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달서림 대표님이자 나의 시벗, 민정에게 띄우는 답장
2022년 3월 8일 화요일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날은 반달서림에서 열리는 시창작 모임에 처음 참석한 날이었고, 그 자리에서 민정 님을 처음 만났다. 민정 님은 독립서점 반달서림을 운영하는 서점 대표이기도 했지만, 내게는 무엇보다도 시를 함께 읽고 쓰는 소중한 시벗이었다. 그가 시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자그마한 서점안에 가득 찬 시집 서가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2023년 초, 주재원으로 발령받은 남편을 베트남으로 보내고 어린 딸과 함께 한국에 남아 서점을 꾸려가던 민정 님의 모습은 내게 깊은 인상으로 남았다. 그래서 민정 님이 베트남으로 떠나면서도 반달서림을 지키고 싶다고 했을 때, 나는 망설임 없이 목요 서점원으로 서점을 돕겠다고 했다. 내 인생의 소중한 만남, ‘반달목요북클럽’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내일, 반달서림으로 마지막 출근을 하고 나면 2023년 10월부터 2025년 6월까지—꼬박 21개월을 함께한 나의 한 시절, '반달서림 시절'이 마무리된다.
아직도 그 사실이 믿기지 않던 찰나, 민정 님에게서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사단법인 행복한 아침독서'가 매달 펴내는 《동네 책방 동네 도서관》의 ‘책으로 안부 묻기’ 코너에, 민정 님이 청탁을 받아 J(나, 효진이라구요!)에게 쓴 편지였다. 자연을 아끼고, 책을 좋아하는 민정 님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는 고운 편지를 받았기에, 나도 성급하게 답장을 써 본다.
민정에게.
이벤트를 좋아하는 민정다운, 놀라운 방법으로 도착한 다정한 편지 잘 받았어요. 편지를 읽고 나니, 민정이 마음에 품고 있는 나무들의 내음이 제 책상까지 흘러드는 것 같았어요. 푸르른 망고나무 가로수를 따라 민정의 명랑한 리트리버 반달이와 함께 산책하고, 창밖으로 망고가 주렁주렁 달린 망고나무를 바라보며 편지를 쓰는 민정의 모습을 떠올려 봐요. 두 시간의 시차만큼이나 조금 다른 배경에서 살아가는 민정의 모습을요. 같은 도시에 살 때에는 굳이 떠올릴 것도 없었는데, 이제는 조금 더 시간을 들여 그려보게 돼요. 예전처럼 자주 볼 수 없지만, 생각하는 시간은 오히려 늘어났으니 멀리 사는 것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네요.
공간을 기억할 때에 나무로 그 곳을 마음에 기억해 둔다는 민정의 말에 감탄이 나왔어요. 반달'서점'이 아니라, 반달'서림'을 짓고 가꾸는 사람다운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사실 저는 나무로 공간을 기억할 정도로 나무에 애착을 지닌 사람은 아니었는데, 민정의 말을 듣고 나니 저 역시 몇 그루의 나무들을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어요. 이를테면 산책가는 숲길, 중간쯤에 자리한 나무 한 그루요. 한 그루 나무에서 두 가지가 뻗어나와 서로 마주보듯 서 있거든요. 저는 가끔 그 사이에 좋아하는 책을 두고 사진을 찍기도 했어요. 책을 올려두기에 너무나도 아름다운 자리 아닌가요. 누군가 일부러 비밀스레 마련해 둔 자리인 것처럼요.
민정의 하노이 집 창밖에 망고나무가 자라듯, 4층 우리집 창문 너머로는 커다란 살구나무가 살고 있었어요. 봄이면 연두빛 잎사귀가 돋아나고, 4월이면 은은한 분홍빛 꽃들이 환하게 피어나는 나무였지요. 이맘 때면 노을빛처럼 화사한 빛깔로 잘 익은 살구가 툭툭 떨어져 굴러다니거나, 뭉개지거나, 때론 발에 밟히기도 했어요. 하지만...
지난 3월 살구 꽃봉오리가 막 맺히던 즈음 우리 동 10층에 사는 사람들이 이사를 했어요. 짐을 옮기는 과정에서 얇은 천 한 장이 떨어져 살구나무 우듬지에 걸린 거예요. 이삿짐 센터 직원이 우리집에 찾아와 긴 막대기로 천을 떨어뜨려줄 수 있겟느냐고 부탁했지요. 누군가 아래에서 나무 기둥을 흔들고, 남편은 창밖으로 길게 팔을 뻗어 걸레자루로 천을 떨구었어요.
그러고는 열흘쯤 지나 외출했다가 돌아왔는데, 화단이 휑한 거예요. 살구나무가 보이지 않았어요. 아침만 해도 씩씩하게 자라고 있던 살구나무가요. 알고보니 관리사무소에서 단지 내 나무들을 전부 가지치기 하면서 살구나무는 아예 베어버린 거였어요. (무슨 나무인지 알아보지도 못하게 무지막지한 방식으로 가지치기 하는 것도 참 보기 싫지 않나요.) 단지 이사를 할 때 불편을 줄 수도 있다는 이유로 말이죠.
그렇게, 우리 살구나무가 사라졌어요.
우리 살구나무의 진짜 아름다움은, 살구가 다 떨어지고 장마가 시작되는 이맘 때쯤부터 제대로 느낄 수 있었어요. 잎사귀를 무성히 매단 초록색 얼굴이 4층까지 불쑥 자라, 베란다 한쪽에 공중 화단을 만들어 주었거든요. 비가 오는 날이면, 저는 빗물이 들이치는 것도 아랑곳 않고 창문을 열어두곤 했어요. 초록색 이파리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려구요. 그 청량한 소리를 듣고 있으면, 장마철 눅눅하고 후텁지근한 공기도 그런대로 견딜만 했거든요.
바람 부는 날은 또 어떻구요. 착한 초록 잎사귀들이 바람을 따라 차르르 차르르, 파도를 타는 소리가 베란다 안까지 가득 흘러들어왔어요.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대숲이 바람에 솨솨 흔들리던 장면, 민정도 기억하나요? 저는 그 장면이 너무 좋아서, 비디오 테이프로 몇 번이나 되감아 보곤 했거든요. 비록 영화 속 대숲은 아니었지만, 살구나무를 따라 우리집 베란다에서 초록 파도가 넘실대는 게 저는 마냥 좋았어요.
이렇게 민정에게 우리 살구나무 이야기를 적다 보니, 오직 살구나무가 알려주는 계절이 우리집 앞을 오고 갔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10년 전 이 집으로 처음 이사왔을 땐, 이 동네도, 이 집도 답답하기만 하고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어요. 어느 날 문득, 살구나무가 우리집 창문을 두드린 이후로, 조금씩 이 집에 정이 들었던 것 같아요.
민정이 그 집에 살고 싶게 만들었던 이팝나무, 그것도 한 그루가 아니라 인간의 어리석음 때문에 무려 세 그루나 잘려나간 자리를 보며 눈물 흘렸던 민정의 마음을, 그래서 저는 너무나도 잘 알 것 같아요. 나무를 잃는다는 건, 어떤 시절을 뭉텅 뭉텅 베어내는 일과 같다는 걸요. 그래서 민정이 적어준 "아는 나무가 있고 없고는 살아가는 데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문장에 저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어요.
저는 아마도, 잃어버린 살구나무를 오래도록 마음에 품으며 살아가게 될 것 같아요. 곧 이 동네를 떠나게 되겠지만, 이곳은 저에게 우리 살구나무로 기억되겠지요.
얼마 전, 이사갈 집을 계약하고 왔어요. 처음 가 보는 동네였지만, 그곳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집 뒤로 자그마한 산이 있었거든요. 아직 그 산에 올라가보지는 않았지만, 하루하루 산책을 하다 보면 낯선 그곳에 정을 붙이고 살아가게 해 줄 나무들을 만나게 되겠지요. 민정이 저를 만나러 바다가 가까운 그곳으로 찾아오는 날, 저의 새로운 친구 나무를 민정에게도 소개할 수 있도록 부지런히 산책하며 지낼게요.
문득 생각해 보니, 반달서림이 저에겐 한 그루 다정한 나무였어요. 책 냄새 가득하고, 좋은 사람들이 드나들던 그곳에서 참 즐거웠어요. 지난 21개월 동안 제가 예쁜 나무에 기대어 지낼 수 있도록, 기꺼이 자리를 내어주어서 고마웠어요. 앞으로도 반달서림이 튼튼하게 잘 자라기를, 언제나 기도할게요.
우리, 또 만나요.
민정에게 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