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호수의 시카라 할아버지

by 론리포토아이

보트하우스(Houseboat)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눈을 뜬 아침, 오른쪽 다리 전체를 뒤덮은 붉은 반점들을 발견했다. 말로만 듣던 ‘베드버그(Bedbug)’의 습격이었다. 다행히 가렵지는 않았지만, 선명하게 박힌 붉은 자국들은 마치 이 낯선 땅이 내 몸에 새긴 일종의 문장(紋章)처럼 보였다. 아리안 밸리(Aryan Valley)의 거친 흙먼지를 뒤로하고 이틀간 길 위를 떠돌며 도착한 스리나가르(Srinagar). 이 붉은 흔적들은 고된 여정이 끝났음을 알리는, 몸이 내뱉는 안도의 신호였을지도 모른다.


안개 속의 경계, 낯선 풍요로의 진입

스리나가르로 향하는 길은 녹록지 않았다. 카르길(Kargil) 외곽의 작은 마을에서 밤 10시를 넘기자 버스는 멈추어 섰다. 일종의 통행금지였다. 마을은 적막에 잠겼으나, 그 고요를 비웃듯 무슬림 사원(Mosque)의 스피커에서는 밤새도록 기도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차가운 공기를 찢고 나오는 그 소음은 지독하게도 시끄러웠고, 덕분에 좁고 불편한 버스 좌석에서 꼬박 밤을 지새워야 했다.

정확히 새벽 4시가 되자, 멈췄던 버스가 다시 움직여 스리나가르를 향해 서서히 나아갔다. 날이 밝아오자 차창 밖으로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졌다. 라다크(Ladakh)에서 내내 보아왔던 메마른 회색빛 산맥은 간데없고, 촉촉이 내리는 비 아래 온통 싱그러운 초록 벌판이 끝없이 일렁이고 있었다. 8월의 대지는 비를 머금어 눈부시게 풍요로웠고, 그 생명력의 끝자락에서 '카슈미르의 왕관 위 보석'이라 불리는 거대한 달 호수(Dal Lake)가 신비로운 자태를 드러냈다.


지옥이 되어버린 낙원의 뒷면

잠무 카슈미르(Jammu & Kashmir). 이곳은 무굴 제국의 황제들이 지상 낙원을 꿈꾸며 정원을 가꾸었을 만큼 아름답지만, 동시에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의 오랜 갈등이 응축된 아픈 땅이다. 사람들은 이곳을 '지옥이 되어버린 낙원'이라 부르기도 한다. 도시 초입부터 마주한 무장 군인들의 삼엄한 경계는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고, 거리 곳곳에는 교전의 역사 속에서 산화한 이들을 기리는 추모탑들이 서 있었다.

2018년의 여행 가이드북은 외지인들에게 "달 호수 구역을 가급적 벗어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었지만, 최근 다시 찾은 이곳의 에이전트들은 환하게 웃으며 "이제는 어디든 자유롭다"고 말한다. 주저하던 마음을 내려놓고 오토릭샤(Auto Rickshaw)에 몸을 실었다. 무슬림의 정체성이 강한 시내는 다소 경직되어 보였으나, 그 속에서 만난 사람들의 눈동자에는 외지인을 향한 수줍은 호기심이 서려 있었다.


물 위에서 피어나는 삶의 박동

달 호수의 수로에는 수백 척의 보트하우스가 성처럼 줄지어 있다. 과거 영국 식민지 시절, 외국인의 토지 소유 금지법을 피해 호수 위에 집을 짓고 살았던 영국인들의 지혜가 남긴 독특한 유산이다. 이곳의 삶은 물 위에서 시작된다. 새벽이면 푸르스름한 안개 속에서 상인들이 배 위에서 채소와 꽃을 거래하는 수상 시장이 열리고, 그 안개 너머로 거래를 주도하는 노인들의 주름진 얼굴에는 삶의 고단함과 활기가 교차한다.

호수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시카라(Shikara)’라고 불리는 작은 나룻배가 필수적이다. 나는 그들 틈에서 미리 출력해 온 사진 한 장을 꺼내 들었다. 2017년 여름, 이 호수에서 만났던 멋진 수염을 가진 노인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었다.


"이분을 찾고 싶습니다. 혹시 보신 적 있나요?“


여러 차례 사공들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수소문한 끝에, 그 너른 달 호수에서 마침내 그와 마주했다. 세월이 흐른 만큼 노인은 다소 야위고 깊은 주름을 가졌지만, 사진 속의 그 당당한 기품만은 여전했다. 6년 전 자신의 모습이 선명하게 담긴 사진을 건네받은 그의 얼굴에 반가운 빛이 감돌았다.


다시 흐르는 시간, 그리고 재회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어루만지더니, 이내 아이처럼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자신의 시카라에 태웠다. 그는 노를 저어 호수를 가르며, 스쳐 지나가는 동료 사공들에게 보란 듯이 사진을 들어 보였다.


"이것 좀 보게나! 이 귀한 손님이 내 옛 모습을 잊지 않고 멀리서 다시 찾아와 주었어!“


자랑스러움과 행복이 가득한 목소리가 호수 위에 울려 퍼졌다. 그는 그사이 자식들을 모두 출가시켰고, 이제는 어엿한 자기 소유의 시카라를 갖게 되었다며 지난 세월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자 보트하우스 창가에는 황금빛 일몰의 반영이 길게 드리워졌고, 호수는 한없이 평온해졌다.

1시간 남짓, 그의 배에 몸을 싣고 호수의 여유를 즐겼다. 분쟁과 긴장의 역사보다 더 강인한 것은, 결국 한 장의 사진에 진심으로 기뻐하고 자식의 성장을 대견해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 그 자체였다. 호수 위로 번지는 부드러운 물결 위로, 노인의 웃음소리가 긴 여정의 피로를 씻어내고 있었다.


17025_Srinagar_DSC4741.jpg 2017.7
230731_Srinagar_116.jpg 2023.7
170725_srinagar_0082.jpg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