하고 넉넉하게 다가오는 하늘과 땅. 텐트 치고 놀다가 밤에는 별을 올려다보기에 이만한 곳이 또 있을까? 그러나 배추가 유난히 달고 경치가 끝내주는 탓(?)에 얼마 전부터 풍력발전단지를 조성하고 있다. 아쉽게도 한창 공사 중인지 여기저기 깎고 다지는 중이라 지금은 조금 어수선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산 정상까지 향하는 드라이브 길은 가볼 만하다. 더불어 청옥산에서 발원한 물이 모이는 용수골계곡도 추천한다. 자연 그대로의 원시림과 1급수 어종인 둑중개가 서식하는 청정 지역이다. 물이 얼마나 야무지게 깨끗한지 볼수록 시원하고, 도량이 한층 넓어지는 기분이다. 좁고 기다란 길 따라 굽이굽이 이리저리 돌다 보면 어느새 배가 고플지 모르지만.


청옥산 평창군 미탄면, 033 330 2602.


2. 평창자생식물원

천상의 정원

© 윤춘길

리모델링 중인 한국자생식물원은 대관령 오대산 기슭에 있고, 그보다 훨씬 작은 평창자생식물원은 방림면 면사무소 뒤 보습봉 중간 지점에 자리한다. 손으로 쓴 이정표가 너무나 작고 보잘것없어서 ‘가보자, 가보자’ 하면서 계속 지나치고 말았는데, 집에 놀러 온 손님의 추천으로 드디어 4년 만에 길을 나섰다.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산길을 계속 올라가세요. 길을 잘못 들었나 하는 생각이 막 들 무렵까지….” 손님이 건넨 조언대로 따랐다. 그랬더니 정말 비밀의 화원이 쓱 하고 나타나는 게 아닌가! 타샤 튜더(Tasha Tudor)의 정원이 아름답다고 여긴 이라면 누구나 반할 수밖에 없는, 엄청난 애정이 담긴 야생화 정원이 말이다. “15년 전 이곳에 둥지를 튼 이후 지금까지 여태 전기 없이 살며 이 아이들을 돌봤어요.” 세상에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 있었다니…. 이곳 주인장은 전기도 없는 곳에서 이 많은 식물을 키워냈다. 둘러보니 분홍바늘꽃, 에델바이스, 금강초롱, 보호 식물인 깽깽이풀, 삼지구엽초, 모자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용둥굴레, 솔방울바위솔 등 사라져가고 있는 아름다운 우리 고유의 꽃 300여 종이 자라고 있다. “아직까지 수입원이 없어서 지인이 하는 인근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합니다. 숲 해설사 일도 하지만요. 그 돈으로 주로 생활을 하고 구근식물도 삽니다.” 사업에 실패한 후 한껏 풀이 죽은 남편과 함께 척박한 대지에 씨앗과 알뿌리식물을 심고 물을 주며 사랑의 힘으로 작은 천국을 만든 조명자 대표가 말한다. 그녀는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황홀한 꽃차(목련차와 단풍잎차)를 내온다. 그녀에게 ‘야생화 정원 찻집’을 권하니 아직 전기도 안 들어오고 영업 허가를 받지 못한 상태여서 그조차도 조금 기다려야 한다고.


온갖 꽃이 자신만의 리듬에 따라 고요히 춤을 추는 야생화 정원의 정취에 취해 한참 있으니, 동고비, 물총새, 꼬리 긴 산비둘기가 날아와 갖가지 악기를 연주한다. “여기 좋아요. 자주 오세요!”라고 속삭이듯 노래하며. 평창자생식물원은 온갖 식물과 새, 벌, 나비와 더불어 이렇게 앉아 있기만 해도 마음이 정화되는 곳이다. 게다가 공짜 꽃차까지 얻어 마실 수 있다. 아이들과 함께 솔방울 목걸이를 만들거나 말린 야생화 잎이나 꽃으로 동심의 그림을 그릴 수도 있다. 그뿐인가. 화분에 올린 키 작은 야생화가 감동적인 예술 작품처럼 느껴지는 정원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평창자생식물원은 방림을 넘어 ‘평창의 보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이 들 정도다. 돈 많은 부자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정원이 아니라 자연과 사랑에 푹 빠진 사람만이 가꿀 수 있는 소박한 정원을 우리에게 보여준 타샤 튜더처럼 말이다.


평창자생식물원 평창군 방림면 방림2길 79-66, 010 3262 0155.


3. 계촌 클래식 마을

오케스트라 음악 감상하기

© 윤춘길

매년 7월이면 한여름 밤의 클래식 축제를 벌이는 마을이 있다. 현대차정몽구재단이 주최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산학협력단이 주관하지만, 그 주축은 전교생이 오케스트라 단원인 계촌초등학교와 계촌중학교 학생이다. 그들의 연습실을 찾아가니 아담한 시골 정경 속에서 춤추듯 울려 퍼지는 음표들이 아름답게 들린다. 마침 ‘평창의 꿈’이라는 곡을 연주하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El Sistema)’까지는 아니더라도 영화 같은 일 아닌가? 시골의 문화 소외와 결핍을 극복하려는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Jose Antonio Abreu) 박사 같은 누군가가 나선 것 말이다. 학생들에게 처음으로 악기를 배우게 하고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어 급기야 클래식 공연의 주역으로 무대에 세우는 영화. 아직 날짜가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축제 당일이 되면 평창군 방림면 계수나무 마을 계촌에서 클래식 축제가 열릴 것이다. 올해는 어떤 쟁쟁한 연주자가 어린 오케스트라 단원과 함께 연주할까? 생각해보면 그렇다. 유행에 집착하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지만 정작 우리에게 살아가는 힘을 주는 음악이나 풍경은 매우 영속적이고 고전적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시골 마을과 클래식 음악은 아주 잘 어울린다. 밭 갈던 농부와 그의 아내, 인근 펜션에 놀러 온 도시인 가족이 함께 어울려 음악의 환희에 마음을 열 수 있는 축제의 날. 그날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아참, 이 마을의 정식 명칭은 계촌정보화 마을이지만 더이상 그 지명은 유통기한이 지나 아무 매력이 안 느껴지니, 이제는 ‘계촌 클래식 마을’로 바꾸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계촌 정보화마을 평창군 방림면 계촌길 101, 070 7781 4847.


4. 송어 맨손 잡기

인간 본능을 자극하다

살면서 송어를 맨손으로 잡아본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이곳에서 한마디로 ‘대박’이 난 농촌 사업 중 하나가 바로 송어 맨손 잡기다. 대부분의 농촌 체험 여행이 농작물 채집에 집중하는 데 비해, 이건 그야말로 일종의 원시 수렵에 가까운 경험이다. 확신컨대 거기엔 무언가 인간 본능의 원천을 자극하는 활동적이면서도 엔도르핀이 팍팍 돌게 하는 마력이 숨어 있다. 마침 근처에 평창팜이라는 나름 유명한 곳이 있으니 경험 삼아 한번 들러봐도 좋다. 먼저 농장 안을 쓱 둘러보니 송어체험장이라고 쓰인 입간판이 보이고 야트막한 간이 수영장 같은 곳에 물이 가득 차 있다. 물속에서 송어는 곧 닥쳐올 운명도 모른 채 유유히 파닥인다. 곧 장내 아나운서의 멘트가 요란한 음악과 함께 웅장하게 울려 퍼지고, 단체 체험 학습을 온 소녀들 역시 화답하듯 수영장 주위에 모여든다. 이윽고 휘슬이 울려 퍼지자, 100여 명의 소녀가 비명과 함께 일제히 물속으로 뛰어든다. 이런 세상에, 난장도 이런 난장이 없다. 찰박이는 물소리, 시끄러운 음악과 그보다 더한 장내 멘트 그리고 이 모든 걸 압도하는 여고생의 요란한 비명과 웃음까지…. 과연 이런 게 축제가 아닐까. 예컨대 스페인의 토마토 축제 같은 이벤트 말이다. 그렇게 한참을 산지사방으로 악을 쓰며 퐁당거리다 이젠 옛날 방식으로 재현한 숯불 구이장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송어를 굽는다. 이윽고 맛있는 연어구이 비슷한 냄새가 사방에서 진동한다.


평창팜 송어 맨손잡기 체험 9am~6pm, 참가비 7,000원, 평창군 방림면 고원로 898-43, 033 334 5006.


5. 칠족령 트래킹 & 마하리 어름치마을

자연에서 노닐기

© 윤춘길

백두대간 못지않은 빼어난 절경 속을 걸을 수 있는 칠족령 트레킹 코스는 백룡동굴 지척에 있다. 몸은 시원한 원시림 속에 두고 눈은 멀리 동강의 푸른 물줄기를 바라보며 걷는 완만한 경사의 숲 속 오솔길. 즉 힘 안 쓰고 호젓하게 원시림 같은 숲길과 동강의 절경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다는 얘기다. 한낮의 따가운 햇살을 그늘로 가려주는 풍성한 나무의 호위 아래 쉬엄쉬엄 장엄하게 걷는다 해도 넉넉잡아 1시간이면 전망대까지 다녀올 수 있다. 게다가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동강은 단연 최고의 풍경이다. 느닷없이 나타나 발아래 굽이굽이 흐르는 물길의 아름다움. 그 청량한 풍경을 보고 있으면 잠시나마 우리나라 강산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 정도다.


만약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이라면 가벼운 산행이라도 사실 조금 무리일 수 있다. 그렇다면 평창동강 민물고기생태관이 있는 어름치마을이 제격이다. 마을 앞 동강에 천연기념물(제259호) 물고기 어름치가 살고 있어 어름치마을로 불리는데, 예전에는 엄청난 오지였지만 지금은 보란 듯이 번듯한 전국 제1의 생태체험마을로 탈바꿈했다. 마을 입구에는 대형 주차장과 매표소, 카라반을 활용한 사무실이 여럿 있어 그곳에서 동강 스카이라인이나 스카이점프를 즐길 수 있는 표를 끊으면 된다. 전기 자전거나 자동차도 빌려준다.


칠족령 평창군 미탄면 마하리 평창동강 민물고기생태관 9am~6pm(월요일 휴무), 이용 요금 2,000원(어린이 1,500원), 평창군 미탄면 미하길 42-5, 033 332 1178.


6. 하늘마루 염소목장

목장 길 따라 산책하기

© 윤춘길

계촌 클래식 마을에서 울퉁불퉁한 산길 도로를 따라 약 3킬로미터를 들어가면 입구가 하나 보인다. 사람이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는 해발 700~900미터 고원에 오르면 목장 초지(약 9만9,000제곱미터)에 330마리의 염소가 뛰어놀고 있다. 조금 더 오르면 왼편에 집과 마당, 더 올라가면 작은 민박집 하나, 그리고 그 위로 하우스와 방목장이 있다. 종을 흔들면 염소가 우르르 몰려오고, 건초를 주면 잘 받아먹어 제법 재미가 있다.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염소를 구경하며 지그재그로 난 비탈길을 슬며시 올라타기 시작한다. 올라갈수록 경사지고 그만큼 하늘과 가까워지는 느낌이다. 우리가 가는 길목에 염소가 버티고 서 있다가 가까이 다가서면 ‘우’ 하고 달아난다. 마치 ‘우리 집에 왜 왔니?’라고 살짝 유세하는 느낌이라 웃음이 난다. 맑은 공기와 경치로 피로를 덜어내며 아름다운 목장 길을 거닐고, 여기저기 우르르 몰려다니는 염소를 보며 하늘거리다 보면 1~2시간이 훌쩍 지난다. 따로 울타리가 없으니 야외 사파리를 즐기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단, 대관령삼양목장이나 양떼목장을 기대하고 이곳에 오면 안 된다.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나름의 매력을 느껴야 한다. ‘한국의 알프스’ 이런 홍보용 수식어를 믿지 않는다면 실망할 일은 없을 것이다.


하늘마루 염소목장 트레킹 및 먹이주기 체험 9:30am~6:30pm, 참가비 3,000원, 평창군 방림면 삼형제길 297, tour.invil.com


7. 백룡동굴

지하 속 미지의 세계

죽기 전 꼭 탐사해봐야 하는 단 하나의 동굴을 말하라면, 이곳 백룡동굴을 꼽고 싶다. 워낙 늦게 발견한(1976년) 동굴이기도 하지만,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일반인 공개를 금지하며 천연 그대의 모습을 잘 보존해온 세계적 수준의 석회암 동굴이다. 인공조명으로 훼손 상태를 가리고 관람객이 제한 없이 드나드는 여타 동굴과는 격이 다르다는 얘기다. 그러니 이곳에선 ‘관람’이 아니라 ‘탐사’ 수준의 복장과 자세를 갖춰야 한다. 출발 전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안내사무소에서 내주는 빨간색 탐사복에 랜턴이 달린 안전모, 장화, 벨트, 장갑까지 착용하니 탐사를 떠나는 기분이 확실히 난다. 잠깐이지만 동굴 입구까지 배를 타고 가니 마냥 신이 나는 건 당연지사. 게다가 평창, 영월, 정선의 경계를 구불구불 휘돈 동강이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마하리에서 백운산의 높은 절벽과 어우러진 비경을 감상하는 행운까지 누린다.


백룡동굴의 들머리는 강물 위 15미터 지점의 절벽 중간에 위치한다. 박쥐가 드나들 수 있도록 창살이 듬성한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자 다른 세계의 공기가 피부로 먼저 느껴진다. 동굴 특유의 서늘한 기운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깜깜한 어둠과 공명하는 가이드의 목소리…. 눈이 어둠에 익숙해질 무렵이면 아궁이와 온돌 같은 것도 설핏 보인다. 일종의 상처이자 훼손 흔적이지만 그런 구간은 아주 짧다.


“저기 바람구멍 보이시죠? 1976년 호기심 많은 마을 주민 정무룡 씨가 이 구멍에서 찬바람이 나오고 소리가 울리는 것을 보고, 구멍을 조금 넓힌 뒤에 들어가서 진짜 신세계를 발견한 겁니다. 자, 우리도 그분처럼 호기심을 품고 저 구멍을 통과해 진짜 백룡동굴을 만나보는 겁니다.” 가이드가 말한다. 우체통 크기 남짓한 구멍을 낮은 포복으로 3~4미터 기어서 통과하다 보면 ‘이게 다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 그 무렵에 탁 트인 공간과 마주할 것이다. 경이로운 모양과 크기의 종유석과 석순, 그 둘이 만나 폭포 기둥처럼 얼어붙은 석주는 기본이고 다랑논 형태의 휴석, 유석, 동굴 진주, 동굴 커튼, 베이컨 시트, 석화, 동굴산호, 동굴 방패 등. 억겁의 시간과 물, 석회석이 만나 만들어낸 온갖 모양새의 동굴 생성물이 끝도 없이 펼쳐지는 신세계. 어떤 것은 버섯 모양이고, 또 어떤 것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어 ‘스머프의 집’ ‘등 돌린 처자’ ‘신의 손’ 같은 별칭으로 불기도 한다.


동굴 속 모든 것이 자연이 빚은 예술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동굴 산호와 동굴 방패는 특히 인상 깊다. 벽에서 조금씩 새어 나온 물방울이 동글동글 맺혀 깨알 같은 산호를 만든 광경을 보는 순간 그 아름다움에 모두 입을 벌린 채 다물 줄 모른다. 국내 최대 규모인 약 11미터 높이의 동굴 커튼과 달걀부침을 빼닮은 에그 프라이형 석순은 또 어떤가.


전 세계에서도 매우 드물게 발견되는 동굴 방패가 백룡동굴엔 왜 그리 많은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일행은 아직 ‘천국의 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무슨 의례인 양 다시 한 번 낮은 포복. “이번엔 좀 더 좁고, 길고, 낮아요.” 무릎걸음으로 모자라 뱀처럼 기어서 ‘천국의 문’을 통과하자 동굴 끄트머리에 이르러 드넓은 광장이 펼쳐진다. 탐사를 시작한 지 1시간 30분 만에 만나는 지하 세계의 절정이라고 해도 좋다. 그 기묘한 모습에 입을 다물기 어려운 종유석과 석순, 석주 무리가 한자리에 모여 삼라만상을 연출하는데, ‘동굴 박람회장’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다양한 풍경이 펼쳐진다. 이곳에만 유일하게 인공조명을 설치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조명을 켰을 때보다 끌 때가 더 인상적이다. 헬멧의 랜턴 불빛까지 모두 끄고 1분간 절대 암흑을 체험하는데,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동굴 벽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 바람 소리 등 살아 있는 천연 동굴의 숨결을 청각으로 느끼는 그 시간은 모든 결이 오감으로 전해지는 짧지만 잊을 수 없는 순간이다.


2시간에 걸친 동굴 탐사는 흥미진진하고 한편으론 조금 힘들기도 하다. 하지만 탐사의 여운은 꽤 오래간다. 해설사(동굴 안에 카메라를 들고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이)가 찍어준 기념사진을 인터넷에서 다운받아 보는 즐거움이 이렇게 클 줄 몰랐으니까. 50세에 가까운 우리의 얼굴에 악마의 뱃속 같은 미지의 지하 세계로 시간 여행을 떠난 어린아이의 표정이 담겨 있어 두고두고 보며 웃을 수 있다. 관람이 아니라 탐사 체험 형태로 일반인에게 허가한 건 2010년. 그사이 이 동굴은 평창군이 자랑하는 제1의 보물로 거듭났다. 주말과 여름휴가철에는 예약이 힘들 수 있다. 만약 비수기 평일에 동굴 탐사 예약에 성공했다면, 그 행운을 절대 놓치지 말라는 얘기다.


백룡동굴 입장료 1만5,000원, 사전 예약 필수, 평창군 미탄면 문희길 63.


강원도 평창으로 거처를 옮긴 에디터 김경은 이번 기사를 위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를 임시 휴업하고, 1주일 동안 동네 투어에 성실히 임했다. 사진가 윤춘길은 쓰임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를 위해 자신을 쓰는 작가의 자리에서 작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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