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과 안경집

by 강효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휴일 저녁, 식사 준비를 할 때면 습관처럼 틀어놓는 프로그램이 무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문득, 화면의 자막 글씨가 흐릿해 보였다.


시력이 더 나빠졌나, 생각하다가 안경을 맞춘 지 어느덧 4년이나 지났음을 깨달았다. 성인이 된 이후로는 필요할 때만 써오다 보니 시력 변화에 둔감한 편이었다. 영화를 보거나 노트북 작업을 할 때가 아니면 안경은 책상 한구석에 처박혀 있기 일쑤였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갈 때면 안경집에 안경을 따로 챙겼다. 안경 쓰는 게 귀찮아서 안경을 챙겨 다니는 번거로움을 감수하며 지내왔다.


안경을 새로 맞춰야겠다 싶어 집 앞 안경점에 갔다. 검사를 하면서 몇 가지 질문을 던지던 안경사 선생님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평상시에 안경을 안 쓰고 다니세요? 썼다 벗었다 하면 눈이 더 피로할 텐데...“


3초 정도 정적이 흘렀다. 나도 모르게 말문이 막혔다. 안경이 코를 무겁게 누르는 느낌이 싫어서, 선명하지 않은 게 그리 불편하지 않아서… 이런저런 이유를 주섬주섬 주억이다 보니, 평소엔 당연하게 여겨지던 이유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왜 안경을 쓰지 않고 다녔던가.



엄마 손에 이끌려 안과에 처음 갔던 건 열두 살, 6학년 봄이었다. 학교에서 받은 신체검사에서, 시력이 많이 나빠졌으니 안과에 가 보라는 결과가 나왔다. 사방이 차갑도록 온통 하얗던 병원에서 흰 가운을 입은 선생님을 따라 검사표를 마주했다. 위에서 아래로 글자가 점점 작아질수록, 또렷하던 검은색 기호들은 내 시야에서 흐릿하게 번졌다. 보이지 않는다고 고개를 저을 때마다, 곁에서 지켜보던 엄마의 안타까운 목소리는 커져 갔다.


"안 보여? 저게 왜 안 보여? 5잖아, 5!"


안경을 써야 할 만큼 내 눈이 나빠졌다는 사실에 엄마는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날 나는 처음 안경을 쓰고서 펑펑 울었다. 전부 내 잘못인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교실에 들어서자, 나를 본 친구들의 놀라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날아왔다. 이상해, 얼굴이 달라졌네, 똑똑해 보이려고 쓴 거야… 친구들의 목소리가 소나기처럼 렌즈 위로 쏟아졌다. 순간, 안경을 썼는데도 눈앞이 뿌옇게 보였다. 마치 폭우가 쏟아지는 고속도로에서 대형 트럭이 웅덩이를 지나며 내 차창으로 커다란 물을 쏟았을 때처럼.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안경을 쓴다는 것은 이렇게나 생경한 일이구나. 다시 눈을 떠보니 나는 홀로 교실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었다.


안경을 썼던 담임 선생님은 의기소침해진 마음을 담은 내 일기장에 이렇게 적어주었다.


"나처럼 안경을 쓴 동지가 생겨서 기쁘구나."


그 문장을 읽자 잠깐 친구들의 목소리가 멀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번 렌즈에 묻은 흔적은 잘 닦이지 않았다. 자라는 내내, 안경 쓴 내 얼굴에는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가방에 생리대나 핸드크림, 립스틱과 함께 안경집을 챙기는 일이 자연스러워진 것은. 나는 필요할 때만 안경을 꺼내 쓰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안경을 찾아 쓰는 순간들을 떠올려보면, 안경보다 안경집이 더 요긴한 물건이라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어쩌면 나는 안경을 쓰면서 안경 벗는 법을 배워온 것인지도 몰랐다.


입술보호제 말고는 화장에 대해 알지 못했던 대학 신입생 시절, 어리숙한 모습으로 과사무실에 들어섰을 때였다. 아이섀도와 마스카라를 정성스레 한 뽀얀 얼굴의 선배 언니가 짙은 보랏빛 립스틱을 바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언니는 화장을 해 주겠다고 했다. 내가 안경을 벗었을 때, 언니가 중얼거렸다.


"안경 벗으니까 예쁘네!“


짙은 가을 낙엽 빛으로 눈썹을 칠하고 긴 눈매를 따라 아이라인을 그렸다. 분홍색 반짝이가 섞인 립스틱을 바르고 난 언니는 작게 감탄사를 내뱉으며 내게 거울을 내밀었다. 알록달록한 빛깔들로 낯설어진 얼굴이 보였다. 내가 다시 안경을 썼을 때, 언니는 화장이 가려진다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언니가 나를 위해 해 준 화장을 내가 망치는 것 같아 미안했다. 내 수중에 안경집이 없다는 게 처음으로 안타까웠다.


안경을 쓰지 않아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점차 자연스러워진 화장에 사람들은 어느새 익숙해졌다. 안경을 벗은 내가 더 나인 것 같았다. 안경집을 챙기는 작은 수고만 더하면 그뿐이었다.



이번에 새로 맞춘 안경이 담긴 안경집을 챙겨서 도서관에 갔다. 그림책 서가를 서성이다가 이마가 벗겨진 할아버지가 하얀 안경테 위에 손녀를 태우고 먼 곳을 내려다보는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할아버지의 안경>이라는 아르헨티나 그림책이었다.


할아버지에게는 세 개의 안경이 있었다. ”멀리 세상은 별일 없는지“ 지켜보는 안경. 중요한 일을 자세히 보는 작은 안경. "달처럼 동그랗고 예쁜 안경"은 "노랗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는 안경, 그래서 흘러가는 "시간을 담는 안경"이란다. 손녀의 질문에 대답해주는 할아버지의 다정한 목소리가, 꾸밈없는 나무를 닮은 투박한 그림을 통해 들려왔다.


내가 쓴 안경에 가만히 손을 가져갔다. 은테의 매끈한 촉감이 만져졌다. 나는 안경 너머로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 무엇을 보지 않으려 안경을 자꾸만 벗었을까.


며칠 전, 처음으로 안경을 쓰고 온라인 독서 모임에 참석했다. 나는 오래전부터 안경을 써 왔는데, 책벗들은 나의 안경 쓴 모습을 새로워했다. 흐릿하던 책벗들의 얼굴이 렌즈를 통해 선명하게 보였다. 그들의 웃음도, 골똘히 생각에 잠긴 눈빛도. 그것만으로도 화면 속 그들이 바투 다가온 듯 느껴졌다.


모임을 마치고 안경을 벗었다. 흠집이 나지 않게 보드라운 안경 닦이에 감싸 안경집에 넣고 나니, 세상이 다시 흐릿해졌다. 오랫동안 익숙했고, 앞으로도 언제든 드나들 수 있는 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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