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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미 Jun 23. 2020

엄마의 소풍이 끝나갑니다

 “집 가까운 데로 좀 찾아봐줘요, 퇴근하면서 들르기 쉽게.”

휴대폰 너머로 당부하는 동생의 말에 그러마고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사나흘을 잊고 지내다 재촉하는 전화를 받고서야 컴퓨터를 켰습니다. 찾으려는 지역의 이름을 입력하자, 해진 뒤 캄캄해진 동네 하늘 위로 우후죽순처럼 솟은 붉은 십자가마냥 모니터에 수십 군데의 상호가 떴습니다. 놀랐습니다. 이렇게나 흔한 곳이 되었나 싶었지요. 몇 군데를 골라 관련 정보를 한글 문서로 옮겨 출력한 종이를 들고 동생을 만났습니다. 시설이며 비용은 거기서 거기. 동생은 집에서 걸어서도 갈 만한 곳을 고르더니 한 번 가봐주기를 부탁했습니다.      


“지난해 9월에 오픈했어요. 시설이며 교통이 아주 그만이죠. 선생님도 세 분이나 계시고, 버스로 한 정류장 거리에 대학병원도 있으니 이만한 데도 드물지 않겠어요? 오픈 기념으로 이 달 말까지 할인도 십만 원이나 해드려요!”

출입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상담실’ 실장이라는 이가 책상 앞으로 안내하며 몸에 밴 듯 막힘없이 쏟아냈습니다. 말대로 시설이나 장비는 얼마 되지 않은 티가 났지만, 건물 전체에선 어딘지 모르게 노쇠한 분위기가 느껴졌습니다. 명함과 구비서류 목록을 받아 들고 나오니, 아직 겨울 끝인데도 사월 날씨처럼 화창한 볕에 도리어 눈살이 찌푸려지더군요.     


“근데, 바로 옆이 장례식장이더라. 기분이 좀 그래.”

“노골적이네요. 그래도 뭐, 당신은 잘 모르실 테니… 그냥 거기로 합시다, 누나.”

“그래, 알았어. 주말에 보자.”


이즈음 동생과 수시로 연락하며 만나다 보니 ‘자손들 서로 얼굴 좀 보며 살라고 만든 게 제사’라는, 우스개 아닌 우스개가 생각났습니다. 십여 년 전, ‘무식하고 버릇도 없는 데다 남편을 발톱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는’ 며느리가 싫어 살림을 나눈 엄마는 친구 분이 사는 작은 도시에서 혼자 지내기 시작하셨습니다. 사오 년 동안은 씩씩하게 교회 전도 봉사도 다니고, 이런저런 밑반찬을 싸들고 자식들 집에도 들르곤 하셨지요. ‘혼자 사니 이 꼴 저 꼴 안 보고 내 맘대로 해서 세상 편하다’는 말씀을 집으로 돌아가시며 꼭 하시곤 했습니다. 그때는… 정말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러던 엄마가 이 삼 년 전부터 기운이 부쩍 약해지더니, ‘좀 보러 안 오냐?’는 전화를 수시로 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식들을 원망하는 말씀도 느셨지요. 평소 사이가 데면데면했던 터라, 이런 모습이 불편했습니다. 동생은 한 달에도 몇 번씩 엄마를 보러 가는 모양이었지만, 저는 마지못해 이따금 가는 정도였습니다. 어린 시절, 엄마에게 가해지는 아버지의 폭력 앞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을 딸은 안중에도 없이 ‘두들겨’ 맞고 있는데 그걸 말리지도 않은 ‘인정머리 없는 년’이라고, 당시를 떠올리며 비난하던 분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네 살쯤이었을 거예요. 그 후로도 수시로 “너만 아니면 내가 이렇게 안 살았다.”, “너 때문에 내 인생을 망쳤다.” 등등의 원망과 푸념이 엄마를 보러 갈 때마다 귓속에서 왕왕대는 바람에 다녀온 뒤엔 두통약이며 소화제를 입 속에 털어 넣어야 했습니다.      


“대학병원에 보내줘! 거기 가면 치료할 수 있다구!”

“검사도 다 해 보셨잖아요, 대학병원에서. 입원이 안 된다는 의사 얘기도 직접 들으셨구요.”

“다른 대학병원도 있을 거 아냐! 너넨 내가 이러다가 그냥 콱 죽어버리면 속이 후련하겠구나!”

“엄마, 제발.”     


엄마를 만나고 돌아온 저녁마다 동생과 저는 취하도록 술잔을 부딪치곤 했습니다. 재가 요양사가 정기적으로 들러 돌봐드렸지만, 청소를 대충 한다느니, 제 먹고 싶은 반찬만 한다느니, 심지어 당신 물건을 야금야금 훔쳐간다느니 하며 못마땅해하셨습니다. 하루 세 시간의 간병만으로 부족해지자, 엄마는 동네 재활병원에 입·퇴원을 거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병원이라고는 하지만 앓고 있는 당뇨병 약 처방이나 해주고 식사시중이나 드는 게 전부인 곳입니다.      


“누나, 이번 주에 엄마 보러 가요?”

“아니. 넌 가려고?”

“안 갈 수가 없어요. 거의 매일 새벽마다 전활 해서…”

“그렇구나. 그래, 그럼 같이 가자. 일요일 오전에 집 앞에 도착해서 연락할게, 내려와.”

“네, 그럽시다.”


뇌하수체 종양을 앓고 있는 동생은 시력이 상해서 운전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엄마가 다급한 듯 연락을 할 때마다 택시를 잡아타고 한 시간 여를 달려가야 했지요. 하지만 막상 도착해보면 ‘이젠 좀 낫다’든가 ‘요양사를 바꿔 달라’든가 하는 식이었습니다. 이틀이 머다 하고 ‘언제 오냐’는 성화에, 동생은 사는 곳에서 가까운 병원으로 엄마를 모셔오고 싶어 했습니다.      

“엄마, 이제 우리 집 가까운 병원으로 갈 거예요, 내가 맨날 보러 갈 수 있어.” 

“느이 집으로 간다구? 고맙다!”

“아니… 우리 집 가까이 있는 병원이라구요.”


엄마는 그렇게 당신의 바람과는 다르게 요양병원에 입원하셨습니다. 약이며, 기저귀, 빨대 달린 컵에 휠체어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입원 수속을 하는 내내 동생은 조금 달뜬 듯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새벽 총알택시를 타는 일은 없을 거라는, 여차하면 슬리퍼를 끌고서라도 달려올 수 있는 거리에 엄마가 계시다는 생각에 그런 건가 넘겨짚어 봤지요. 맞벌이를 하는 데다 자신을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는 시어머니를 모실 수 없다는 올케는 동생의 고단함에 고개를 돌린 채 마음이 저만치 떨어져 있었습니다. 입맛이 없다며 여러 날 제대로 드시지 않아 몸을 가누는 일조차 힘에 부쳐하는 엄마를 휠체어에 가까스로 앉혀 병원 문을 여는 순간, ‘훅’하고 끼쳐오던 냄새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은 지 반년도 안 된 건물에서 날 법한 페인트나 기구 냄새가 아닌, 묵은 내. 입덧할 때 속에서 밀고 올라오던 메슥거림 같은. 신축건물의 윤기가 채 가시지 않은 그곳은 마치 삶의 마지막을 지나는 이들이 무덤 체험이라도 하는 장소인 듯 여겨졌습니다.        


“입원하시게 되면 일단 기본 검사는 합니다. 피검사나 뭐 그런 정도지요.”

“아, 네. 그럼 치료는 주로 어떤 식으로 하시나요?”

“뭐 특별한 치료를 한다거나 그러지는 못합니다. 아시다시피 요양병원이다 보니, 말 그대로 요양하시면서 경과를 관찰하는 정도라 보시면 돼요.”

“그렇군요.”

“그래도 의사가 있고 간호사도 있으니 요양원과는 비교가 안 되지요. 한 정거장 가면 큰 병원도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노환이시니.”

“그래도 혹시 무슨 병환이라도 생기면…”

“비 급여 항목 처치가 필요할 땐 보호자 동의가 필요해요. 그런 경우가 생기면 간호사실에서 연락을 드릴 겁니다. 그럼 치료 동의 여부를 알려주시면 돼요.”     


엄마는 406호실에 입원하셨습니다. 병실을 안내하던 간호사가 연락할 땐 병원 대표번호로 전화해서 ‘4’를 누르면 된다고 지나가듯 얘기하더군요. 간병인의 개인번호로는 가급적 연락하지 말아 달라는 말과 함께. 6인실이었습니다. 간병인은 한 명이었고 ‘중국동포’였습니다. 그이는 우리말을 제법 알아들었지만, 우리는 그이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기가 어려웠습니다. 환자들과 의사소통이 제대로 될까 하는 불안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엄마 병상 앞자리에 누운 할머니는 코에 줄이 끼워지고 넓적한 판자 같은 걸 덧댄 두 손엔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제가 신경 쓰였는지, ‘스스로 식사를 할 수 없어 콧줄로 주입하는데 줄을 자꾸 빼려 해서 손을 묶어 둔 거’라고 간병인이 친절하게(?) 알려주더군요. 원치 않아도 먹어야 하는 생의 마지막 시간들. 노년을 대하는 사회의 무례함. 존엄과는 거리가 먼 늙고 병든 몸. 얼마 전 병원에서 동생에게 연락을 했더랍니다. 환자가 식사를 제대로 안 하시니 콧줄을 끼면 어떻겠느냐고. 동생은 혼자서 결정을 못하겠다며 제 의향을 물었습니다. ‘아직 그건 아닌 것 같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동생은 “그쵸?”라며 오히려 제 말에 안도하는 눈치였습니다.     


엄마가 요양병원에 입원한 지 두 달이 지났습니다. 매일 저녁 퇴근길에 엄마를 보러 갈 거라던 동생은, 바이러스 전염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바람에 ‘면역력이 가장 취약한 노인’들이 모인 요양병원은 보호자의 방문‘조차’ 금지해서 발이 묶이고 말았습니다. 물론 저도 마찬가지구요. 휴대폰으로 전해지는 엄마의 목소리는 시간이 갈수록 약해집니다. 제 목소리를 알아듣는 때는 이름을 부르며 언제 오냐, 곧 간다 따위의 대화가 오가기도 하지만, 누군지 몰라 연신 ‘안녕하세요, 네! 감사합니다!’만 반복하는 통화 뒤엔 종일토록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걱정했던 대로 동포 간병인의 말은 절반 정도 알아듣습니다. 이따금 통화를 하는 주치의는 멘트를 녹음해 두고 틀어주는 게 아니가 싶구요. 제 맘에 엄마는 입원하신 뒤 세상과 헤어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삼 남매를  굶기지 않기 위해 사방팔방 거리낌 없이 씩씩하게 누비던 세상에서 떨어져 나온 것 같습니다. 절반의 자의와 절반의 타의로.       


저는 일상을 지냅니다. 문득문득 엄마 생각이 나기도 하지만 겉으로 보아선 예전과 다를 게 없습니다. 가끔 나도 모르는 사이 멍하니 창밖을 보기도 하면서요. 그것만 빼면, 엄마라는 존재가 제 삶의 영역 안에 원래 없었다는 듯 무심한 시간입니다. 머지않아 면회 금지가 ‘해제’되면 엄마를 보러 가겠지요. 막상 가서도 그저 엄마를 빤히 바라보거나, 필요한 게 있는지 간병인에게 물어보기도 하면서. 돌아오는 길엔 차 안에서 좀 우울해하기도 할 겁니다. 베란다 구석에 엄마가 쓰던 휠체어가 놓여 있습니다. 주인을 잃은 채 먼지만 끌어안고 있네요. 내려앉은 먼지를 손바닥으로 훑어내고 펼쳐 앉아봅니다. ‘무슨 휠체어씩이나!’하며 마지못해 산 거였는데 이젠 다시 탈 수 있는 날이 올까 싶습니다. 혹여 그런 날이 오면 무덤 같은 침대에서 엄마를 일으켜 태우고 함께 공원을 산책하는 ‘다정한’ 모녀 경험도 해 볼 수 있을 텐데요. 큰 길가 버스 정류장 앞에 있던 신축건물 406호 엄마가 제 마음 '안’으로 옮겨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압니다. 그때도 시간은 흐르겠지요. 흐르는 시간 속 묵은내를 풍기던 엄마의 ‘체험 무덤(Bed- Island)’은 제게 지울 수 없는 슬픈 시간으로 남을 겁니다. 이젠 엄마를 미워할 수도 없게 돼버렸습니다. 하루 스물네 시간을 오롯이 침대에 누워 꿈속과 세상을 오가며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요. 당신의 인생을 곱씹고 계실는지, 너무 일찍 사별해서 얼굴도 가물가물하다던 남편을 떠올릴지 모르겠습니다. 휴대폰 카메라로 찍어둔 낡은 사진 속엔 돌 무렵의 저를 바라보며 활짝 웃는 서른 즈음의 젊은 엄마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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