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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로드 Jul 14. 2016

시애틀 혹은 또 시애틀

SEATTLE or SEATTLE

다운타운을 거닐거나 자연을 벗삼거나. 이토록 자연스럽고 세련된 도시, 시애틀의 두 얼굴.

수상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시애틀 다운타운.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인구가 증가하는 도시 중 1곳이다. © 최남용


Going up


타워 오르기

한때 시애틀 최고의 높이를 자랑하던 타워 스페이스 니들. © 최남용

마치 도시의 마천루를 넌지시 지켜보듯 서 있는 스페이스 니들은 1962년 시애틀 국제 박람회를 위해 지었다. 높이 184미터의 타워. 비행접시에서 모티프를 가져와 당시만 해도 전 미국인을 깜짝 놀라게 한 외관을 뽐낸 랜드마크다. 완공 후 몇 년간은 시애틀에서 가장 높은 건물 타이틀을 유지하기도 했다. 오늘날 다운타운에는 컬럼비아 센터(Columbia Center, 285m)처럼 스페이스 니들을 내려다보는 고층 건물이 여러 개 솟아 있다. 하지만 마천루의 무리에서 떨어져 홀로 우뚝 자리 잡은 이 독특한 외관의 타워만큼 눈길이 가는 것은 찾을 수 없다. 명멸하는 고층 빌딩과 성스러운 레이니어 산(Mount Rainier)을 배경으로 스페이스 니들이 도도하게 서 있는 장면은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만큼 감동적이다.


스페이스 니들의 매표소를 지나서 진입 경사로를 따라 타워를 1바퀴쯤 돌고 나면 전망대까지 곧장 오르는 엘리베이터 탑승장에 닿는다. 일단 블루 스크린 앞에서 기념 사진 1장을 찍고(추후에 합성 사진을 웹사이트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 순서를 기다린다. 전망대는 158미터 위에 자리하는데, 엘리베이터 탑승 후 정확히 41초 후에 도착한다. 스페이스 니들을 360도로 두르는 실외 전망대를 걸으며 바라보는 도시의 풍경은 다채롭다. 세계 여느 대도시에 가도 이런 전망대쯤은 하나씩 있게 마련이나, 이 만큼 갖가지 모습으로 둘러싸인 곳은 찾기 어려울 듯하다. 뻔한 풍경을 뛰어넘는 무엇인가가 시선을 자극한다. 다운타운, 항구, 주택가, 산업 지대, 호수, 해안, 산맥 등이 곳곳에 펼쳐지고, 그사이로 차량과 보트, 수상비행기가 이리저리 움직인다. 주변 자연환경도 독특하다. 시애틀은 태평양과 연결되는 복잡한 해안선의 퓨젯 사운드(Puget Sound) 만 깊숙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지형이 들쭉날쭉하다. 동쪽의 캐스케이드(Casecade) 산맥과 서쪽의 올림픽 국립공원(Olympic National Park)은 먼 곳에서 희미하게 자리해 도시를 낮은 병풍처럼 둘러싼다. 하여, 스페이스 니들에 오르면, 미국 북서부 해안 최대의 도시와 미묘한 자연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날씨가 좋아야 하겠지만.


스페이스 니들 전망대 1회 입장권 22달러, spaceneedle.com



산에 오르기


미국의 원주민은 레이니어 산을 타코마(Tacoma)라고 불렀다. ‘거대하고 하얀 산’이라는 뜻. 먼발치에서 시애틀을 호위하는 듯한 이 하얀 산봉우리는 약 100만 년 전 태어났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에서 미국 캘리포니아까지 이어지는 캐스케이드 산맥의 봉우리 중 하나다. 알래스카에 있는 산을 제외하면, 미국에서 네 번째로 높다. 산맥은 약 4,000만 년 전에 융기했으니까 그쪽 세계에서 레이니어 산은 매우 젊은 녀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지막 폭발은 1896년.

섭씨 20도를 넘는 날씨에도 흰 눈에 뒤덮인 레이니어 산을 오른다. © 최남용

953제곱킬로미터의 레이니어 산 국립공원은 시애틀라이트(Seattlite, 시애틀 시민)가 모험 정신을 테스트하거나 일상에서 탈출하기 위해 뛰쳐나가는 곳이다. 시애틀 관광 엽서에 등장하는 레이니어 산은 도심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듯하나, 실제로는 차로 2시간을 달려가야 한다. 일단 국립공원 안으로 들어가면, 빙하와 눈에 덮여 있는 정상과 숲이 울창한 산악 지대, 백컨트리 스키어를 위한 설원과 하이커를 위한 트레일, 잠시 머물다 가는 소풍객에 알맞은 초원과 며칠 머물다 가는 캠퍼를 위 한 야영장, 클라이머를 유혹하는 봉우리들이 곳곳에 기다리고 있다.

에버그린 이스케이프스 여행사의 가이드 마티와 벤(Ben). © 최남용

에버그린 이스케이프스(Evergreen Escapes) 여행사의 가이드 마티(Marty)는 일행을 레이니어 산 중턱의 해발 약 1,650미터에 자리한 파라다이스(Paradise)로 안내한다. 여행자들의 주요 집결지 중 1곳인 파라다이스는 산 정상을 밟으려는 등반가뿐 아니라 하이커와 스키어로 야외 주차장부터 빈 자리가 없다. “이곳에는 다양한 야생동물과 300여 종의 조류가 서식하는데, 그리즐리베어와 늑대는 없어요. 또 막상 스키어를 위한 리프트도 없기 때문에 산악 스키를 주로 즐기죠. 산 정상까지 올라가는 사람들은 음… 1년에 한 6,000명쯤 될 거예요.” 마티가 말한다. 그는 하와이 빅아일랜드에서 화산 탐험 가이드로 일하다가 고향인 워싱턴 주로 다시 돌아왔다. 레이니어 산도 화산이니 이를테면, 그는 화산 전문 가이드인 셈. 초여름의 레이니어 산 고지대에는 아직 두터운 눈에 덮여 있다. 한여름에 들어서야 눈이 녹고 야생화가 만발한 초지가 등장한다고. 빙하와 만년설이 눌러앉은 정상부의 색은 1년 내내 변함없다. 레이니어 산을 정복하려는 이들은 정상 밑 베이스캠프에서 선잠을 자고 태양열에 뜨거워진 빙하가 움직이기 전 이른 새벽부터 등정을 시작할 것이다.

머틀 폭포 너머로 보이는 레이니어 산 정상. © 최남용

마티와 함께 스노슈잉으로 약 30분쯤 걸으니 머틀 폭포(Myrtle Falls)에 도착한다. 숱한 겨울을 이겨낸 폭포는 성기게 녹은 눈밭 사이로 물줄기를 흘린다. 사실 눈 덮인 레이니어 산에는 정확한 코스랄 게 없다. 앞서 간 이의 발자국을 따라가거나 아무런 흔적 없이 팽팽한 눈밭 위를 걸어가거나 둘 중 하나다. 가끔 마주치는 스키어는 긴 자국을 남기며 저 아래로 사라진다. 어떤 이는 스키나 스노보드를 맨 채 무작정 높은 곳으로 걸어 올라가고 있다. 누구든지 잠시 멈출 때마다 삐죽삐죽 이빨을 드러낸 것 같은 암봉과 캐스케이드 산맥이 어우러지는 환상적인 광경에 넋을 빼앗길 수밖에 없을 터. 저 거대하고 하얀 산을 쉽게 넘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시애틀에서 출발하는 레이니어 산 당일 투어 1인 225달러, evergreenescapes.com


Staying at

섬에서 머물기


유니언 호수(Lake Union)의 접안지에서 떨어져 나온 수상비행기가 시애틀 서쪽 올림픽 반도(Olympic Peninsula) 방향으로 기수를 돌린다. 다운타운의 마천루를 뒤로 보내자 퓨젯 사운드의 잔잔한 수면 위로 비행기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정면으로 올림피아 국립공원의 짙은 삼림이 멀리 펼쳐져 있다. 30분간 공중을 떠다니던 비행기는 좁고 긴 커널 후드(Canal Hood) 수로에 미끄러지듯 착륙한다. 몇 대의 보트가 정박해 있는 부두의 잔교가 고요한 은신처 같은 앨더브룩 리조트 앤드 스파(Alderbrook Resort & Spa)로 이어진다.

조용한 해안가에 자리 잡은 앨더브룩 리조트 앤드 스파. © 최남용

“저희 리조트는 1913년 처음 문을 열었어요. 그때는 도로도 없어서 보트로만 올 수 있었죠. 1940년대에 오두막 숙소들을 지었는데, 아직도 사용하고 있어요. 이곳을 찾는 어떤 손님은 냉장고가 등장하기 전에 저 앞 개울에 수박을 담가놓고 먹었다며 옛일을 회상할 때도 있죠.” 리조트 홍보 담당자 카트린 카민(Kathryn Kamin)이 말한다. 초창기 이곳의 모습을 찍은 기록사진을 보면 고작 텐트 몇 동이 전부. 이제는 16개의 코티지와 93개의 객실, 스파와 수영장, 여러 레크리에이션 시설을 갖춘 고급 리조트로 성장했다. 시애틀 도심에서 60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데, 대자연의 품 속에 푹 파묻힌 분위기다. 소음이 아니라 소리가 사위를 채운다. 자갈 해변에 부딪히는 낮은 파도 소리, 앨더 트리(alder tree, 오리나무)를 스치는 바람 소리, 나이 든 투숙객의 잦은 걸음 소리, 썰물 때를 맞춰 굴을 캐는 인부들의 기계적인 동작마저 들리고 보인다. 정원을 거닐다 고개를 돌리면, 커널 후드의 좁은 바다 뒤로 길게 뻗어 있는 올림픽 산맥의 굳건한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어둠이 내린 후에는 산맥의 검은 실루엣 위로 눈이 시리도록 무수한 별이 반짝인다. 100여 년 전부터 이 자리에 텐트를 치고 밤을 지새우던 이유일 것이다.

리조트에서는 다양한 수상 액티비티를 경험할 수 있다. © 최남용

리조트의 총괄 셰프 조시 델가도(Josh Delgado)는 여유로운 휴식의 한복판에서 미각의 중요성을 1단계 더 일깨운다. 그는 이 일대에서 나는 신선한 해산물과 농산물로 언제나 건강한 요리를 준비한다. 심지어 리조트 뒷산은 그가 애정을 표하는 가장 자연적인 텃밭이다. 메이플꽃부터 마이너스 레터스(minus lettuce), 쐐기풀, 워터그라스(watergrass), 삼나무 껍질까지. 그는 뒷산의 트레일을 따라 여기저기 뿌리내린 식물을 찾아내 식자재로 종종 사용한다.


그의 표현을 따르자면 ‘트레일 투 테이블(trail to table)’. 과연 그 맛이 요리에 어떻게 녹아들지는 잘 모르겠지만, 요리에 정성을 쏟는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그리고 자신의 요리를 맛보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 오후 5시쯤 리조트 앞 잔교로 카트를 끌고 와서 직접 굴을 손질하는 세프니까 말이다. “이 굴을 보세요. 2개가 붙어 있네요. 껍질을 벗길 때에는 칼을 이렇게 집어넣고 살짝 비틀어야 합니다. 자, 이제 와인과 함께 먹어보세요.”


앨더브룩 리조트 앤드 스파 숙박 230달러부터, alderbrookresort.com


도심에서 머물기


시애틀 도심 한복판, 7번가와 스튜어트 스트리트(Stuart Street)가 교차하는 장소에 자리한 호텔 맥스(Hotel Max)는 젊은 시애틀라이트의 정신을 닮았다. 혁신적이고 개성 넘치며, 아침부터 커피를 달고 사는 IT 그루와 반항기로 똘똘 뭉친 로커가 희한하게 한데 뭉쳐 있는 상태라고 할까. “그건 불가능해”라고 비꼬는 이도 호텔 맥스에서는 생각을 고쳐먹을지도 모르겠다.


호텔 벨맨은 배기 청바지에 가죽 재킷을 걸치고 10센티미터는 넘는 직한 턱수염을 길렀고, 리셉셔니스트는 늘씬한 키에 펑크족 스타일로 옷을 입었다. 물론 정장 차림의 컨시어지도 있다. 다만 스리피스 슈트에 타이를 매지 않았을 뿐. 허나 그들은 이곳과 무척 잘 어울린다. 미술과 음악을 파격적으로 채용한 호텔이니 말이다. 로비부터 살펴보자. 앤디 워홀, 에드 루샤(Ed Ruscha), 이반 나바로(Ivan Navarro) 등의 미술 작품과 그룹 너바나(Nirvana)의 베이시스트 크리스 노보셀릭(Krist Novoselic)이 디자인한 깁슨 베이스 기타를 멋지게 설치해놓았다. 1990년대 전 세계 음악계를 충격에 빠뜨린 음반사 서브팝(Sub Pop)과 함께 만든 호텔 기념품도 보인다. 느긋하게 앉아 잡담 나누기 좋은 소파와 의자도 있고, 노트북으로 업무를 볼 수 있도록 배려한 바 좌석도 있다. 이런 독특함은 객실로 이어진다. 각 객실에는 시애틀 지역 아티스트의 작품이 걸려 있다. 특히 5층은 서브팝 플로어라고 명명했는데, 얼터너티브 록 시대의 전성기를 기록한 찰스 피터슨(Charles Peterson)의 사진으로 문을 도배했고, 객실마다 턴테이블과 서브팝의 LP 앨범을 두었다. 아 그리고 하나 더, 호텔 로비에서는 매일 오후 5시 30분부터 투숙객에게 로컬 크래프트 맥주를 무료로 제공하는 해피 아워를 시작한다. 시애틀의 크래프트 맥주 문화는 미국 최고라고 단언해도 부족하지 않다. 당연히 해피 아워가 되면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로비를 마치 파티장처럼 만든다. 배경음악은 록이다.

호텔 맥스의 로비에 설치된 드럼을 사용한 미술 작품. © 최남용

호텔 내 레스토랑 밀러스 길드(Miller’s Guild)는 초창기 시애틀라이트, 즉 목공이나 철공업에 종사하던 이들이 들어와도 어색할 것 같지 않은 분위기다. 목재와 철재를 세련되게 사용해 강한 인상의 인테리어를 마무리했다. 이곳에서 제임스 비어드 상(James Beard Award)을 수상한 셰프 제이슨 윌슨(Jason Wilson)이 드라이 에이지드 비프의 진수를 선보인다. 덕분에 나무 화덕에서 조리한 소고기를 아침부터 먹어볼 수 있다. 저녁에는 자체 보유한 오크 통에서 숙성시킨 위스키로 제조한 시그너처 칵테일을 맛보자.


호텔 맥스 숙박 179달러부터, hotelmaxseattle.com


Exploring on


길 위의 탐험


1970년대까지만 해도 시애틀은 지금만큼 핫한 도시가 아니었다. 인구도 줄어들었고 도시 경제도 시원찮았다. 청춘들 사이로 그런지 록이 등장하기 딱 좋은 침체기였다. 게다가 여름철 몇 개월을 빼면 시애틀의 날씨는 적잖이 우중충하다. 안개와 비, 가끔 비치려는 햇살과 그것을 여지없이 가로막는 구름. 차고에서 노래라도 부르지 않으면 고독에 함몰될 뻔했다. 다행히 어려운 시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1980년대 들어 IT 산업이 태동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애틀은 샌프란시스코와 더불어 닷컴 시대의 주인공으로 자리 잡았다. 동시에 차고에서 나온 그런지 록은 이 도시에 문화적 성취감을 심어주었다. 사실 어떤 커피 브랜드가 대도시를 통째로 대변한다는 건 가볍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카페 라테 1잔 안에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시애틀 박람회가 열리던 시애틀 센터(Seattle Center) 주변에는 스페이스 니들뿐 아니라 공연장, 전시장, 박물관 등이 모여 있다. 그중 EMP(Experience Music Project) 뮤지엄은 박람회 이후 전 세계가 시애틀에 집중하게 만든 유일무이한 문화적 사건이자 유행의 집합소다. 그런지 록과 시애틀이 배출한 걸출한 음악가가 살고 있는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공동 창립자 폴 앨런(Paul Allen)이 주도해 완성했는데, 프랭크 게리(Frank Gehry)가 디자인한 뮤지엄 외관은 시애틀 출신인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의 기타 선율처럼 거칠게 출렁인다. 전시장은 록 음악 애호가의 환상을 절반쯤 채워준다. 약 8만 점에 이르는 소장 자료 중 일부가 낮은 조도의 실내 조명을 받으며 신화의 유물같이 전시되어 있다. 너바나, 앨리스 인 체인스(Alice in Chains), 펄 잼(Pearl Jam), 사운드 가든(Sound Garden) 등 시애틀 그런지 록을 이끈 밴드의 탄생과 소멸, 너바나의 리더 커트 코베인(Kurt Cobain)이 직접 쓴 가사 노트, 헨드릭스가 부순 팬더 스트라토캐스터 기타, 시애틀에서 스타덤에 오른 레이 찰스(Ray Charles)의 첫 번째 앨범 등. 미국 대중음악과 팝 컬처의 역사를 학습한 뒤에는 3층으로 가보자. 사운드 랩(Sound Lab) 스튜디오에 들어가 각종 악기를 직접 신나게 다뤄볼 수 있으니까.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의 휴게실에서 시애틀의 그레이트 휠(Great Wheel)과 항구를 바라본다. © 최남용

시애틀 센터의 또 다른 명소는 2012년 5월 개관한 치훌리 가든 앤드 글라스(Chihuly Garden and Glass). 미국의 유리 공예가 데일 치훌리(Dale Chihuly)의 매혹적인 작품이 약 300제곱미터 규모의 공간에 설치되어 있다. 그의 작품은 존재하지 않았던 생명체를 창조하는 듯하다. 유리 소재로 구현한 비정형의 형태와 강렬한 색상은 빛을 살짝 받을 때마다 화려함을 과시한다. 투명 온실에 서서 천장에 매달린 그의 작품을 보면, 스페이스 니들과 시애틀의 푸른 하늘이 3차원의 거대한 캔버스를 이룬다. 치훌리 가든 외에 퍼시픽 사이언스 센터(Pacific Science Center)나 매카우 홀(McCaw Hall)까지 둘러본 후에는 모노레일을 타보자. 이 역시 1962년 박람회에 맞춰 개통한 대중교통 수단. 60년이 넘었지만, 전혀 시대에 뒤처져 보이지 않는다. 모노레일의 종착역 웨스틀레이크 센터(Westlake Center)에서 그 유명한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까지는 걸어서 10여 분. 시애틀의 현재라고 부를 만한 다운타운을 가로질러 과감히 1세기 전에 지은 마켓 속으로 들어간다. 마치 세상의 모든 자영업자와 능력자들이 한데 모인 만물시장 같은 곳. 신선한 튤립과 50년 전 동전, 유쾌한 입담의 생선 가게와 풍선 검을 잔뜩 붙여 놓은 극장, 세계 최초의 스타벅스와 마지막 주인을 찾는 LP 앨범 등. 모든 것을 포용하며 동시에 개성을 존중하는 시애틀의 진실을 이곳에서 마주칠 것이다.

치훌리 가든 앤드 글라스의 온실에 전시된 화려한 유리 조형 작품. © 최남용

EMP 뮤지엄 입장료 25달러, empmuseum.org
치훌리 가든 앤드 글라스 입장료 27달러, chihulygardenandglass.com


바다 위의 탐험


에메랄드 시티(Emerald City) 혹은 레인 시티(Rain City). 시애틀의 별칭은 도시를 둘러싼 숲과 바다, 호수가 얼마나 풍요로운지 귀띔해준다. 시애틀은 19세기 후반 임업으로 크게 성장했다. 시애틀이 속한 워싱턴 주의 울창한 삼림은 매우 좋은 목재가 자라고 있는 거대한 창고 같다. 수상비행기를 타고 시애틀 외곽을 잠시라도 비행하면, 짙은 초록의 육지와 에메랄드빛 바다와 호수가 자아내는 거대한 풍경을 확인할 수 있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가 대화재로 초토화됐을 때, 도시를 재건하기 위해 워싱턴 주에서 베어낸 나무가 대거 투입됐다. 오늘날 진보적인 시애틀라이트는 벌목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지만, 한때 그것이 시애틀의 경제를 지탱해줬다는 역사는 변하지 않는다. 다만 이제는 그 폐해를 알기 때문에 보존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잊지 않는다.

퓨젯 사운드 익스프레스호를 타고 약 2시간을 항해해 샌환 제도에서 범고래를 발견했다. © 최남용

시애틀의 물길은 19세기 말 알래스카 골드러시 시기에 수많은 사람을 나르던 통로였다. 일확천금을 꿈꾸며 많은 이가 시애틀에 모였고, 숨을 고른 후 알래스카를 향해 배를 타고 떠났다. 덕택에 시애틀은 급격히 발전할 수 있었다. 이제 그렇게 항구를 떠나는 이들은 일확천금과 큰 관련이 없다. 그들이 바라는 행운은 과연 고래를 볼 수 있느냐 없느냐 정도일 뿐.


시애틀 북쪽 에드먼즈(Edmonds) 항구를 출발한 퓨젯 사운드 익스프레스(Puget Sound Express)호의 목적지는 샌환 제도(San Juan Islands)다. 캐나다 밴쿠버와 가까운 샌환 제도는 약 170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애틀과 달리 화창한 날이 많고 야생의 모습도 잘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퓨젯 사운드 익스프레스의 선장과 스태프는 고래에 관한 전문가로 인정해줘야 한다. 그들은 범고래, 혹등고래, 회색고래 등이 어느 시기에 어디에서 출몰하는지 알고, 그 고래가 정확히 어떤 녀석이었는지 단번에 파악한 다고. 고래가 제 모습을 5분의 1쯤 드러내고 몇 번의 동작만 보여주더라도 말이다. 이 일대에 20여 개의 고래 탐사 여행업체가 운영되고 있는데, 고래를 어느 지점에서 발견했는지 서로 정보를 공유한다. 때로 비행하던 파일럿이 무선으로 알려주기도 하고, 조업 중인 어선이 알려주기도 한다. 일단 출몰 정보를 입수하면 배를 달린다. 목적지가 가까워지면 속도를 줄이고 마치 물 위에 떠다니듯 천천히 접근한다. 고래의 영역을 최대한 침범하지 않기 위해서다. 갑판에 줄줄이 서 있는 투어 참가자들은 단 수초간 물 밖으로 내민 꼬리만 봐도 낮은 탄성을 내뱉는다. 설사 그게 전부라고 해도 괜찮다. ‘와, 우!’ 돌고래의 수영 동작이 길게 이어지면 카메라 셔터음만 들린다. 조용히 몇 마디가 오가고, 손자를 데려온 할아버지는 말 없이 고래를 보라고 손짓한다. 이 짧은 행운의 순간이 그들에게 자연의 경건함을 전해준 듯하다.


퓨젯 사운드 익스프레스 반일 투어 135달러부터, seattle.pugetsoundexpress.com



허태우는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의 편집장이다. 스타벅스 1호점에서 프라푸치노를 사느라 30분을 기다렸다. 사진가 최남용은 시애틀에 도착하고 이틀 후부터 이 도시에 살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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