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안 밸리(Aryan Valley)
사진 한 장이 나를 이끌었다. 흑백의 거친 주름투성이 얼굴 위, 황홀하리만치 생생하게 피어있던 총천연색의 꽃장식을 하고 있는 여인들. 그 강렬한 화려함에 대한 부조화를 나의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레(Leh)를 떠나 인더스강이 깎아지른 깊은 협곡, 아리안 밸리(Aryan Valley)로 향했다.
가는 길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레에서 출발한 낡은 버스는 인더스강의 굽이치는 물길을 따라 8시간 넘게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달렸다. 덜컹거리는 차체에 몸이 쏠리고 먼지가 일었지만, 창밖으로 펼쳐지는 비현실적인 회색빛 절벽의 풍경은 그 고단함을 잊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
그렇게 긴 시간 끝에 도착한 곳, 내가 머물 아리안 밸리의 가르콘(Garkone) 마을.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나를 압도한 건 거대한 굉음이었다. 빙하가 녹아 섞인 검은 강물은 마치 성난 흑룡처럼 좁은 협곡을 집어삼킬 듯 무섭게 흐르고 있었다. 그 차갑고 거친 물소리는 낯선 이방인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마을의 골목으로 한 발짝 들어서자, 공포는 거짓말처럼 달콤함으로 바뀌었다.
8월의 가르콘 마을은 온통 살구 향기로 진동했다. 담벼락 너머, 길가 언덕 위, 발에 차이는 것이 전부 살구였다. 노란 보석처럼 익은 살구가 '툭, 툭'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길을 걷다 손을 뻗어 살구를 한 움쿰 따 입에 넣었다. 넣는 순간 입안 가득 터지는 진한 단맛. 척박한 바위산 깊은 곳, 신이 숨겨둔 비밀 과수원이 바로 여기였다.
이 풍요로운 아리안 밸리의 주인은 브록파(Brokpa) 사람들이다. 그들의 모습은 라다크의 다른 지역 사람들과 확연히 달랐다. 훤칠한 키와 다부진 골격, 그리고 깊고 뚜렷한 이목구비. 전설에 따르면 이들은 기원전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 때 남겨진 군대의 후손들이라고 한다. 강인한 턱선과 콧날에서 수천 년을 이어온 '아리안'의 긍지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 강인한 외모보다 더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그들의 머리 위였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그들은 머리에 꽃화관을 이고 살았다.
주황색 꽈리 꽃과 붉은 장미, 이름 모를 들꽃들로 화려하게 장식된 화관 페이락(Perak). 밭을 매는 할머니도, 짐을 나르는 청년도, 마을 어귀에 앉아 곰방대를 문 할아버지도 머리엔 어김없이 꽃이 피어 있었다. 무채색의 황량한 협곡 속에서 그들의 화관은 타오르는 생명의 불꽃 같았다. 흑백과 컬러가 섞인 내 사진들, 그들의 깊은 주름과 화려한 꽃은 묘한 조화를 이루며 강렬한 생명력을 뿜어냈다.
가르콘에 짐을 풀고 다(Dah), 욕마하누(Yogma Hanu) 등 인근 마을을 탐방하던 중 곡마하누(Gogma Hanu)에서 잊지 못할 추억을 만났다.
우연히 마주친 어느 집의 젊은 주인과 그녀의 친구는 낯선 나를 집안으로 초대하였다. 흙으로 빚은 소박한 집 안에는 소박한 가재도구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그들은 따뜻한 밀크티(짜이) 한 잔과 손으로 직접 투박하게 구워낸 과자를 내어왔다.
알렉산더의 후예라는 전설처럼 강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그들이 건넨 차 한 잔에는 더없이 부드러운 정이 담겨 있었다. 마을에는 한낮의 정적이 함께 했고, 그 작은 방 안 역시 세상 그 어디보다 아늑했다. 그 투박한 과자의 고소함은 여행자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가르콘을 떠나는 날, 처음엔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인더스강의 굉음이 어느새 익숙한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거친 자연 속에 똬리를 틀고, 그 척박함 위에 가장 화려한 꽃을 피우고 사는 사람들. 살구가 지천으로 널린 그 달콤한 땅에서, 머리에는 꽃을 얹고 가슴에는 따뜻한 온기를 품고 사는 알렉산더의 후예들. 8시간의 고된 이동이 결코 아깝지 않은 곳이었다.
멀어지는 계곡을 뒤돌아보며 나는 다짐했다. 살구꽃이 흐드러지거나 노란 열매가 다시 땅을 덮을 때, 기어코 이 기묘하고 아름다운 파라다이스로 다시 돌아오겠노라고. 봄축제 때를 기다려 보자. 그러나 나는 카르길(Kargil)을 거쳐 스리나가르(Srinagar) 가는 길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