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대와 애정은 한 끗 차이
세 번째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거듭될수록 불편함이 더 크게 다가온다. 은퇴를 한 건지, 일하는 시간이 자유로운 건지는 알 수 없다. 6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남자다. 얼굴엔 짜증이 잔뜩 묻어 있다. 평상복 차림으로 뒷짐을 진 채 걷는 남자 뒤로 중형 견 두 마리가 따라오고 있다. 목줄을 하고 있지 않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하고 있기는 하다. 지들끼리. 뒷짐 진 남자는 빈손으로 터덜터덜 걷고 있고, 뒤를 따라오는 강아지(인지 성견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두 마리는 서로 50cm 정도 길이의 체인으로 연결되어 있다. 걸을 때마다 둘의 어깨가 스칠 정도로 가깝다.
그런 모습을 처음 봤을 때 무척 놀랐다. 두 마리를 동시에 산책시키는 기발한 방법일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금방 사라졌다. 한 마리가 나무기둥에 소변을 보는 동안 다른 한 마리가 (어쩔 수 없이) 바로 옆에 붙어 서서 멀뚱멀뚱 주위를 둘러보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일심동체? 우애? 뭐라고 부를 수도 없는 장면이다. 어깨를 부딪쳐가며 같은 속도와 방향으로 나란히 걷는 강아지 산책. 초등학교 운동회의 단골 종목인 ‘이인삼각’ 달리기가 떠올랐다. 큰 소리로 구령을 맞춰가며 달려야 하는 경주다. 혹여 박자가 맞지 않으면 넘어지기 일쑤인 데다 한 명이 넘어지면 다른 한 명도 덩달아 넘어지게 되는 ‘공동 운명’의 시합이다. 협동심과 성취감을 고양시키려는 의도이겠으나 결말은 종종 ‘네 탓’으로 끝나고 만다.
강아지들을 서로 바짝 묶어 산책시키는 그 남자도 나름 고안을 한 것일 거라 짐작한다. 두 마리를 따로따로 산책시키자니, 사정이 여의치 않았을 수도 있고, 각자 목줄을 해서 데리고 다니자니 통제가 힘들었을 수도 있다. 같이 묶여 있으면 혼자서 맘대로 돌아다닐 수 없고, 제멋대로 달리거나 산책 방향을 바꾸는 것도 할 수 없다. 둘이 서로 귓속말로 작당을 해서(붙어있어 가능하다) 행인을 향해 이를 드러낸 채 돌진한다든가 하는 일은 어려울 거다. 힘들이지 않고 두 마리를 동시에 산책시킬 기막힌 방법이라 여겼는지도 모른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강아지들은 일정한 속도로, 벗어남 없이, 목줄 없이도 남자의 뒤를 따라 걷는다. 익숙해진 모습니다. 서너 걸음 앞서 걷는 그는 뒷짐을 지고 (내보기에) 보란 듯이 나아간다. 어디 사는 사람인지도 모르고 그런 상태의 산책이 얼마 동안이나 이어지는지도 알 수 없다. 지난번에도, 그리고 이번에도 길에서 스친 게 전부다. 대단지 아파트 동네니 실내에서 기르겠지만 강아지들은 그런 방식의 산책이 행복할까? 묶여 산책하는 그 강아지들을 보면서 나는 왜 언짢고 불편한 마음을 지나치기 힘든 걸까?
컴퓨터를 켜고 ‘강아지 두 마리 산책’이란 키워드로 폭풍 검색을 했다. 혹시라도 내가 잘못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좋은 방법인데 나 혼자만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본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역시나 두 마리를 동시에 산책시키는 일이 만만치 않음을 알려주는 내용이 쏟아졌다. 고생(?)을 덜 갖가지 방법도 소개되어 있었다. 여러 글을 훑어 가던 중, 강아지 훈련사라고 밝히는 이들과 견주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한 ‘산책의 목적’이 눈에 들어왔다. 강아지 산책은 운동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운동이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그건 부수적 효과일 뿐이란다. 밖에서 살아야 하는 개들이 실내에서만 생활하다 보니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산책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시간이라는 거다. 자유롭게 걷고 냄새 맡고, 배변활동도 편안하게 하고 다른 강아지들과 접촉하면서 사회성도 키우는 아주 중요한 시간이라고, 포털 사이트에 글을 실은 이들이 한결같이 말하고 있었다.
토리가 우리와 지낸 지 만 삼 년째다. 복숭아 수확이 한창인 충청도 한 농원에서 꼬물거리며 제 어미 뒤를 따라다니던 웰시 코기 강아지를 품에 안아 데려왔다. 나는 새끼들에게 젖 물리느라 빼빼 마른 어미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사랑으로 잘 키울게. 낳아줘 고마워.”
사람이든 동물이든 새끼를 낳는다는 건 제 목숨을 거는 일이라는 거창한(?) 깨달음이 있던 순간으로 기억한다. 갑자기 낯선 사람과 낯선 환경에 놓인 강아지 토리는 예상외로 첫날부터 활발하게 잘 지냈다. 사방에 배변을 하는가 하면, 거실 한 복판에 벌렁 드러누워 잠이 들기도 했다. 우리 식구는 토리의 그런 모습에 홀딱 반했다. 달력에 예방접종 날짜를 표시해 두고 주말이면 목욕을 시켜가며 애지중지했다. 이제는 성견이 되어 전형적인 코기종의 외모가 되었고, 특성대로 활달하고 에너지가 넘친다.
매일 아침 토리 산책은 남편의 몫이다. 그래서 그런지, 산책시간이 다가오면 안방 문 앞에 엎드려있다. 어서 나가자는 시위(?)인 셈이다. 원하는 걸 분명하게 표현하는 태도는 본받아야 한다. 목줄을 하고 현관을 나서는 순간, 토리의 태도는 백팔십도 바뀐다. 집안에서는 조용하고 활동도 크지 않은데, 밖에만 나가면 두 귀가 쫑긋해지고 발걸음이 경쾌하다. 행복하다는 걸 온몸으로 발산하는 토리의 모습 때문에라도 하루 종일 비가 내리지 않는 이상, 꼭 산책을 나간다. 때로는 숙제처럼 느껴지더라도. 비가 오거나 식구들 모두 사정이 있어 산책을 하지 못한 날의 토리는 우울을 뚝뚝 흘리며 돌아다닌다. 한참 동안 창밖만 바라보거나, 식구들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밥도 잘 먹지 않는다. 심지어 변도 안 본다. 이런 지경이다 보니 며칠 전엔 비가 그친 밤 열두 시에 남편이 산책을 시키고 들어오기까지 했다. 그날 밤, 산책에서 돌아온 토리는 밥그릇을 싹 비우더니 소파 위로 껑충 뛰어올라 예의 그 편안한 ‘벌러덩’ 자세로 아침까지 늘어지게 잤다.
식구들끼리 가끔 토리 이야기를 진지하게 한다. 넓은 마당 곳곳을 신나게 뛰어노는 강아지를 TV에서 봤을 때다.
“우리 집도 마당이 있으면 토리가 하루 종일 신날 텐데.”
“그럼, 매일 목욕시켜야 하는 거 아냐?”
“마당이랑 집을 들락거리면 집안이 엄청 지저분해지겠다.”
“우리 생각만 하고 토리를 데려온 거 같애.”
“토리는 우리랑 사는 게 행복할까?”
“마당 있는 집으로 이사 가자.”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밥을 굶어? 잘 데가 없나? 간식에 유기농 사료에, 이 정도면 호강이야.”
얘기가 오간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생기는 건 아니지만, 우리는 토리랑 더 많이 놀아주기로, 꼬박꼬박 산책을 시키자고 약속하는 것으로 고민을 마무리 짓는다. 반려견의 삶에 대해 더 생각하게 되고 동물과의 교감과 공존에 대해 배우고 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토리를 키우기 전엔 무심히 지나치던 동네 강아지들이 달리 보인다. 저마다 사연이 있고 소중한 존재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수풀 속에 숨어 눈만 반짝이던 길냥이가 이젠 무섭지 않다. 안쓰럽기도 하지만 도시에서 혼자 살아가는 게 대견할 때도 있다. 캣 맘과 캣 대디를 만나면 눈인사라도 보내게 된다. 상가 쇼 윈도에 전시된 갓 난 강아지를 보면 마음이 아프다. 종(種)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들을 봉제인형처럼 만들어내, 늘어놓고 파는 모습에 화가 치민다. 생태계 피라미드의 맨 위를 차지했다고 해서 그 아래 자리의 생물을 지배할 권한을 가진 것은 아니다. 인간은 소유욕과 지배욕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나라고 예외는 아니다. 다만, 내가 인식하는 한 그 욕구에서 벗어나고자 애쓸 뿐이다.
입장 바꿔 생각하면 된다. 자식에게,
“내가 낳아, 먹이고, 입히고, 키우니 내 뜻대로 하라.”
는 주장이 통하던가? 그런 태도는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지름길에 다름 아니다. 굶기지 않고 산책까지 시키니 이만하면 잘하는 거 아니냐고, 사람도 살기 힘든 세상인데 개의 마음까지 헤아려야 하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뭐가 그렇게 다를까 싶을 때가 종종 있다. 강아지와 지내다 보니 알게 됐다. 강아지들은 욕심내지 않는다. 제 먹을 분량 이상을 비축하지도 않는다. 친구를 배신하는 일도 없다. 결정적으로, 지구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 ‘개만도 못하다’는 말은 개에게 ‘무례한’ 표현이다.
누군가에게 애정을 표현할 때는, 내가 선택한 방법이 아니라, 상대가 원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내 맘대로 드러내는 사랑은 때로 폭력이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폭력적인’ 사랑은 상대는 물론 자신까지 파괴하게 된다는 것도. 서로 어깨를 부딪치며 직진 산책을 하던 강아지들을 보며 나는 별다른 뒷배(?) 없는 약한 존재에게 소리 없이 가해지는 폭력을 봤던 모양이다. 그리고 종종 '보호자'가 가장 큰 폭력의 주체가 되기도 한다는 걸 눈 앞에서 확인한 게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요구되거나 내가 감당해야 했던 '그럴 수도 있는' 크고 작은 폭력을 떠올렸나 보다. 그래서 '그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포털사이트 폭풍 검색이며 쏟아내듯 써 내려간 짧은 글 모두가, 알아주는 이 없더라도 실천한(?) '저항'인 셈이다. 소심하게 보여도 내 딴엔 큰 맘먹고 저지른 일이다. '~같다', '~나 보다' 따위의 표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지금은 어쩔 수가 없다. 바닥까지 파고 들려니 글을 이어갈 수가 없다. 차츰 깊이 내려갈 수 있게 되겠지. 지금은 여기까지.
우리 집 강아지 토리에 대한 나의 애정은 어떤 모습일지 들여다본다. 이제 겨우 세 살. 별 탈이 없다면 앞으로도 십 년 이상 함께 지내게 될 거다. 개와 지내면서 조금씩 더 ‘인간’이 되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