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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미 Jul 06. 2020

별 얘기를 다 합니다.

늪에서 울지 않고 걸어 나오기

그 정도면 충분했다. 반 지하 단칸방 월세 집으로 출발해서 나름 꾸준히, 한 눈 팔지 않고 지내, 결혼 12년 만에 방 세 칸짜리 아파트를 갖게 되었으니. 은행 대출이 있기는 했지만, 온전히 내 돈만으로 집을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은 맘에 내 이름으로 문패 단 월세집이라는 다소 냉소적인 농담도 위로로 여겼다. 욕실과 부엌을 고치고 평생 살기라도 할 듯 안방엔 붙박이장을 들였다. 그러면서도 소파는 거실 크기에 비해 몸집이 큰 걸 두었다. 적어도 십 년은 쓸 테니 더 큰 집으로 이사 가게 되면 적당한 크기일 거라는, 앞뒤 맞지 않는 ‘빅 픽처’를 그린 셈이다. 반상회에도 참석했다. 이젠 세입자가 아니라 집주인이니까. 지금도 그런 모임을 여는지 모르겠다. 1층 입구 게시판에서 공고를 보지 못했으니 없어진 모양이다. 군사정권 시절 통제와 감독의 수단으로 쓰였을 테지만,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리는 이웃끼리 서로 얼굴 보고 차 한 잔 나눌 기회가 되기도 했다. 곤란한 문제나 건의사항을 얘기하는 마을공동체의 성격을 띠는 긍정적 효과가 있기도 했지만 더러 집값 담합을 하는 치사한 합의(?)가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제일 갖고 싶어 하는 아파트는 몇 평일까? 30평도, 50평도 아닌, 옆 집 보다 한 평 큰 집이란다. 비교의식의 끝판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한 표정으로 웃고 말았다. 내가 그 사례가 될 거라곤 생각조차 못했다. 돌아보니, 속내를 들켜 피식 웃고 만 거였다는 걸 알겠다. 결혼 후 처음 내 집이 생겼다는 기쁨도 서서히 흐려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더 넓은 집으로 옮기도 싶다는 바람이 고개를 들었다. 살고 있던 집이 세상 답답하게 느껴졌다. 뜬금없이 서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생겼다. 재택근무를 하는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책이 십만 권쯤 있어서 서가를 따로 둬야 할 상황도 아니었다. 핑계는 그럴듯해 보였지만, 그저 욕심에 불과했다. 수입이 적지 않은 시기였다는 사실도 내 허세를 부풀리는데 한몫했을 거다. 여유가 있으면 빌린 돈부터 갚는 게 당연한데, 집 담보 대출은 으레 있는 지출이려니 했다. 대출을 더 받아 더 큰 집으로 옮겨 가도 감당할 수 있을 거라 착각했다. 기고만장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인 걸 그때는 몰랐다. 언제까지나 ‘지금’ 같을 줄 알았던 거다. 한 동네 살던 손위 동서에 대한 시샘이 욕심에 부채질을 했음도 시인한다. 내 형편과 별반 다름없어 보이는 큰집은 말 그대로 ‘큰' 집에 살고 있었다. 당시 붐이 일기 시작한 김치냉장고와 가정용 정수기, 외국 브랜드의 대형 TV를 갖춘 살림살이였다. 게다가 손위 동서는 나처럼 낡아서 외출용으론 입을 수 없는 목 늘어나고 무릎 나온 ‘아무거나’가 아닌, ‘실내용 투피스’를 입고 지냈다.   

  

그러저러한 모든 핑계들이 더 큰 집에 살겠다는 무모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데 힘을 보탰고, 결국 그렇게 되었다. 당시엔 갑자기 아파트 값이 폭등하던 시기였다. 자고 나면 천만 원씩 값이 치솟았다. 30평대가 천만 원 오를 때, 50평대는 삼천만 원이 오르는 식이었다. 더 오르기 전에 하루빨리 사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한 번 알아나 보자고 중개소에 발을 들여놓던 그 순간은 내 인생 후회 목록 첫 번째 순위다(앞으로 또 다른 어떤 사건이 그 자리를 차지할 런지는 모르겠으나). 중개인은 먹이를 발견한 승냥이처럼 나를 끌어당겨 매물을 보여주더니, 연일 꼬드기기 시작했다. 살고 있는 집이 팔린 것도 아닌데 살 집부터 덜컥 계약할 수 없다며 머뭇거리는 내게, ‘요즘 같은 시기에 지금 사는 집은 하루 이틀이면 무조건 거래가 된다, 책임지고 팔아 주마, 며칠 지나면 지금보다 더 오른다’는 둥 욕심에 눈먼 나를 다급하게 만들었다. 덜컥 계약을 했다. 살던 집이 팔리기도 전에 대출을 잔뜩 받아서.  

    



열흘쯤 지났을까, 거래가 줄어드는가 싶더니 덩달아 집값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입주 날짜는 다가오는데 살고 있는 집을 보러 오는 사람은 없었다. 이사 갈 집은 말끔하게 수리가 끝난 채로 비어 있었다. 은행 대출이자 날짜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매달 돌아왔고, 나는 부동산 중개소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빨리 집을 팔아 달라고 중개인을 닦달했다. 중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누군가 집을(그것도 내 집을) 사러 오길 기다리는 게 전부였다(그 중개인은 내 경우처럼 매매를 부추겨 여럿을 곤경에 빠뜨렸다고 한다, 얼마 뒤 중개소 문을 닫더니 자취를 감췄다). 불안과 초조함으로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고, 코미디 프로는 뉴스보다 별로였다. 내가 무슨 일을 벌인 건지 하나둘씩 알아갈 때마다 나도 몰랐던 나의 ‘척’이 있는 대로 까발려져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경험이나 교훈 같은 점잖은 표현이 오히려 부끄러운 시간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살던 집을 팔았다. 처음에 내놓은 시세보다 어마어마하게 낮은 가격이었다. 차액은 고스란히 빚이 되었다. 바라던 대로 서재가 생겼다. 그럴듯한 책상과 책장도 생겼다. 책은 잘 읽히지 않았다. 매달 내야 하는 대출이자가 버거웠고, 결국은 ‘그’ 늪에 빠지고 말았다. 카드 돌려막기. 겪어본 사람만 안다. 늪이다. 로또에 당첨이라도 되면 모를까, 헤어 나올 수 없다. 나는 로또를 사지 않았고 그러니 당첨될 일도 없었다. 이사한 새 집을 싸게라도 팔자하는 심정에 매물로 내놨지만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간 부동산 시장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절벽 위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우리는 결국 손을 놓아버렸다. 빈손으로 그 멋진 ‘큰 집’을 떠났다. 남편은 신용불량자가 되어 개인회생절차를 진행 중이었고, 내게는 ‘사전 채무조정’이라는, 그보다는 조금 덜 심각한(?) 채무자 딱지가 붙었다.     




비록 빈손이었지만 빚이 없어지고 나니 우선은 그것만으로도 살 것 같았다. 신혼 때보다 더 가난해졌으나, ‘아직 젊고 일할 수 있으니 힘내자’고 우리 부부는 서로 마주 보았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은 이미 백만 번 이상 했다. 그 생각에 매달려 있었다면 지금쯤 최소한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거나 아니면 강원 랜드를 기웃거리는 부랑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라면 다른 세상에 가 있을 런지도… 

 

그 일이 있은 지 십여 년이 지났다. 형편이 다시 회복되었는가 하면 아직 아니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최대의 자산인 ‘꾸준함’을 무기로 살고 있다. 가족이 있었다. 아무도 내게 탓을 하지 않았다. 암흑 같던 시간에도 우리는 생일 파티를 했고, 결혼기념일을 챙겼다. 제주도로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수시로 외식을 할 형편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치킨 배달 정도는 사치가 아님도 안다. 


집을 팔아달라고 동네 중개소마다 찾아가 징징대던 무렵, 한 중개인의 이야기가 아직 또렷하다.

“사모님, 저도 그 경험 있어요. 중개사는 부동산에 대해 잘 아니까 그런 실수 안 할 거 같죠? 아니에요, 아니까 실수하기가 더 쉽더라구요. 그런데요, 젊어 저지른 돈 실수는 어느 정도 만회가 되지만, 나이 들어 저지른 돈 실수는 회복하기가 어렵더라구요. 저도 무척 애 먹고 있는 중입니다.”


백 번 지당하신 말씀이다. 가랑이가 찢어질 정도로 대출을 받으면서, 우리의 경제 능력이 ‘늘’ ‘이 정도’는 될 거라고 막연히 예상했다. 심지어 더 나아질 거라고 기대하기까지 했다. 근거는 없었다. 뻔한 얘기지만 욕심이 욕심인지 모르고 마음이 급해지면 그게 뭐든 이성(理性)이나 합리(合理)는 자취를 감춘다. 실제 그런 경험을 하고 나면 그동안 머릿속에 쌓아 둔 지식이나 상식 따위는 눈먼 욕심 앞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걸 온몸으로 깨닫게 된다.        


결혼을 하면 행복해지는 줄 알았다(결혼해서 불행하다는 뜻이 아님). 아이가 생기면 완벽해지는 줄, 집을 사면 더 이상의 바람은 없을 줄 알았다. 그러면 ‘내가’ 행복한 거라고 믿었다. 아니었다. 배우자도 아이도, 내 이름 적힌 등기부등본을 갖는 일도, 그 어느 것도 내게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소용없다는 뜻이 아니다. 가족이 없었다면 인생에서 아주 많은 부분이 달라졌을 거다.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배우자와 토끼 같은 자식, 그림 같은 집이 생겨도 뭔가 빠진 듯해서 궁극의 ‘그분’에게 기댈 요량으로 세례도 받았다. 의지할 절대자가 있다는 건 분명 도움이 된다. 그것뿐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백성’은 ‘그분’조차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저 바라보는 수밖에. 지금은 성당이 아닌 내 ‘안’에 계신 ‘그분’을 만나는 ‘무늬만 신자’ 노릇을 하고 있다.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아니, ‘나를 사랑한다’는 게 뭔지 몰랐다. ‘나’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인생을 어떻게 살고 싶은지 ‘내게’ 물어보지 않았다. 간절하게 바라는 게 뭔지 골똘히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가진 것, 누리는 것이 곧 ‘나’인 줄 알았던 게다. 나의 사랑을 받는 ‘나’만이 다른 것들을 제대로 알 수 있다. 나를 사랑하는 일이 빠져 있어서 ‘바깥’의 조건들에 집착했다. 결혼이나 아이, 재산 모두 바깥의 조건이다. 안으로부터의 만족과 자존감은 바깥의 것들로 채워지지 않는다. 스스로가 자신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걸 배우느라 너무 비싼 ‘인생 수업료’를 치렀다.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오롯이 나의 일상이고 누가 볼 일도 없으니 내키는 대로 썼다.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처음 일기를 쓰기 시작했을 무렵엔 반성문과 결의문의 반복이었다. 몇 번은 괜찮아도, 그런 내용이 이어지니 죄책감이 생기기도 하고 스스로가 하잘 것 없이 여겨졌다. 이건 아니다 싶어 내가 나를 쓰다듬는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위로도 하고, 칭찬도 하고 푸념도 해가며, 일과를 늘어놓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책 이야기도 쓰고, 시사평론(?)도 하고… 그러다 어느 순간인가 내가 참 열심히 살아왔다는, 고단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쓰럽고 기특했다. 사는 속내를 글로 옮기는 시간은 소중하다. 나를 사랑하는 내가 되기 위해. ‘쓰는’ 일은 ‘낫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으며 그들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실수하고, 무너지기도 하며, 상처 난 무릎으로 다시 딛고 일어서는 모습을 봤다. 누군지도 모르는 이로부터 받는 위로는 경계 없이 받아들여진다. 돌이킬 수 없는 실패를 저질렀다는 죄책감과 수치심에서 벗어나도록 손을 내미는 듯했다. 꼭 내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 글을 읽을 때는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잘못된 선택을 한 거지, 실패한 인생이 돼버린 건 아니구나.’하는 안도가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야기를 풀어놓은 이가 고마웠다. ‘내 이야기도 누군가에게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글로 만나면서 서로에게 힘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서투르고 어설프지만 함께 나누고 싶었다. 시간을, 삶을 공유하는.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읽는 이를 예상하며 쓰는 글은 많이 다르다. 무엇보다 막(?) 쓰게 되지 않는다. 좀 더 쉽고 편하게(편한 내용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읽히도록 글을 다듬게 된다. 내 생각과 태도를 바짝 들여다보게 된다. 그러는 동안 저절로 글이(내가) 객관화된다. 푹 파묻혀 허우적거리던 늪에서 빠져나와 한 발짝 떨어져 나와 내 상황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낫는’ 과정이다. 어떤 상처였든지. 또렷한 징후가 있는 건 아니지만 낫는 중이라는 걸 어느 틈엔가 저절로 안다. 행복해진다. 그러니, 아무리 엉덩이가 배기고 손가락이 저려 와도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글을 쓰는 내가 사랑스럽다.     




 “제 때 안 풀린 인생 많다. 억울한 감옥살이, 지혜 없이 방황한 시간,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망친 경우, 의미 없는 인간관계에 집착했던 시간, 한창 일할 나이에 찾아온 질병…”

-정희진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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