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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초연 Feb 15. 2021

꿈꾸지 않을 용기

포기하는 마음에 대하여

꿈이 있기에 존재한다고 믿던 시절이 있었다. 이십 대 초였다. 고등학생 때부터 함께 글을 쓰던 친구들은 전국의 각기 다른 문예창작학과로 진학했다. 매일 글을 쓰던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서였을까. 대학생이 되어서도 뭐라도 써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나를 짓눌렀다. 어쩌다 글을 쓰지 않은 날에는 쓰레기가 된 기분이었다. 잘 써지지 않는 날에는 자괴감이 더 심해졌다. 한글의 흰 바탕만 봐도 토가 나올 것 같았다.


친구들과 모일 때면 자주 우울한 이야기를 해댔다. 작은 소리는 새벽에 잘 들리듯, 침전된 마음만이 잘게 부스러지는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고 믿었는지 모르겠다. 남들보다 더 많이 예민해졌고, 그렇지만 예민해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글이 안 써져서 죽고 싶다가 좋은 글을 보면 다시 살고 싶어 졌다. 꿈을 너무 오래 꾸다 보니 언젠가부터 꿈이 내 몸집보다 더 커진 느낌이었다. 이러다 꿈에 잡아먹힐 것만 같아 무서웠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무렵의 나는 더 이상 글이 쓰고 싶은 게 아니었다. 이제 나는 무엇이 되고 싶었다. 백일장에서 상을 받아 당연히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한 우리가 지극히 당연히 꿈꿀 수밖에 없는 그 무엇. 그래. 그게 남들보다 더 빨리 되고 싶었다. 더 많은 상을 받고 싶던 어린 날의 욕심처럼, 더 빨리 더 큰 그 무엇에 훌쩍 닿아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고등학생 때처럼 노력하기란 쉽지 않았다. 무서웠다. 빈 화면, 자괴감, 무력감, 박탈감, 열등감, 우울. 잘 써지지 않아서 죽고 싶고, 글이 쓰기 싫어서 죽고 싶었다. 그러다 며칠 글을 놔버리면 글이 쓰고 싶어 죽고 싶었다. 어쩌라는 건지 나 참. 그저 좋아 쓰던 시절이 너무 아득했다. 글은 인생의 숙제가 되고 있었다. 이제 글쓰기는 지긋지긋했다. 글이 쓰고 싶어서 그 난리를 쳐놓고선 이제 와서 글쓰기는 꼴도 보기 싫다고 하는 꼴이란. 이제 글은 꿈이 아니라 벌이었다. 그렇게 지지고 볶고를 몇 년, 한 문예지 최종심이 나의 최종 스코어였다.

내가 나를 죽여버릴 것만 같아 꿈꾸기를 그만뒀다. 꿈을 꾸지 않아도 인생은 잘도 굴러갔다. 이상했다. 꿈을 꾸지 않아도 살아진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꿈을 꾸지 않으니 하루하루가 의미 없이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더 이상 자괴감은 걸 느끼지 않아도 되 마음만은 편했다. 다만 꿈이 있던 자리가 비어버려 마음이 휑 한 기분이었다. 잡고 있던 꿈을 놓았을 뿐인데 인생이 너무 외로워졌다. 졸업 무렵 백일장 키드들은 나처럼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건 M도 마찬가지였다. M은 고등학생 때부터 같이 글을 쓰던 친구였다. 서로 다른 대학에 진학한 이후론 분기마다 간간히 겨우 연락을 주고받곤 하는 사이가 되었는데 마지막 연락은 기억도 나지 않은 채로 영영 안녕이 되었다.


M을 생각하면 말갛고 단단하다는 단어가 떠오른다. 유약해 보이는 외면 뒤엔 강인한 심성을 지닌 아이였다. 그녀를 볼 때면 종종 뭘 해도 될 아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정말로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해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한 M은 몇 년 뒤, 난데없는 죽음으로 우리를 다시 한번 놀라게 만들었다.


M의 빈소에는 예상대로 낯익은 얼굴들로 가득했다. 모두 백일장 키드들이었다. 이미 꿈을 이룬 친구, 꿈을 좇는 친구, 꿈을 포기한 친구가 둘러앉아 M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M말이야, 갑자기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대. 글을 계속 쓰고 싶어 하던 M과, 졸업 후 취업을 종용하던 부모님 사이의 갈등이 원인이라고 했다. 속속들이 깊은 사연까진 알 수 없지만 자꾸만 한숨이 났다. 그놈의 꿈이 뭔데. 이미 꿈을 이뤄 작가가 된 친구는 술잔을 기울이면서 작가가 된 다음이 진짜 시작이라고 말했다. 아직 꿈을 꾸는 친구는 무섭다고 했고, 일찌감치 꿈을 포기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텅 빈 속이 콕콕 쓰렸다.

치열하게 꿈을 꾸고 난 다음은 마음은 물론이고 몸까지 너덜너덜해진다. 꿈에게 시절을 세 준 값이 이렇게 비싸게 치이다니. 앓으면서도 나는 꿈의 손을 종종 잡았다 놓았다 했고, 그러는 동안 치열하게 쓴 시간보다 쓰지 않은 시간을 더 길게 살아 보냈다. 그리고 너무 멀리 와버린 지금은 M이 영정사진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조차 흐릿해져 버렸다. 나는 소설가가 될 거야. M이 그런 말을 했던가. 모르겠다. 다만 글 쓰기가 좋다고 하던 M의 목소리만 떠오른다. 홍대 노래방에서 네미시스의 솜사탕을 부르던 M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상을 받지 않아도, 그저 글만 쓰게 해 주면 좋았던 한 시절이 떠오른다. 우리 모두 좋아서 시작한 글이었는데 글이 왜 꿈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좀먹고 있었는지.


M의 빈소에 모인 친구 중 여전히 20대 때와 같은 온도로 꿈을 꾸는 친구는 단 한 명뿐이다. 그는 새벽 4시에 일어나 브런치를 쓰고, 단기 근무 중인 회사에서 일을 하고 퇴근 후에 다시 또 시를 쓴다고 한다. 그의 하루를 들을 때면 나는 글이, 그놈의 꿈이 그를 잡아먹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자주 생각한다.


더 이상 등단을 새해 소원으로 빌지 않게 된 나는 여전히 무언갈 잃어버린 듯 기분이 든다. 하지만 잃어버린 마음은 잃어버린 마음 그대로 두고 있다. 꿈을 꾸는 일은 그저 쇼핑카트에 물건을 담고 빼는 일처럼 간단한 일이지, 거창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꼭 지금이 아니더라도 꿈은 언제든 다시 꿀 수 있다는 걸. 그걸 그때는 왜 상상조차 못 했던 걸까. 이 간단한 이치를 우리들 중 누구라도 일찍이 알아차렸다면 M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을 수 있었을까. 그러니까 그렇게까지 온몸에 힘을 잔뜩 주고 꾸는 게 꿈이 아니라고 누군가 말해주었다면, 우리들은 조금 적게 슬플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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