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츠를 신고 등산을 하면
내가 날마다 산에 오르는 사람이 될 줄은 나도 몰랐다. 등산을 하느니 출근하는 게 무조건 낫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바로 나였으니까.
그런 생각으로 살고 있던 어떤 날, 선배 언니가 함께 등산을 하자고 했다. 청계산은 오르기 그리 어렵지 않으니 나처럼 등산 안 해본 사람도 제법 수월할 거라고 했다. 산에서 내려오면 맛있는 삼겹살 맛집도 있다고 했다. 삼겹살이라니! 이건 등산 약속이 아니라 좋아하는 선배 언니랑 삼겹살 먹을 약속이니 무조건 가야지!
그땐 등산이 뭔지, 산을 오르는 일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끊임없이 비탈진 길을 끝까지 올라 정상까지 간다는 것은 내 상상력 밖의 일이었으므로. 그렇게 힘들게 올라놓고 허무하게 내려오는 일을 굳이 왜 하는 것인지 나는 그닥 궁금하지 않았으므로. 그러니 언니와 등산을 한다는 건 그저 공원을 걷듯 산책을 하는 일일 거라고 내맘대로 생각해버렸다.
청바지에 부츠를 신고 약속장소로 나갔다. T.P.O인지 T.O.P인지 아직도 헷갈리지만, 내 나름대로는 장소와 상황에 맞도록 신경쓴 차림이었다. 부츠는 3센티미터짜리 높지 않은 굽이라서 편안한 착화감에 버클 장식이 달려서 마냥 얌전하지만은 않은 디자인으로 내가 좋아하는 신발이었다. 스판이 들어간 신축성 있는 청바지는 또 얼마나 현명한 선택이었는지. 그 차림이 등산에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당당히 나섰던 그날의 내 모습이란. 지금 생각하면 용감함이란 이렇게도 만들어지는구나 싶다.
등산로 입구에서 나를 만난 언니는 조금 걱정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게 뭐 어때서. 대책없는 용감함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럭저럭 걸을 만했다. 초겨울이라 꽤 쌀쌀한 날씨였는데 산을 걷기 시작하니 몸에서 열이 나면서 춥지 않아 꽤 괜찮은 것도 같았다. 얼마 걷지 않아 역시나 나는 다리가 아파왔고 배도 고팠다. 언니는 그럴 줄 알고 김밥을 준비해 왔다고 했다. 산길에 놓인 벤치에 앉아 김밥을 먹으니 어찌나 꿀맛이던지. 이 맛에 산을 오르는구나. 등산을 하는 중요한 이유 한 가지는 알게 된 것 같았다. 언니가 준비해 온 음료수까지 마시고 나니 내가 산에서 해야할 일은 모두 마친 기분이었다. 이 정도면 훌륭한 산책이었지.
그런 내 마음과 달리 언니는 등산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언니의 뒤를 따라 다시 시작된 산행. 배도 부르고 다리는 점점 무거워졌다.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는 것도 만만치 않았지만, 내리막길에서 굽이 있는 부츠로 발을 내딛는 건 상당히 불편한 일이었다. 게다가 바위라도 나타나면 작은 부츠 뒷굽이 딱딱하게 부딪혀 발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불어오는 겨울 바람에 발가락이 다 얼 것만 같았다.
'이제 내려가도 되지 않나...'
산을 오르는 내내 투덜투덜, 온갖 불평불만으로 징징거리던 나를 본 언니는 안 되겠던지 결국 중도에 산을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언니는 참 현명하다.) 그렇게 다시 내려가는 길은 어찌나 발걸음이 가볍던지. 올라갈 때와는 달리 나의 부츠는 산길을 막힘없이 밟고 있었다. ("내 부츠가 이렇게 훌륭하다!!!")
이른 점심 시간, 삼겹살집은 따뜻했다. 추운 겨울 산 공기보다 삼겹살 집의 고소한 공기가 더 상쾌했다. 노릇노릇 구운 삼겹살에 맥주를 들이켜자 천국이 따로 없었다. 이제야 내 얼굴에 화색이 돈다며 해사하게 웃던 언니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렇게 미소짓던 언니는 아주 오랫동안 내게 다시는 산에 가자고 말하지 않았다.
얼마 전 바로 그 선배 언니와 다시 청계산에서 만났다. 나는 이제 산을 제법 좋아하고, 등산을 즐기는 사람이 되었으니 우리는 꽤 어울리는 약속을 잡은 것이다.
"너 오늘은 부츠 안 신었네?"
언니의 한 마디에 새삼스런 부끄러움을 느끼며 등산로를 올랐다. 편안한 차림에 편안한 등산화를 신고 발걸음도 가볍게 산에 오르는 내 모습을 언니는 신기하게 쳐다봤다. 가장 쉬운 코스이기는 했지만, 2시간도 안 걸려 매봉 정상까지 오른 내 모습에는 슬쩍 감격하는 눈치였다. 마치 볕도 안드는 동굴에서 100일간 마늘과 쑥만 먹고 지내다가 마침내 인간이 된 웅녀를 보는 눈빛이었달까. (나는 드디어 진정한 인간이 되었군.)
산을 내려오는 동안에도 언니는 그날의 부츠 이야기를 주억이며 깔깔 웃었다. 초록이 가득한 산길을 따라 오래 전 추억이 부츠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