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표 개성 만두
지하철역에서 집까지 오는 길은 직진이다. 계획도시다. 다세대 주택이 빽빽한 골목에 접어들면 길의 절반가량을 매대로 차지한 동네 마트가 있다. 집에 이르는 끝 가게다 보니 자주 들르게 된다. 주인아주머니는 계산을 하는 내내 쉬지 않고 이런저런 얘기를 한다. 나를 안다는 티를 내는 거다. 상대에게 말을 붙인다는 건 ‘내가 당신을 다른 사람과 다르게 여긴다’는 마음이다. 잠자코 있기엔 멋쩍에서 맞장구를 치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지 가게를 지나칠 때마다 길가까지 늘어선 채소를 훑어보는 습관이 생겼다. 오이가 싸졌다. 반 접(50개)씩 묶음으로 팔기도 한다. 여름이 가까웠고, 오이지 담글 때라는 신호다. 호박도 싸다. 크기가 손톱만 할 시기부터 봉지를 씌워 규격에 맞춰 키운 인큐애호박 말고, 모양이며 크기가 조금씩 다른 호박이 천 원도 안 한다. 여름 호박 만두, 편수를 해 먹으면 좋다. 사지는 않으면서 가게 앞을 지나치는 동안 머릿속에선 어느새 한 상이 차려진다.
엄마의 겨울준비는 보기엔 간단했다. 광에 연탄들이기와 김장. 연탄가게 아저씨가 새까만 지게에 연탄을 한가득 지고 언덕길 낡은 한옥이었던 우리 집 대문 옆 광까지 몇 차례 오르내리고 나면, 석탄가루뿐이었던 광엔 키보다 높게 연탄이 쌓였다. 셈을 끝내고 광문을 닫는 엄마의 얼굴엔 벌써 따뜻한 겨울이 와있다. 집 한 채에 세 가족이 방 한 칸씩 차지하고 사는 처지라 광에 쌓인 연탄도 구획이 나뉘어 있었다. 엄마는 가끔 몇 장이 빈다며 옆방 아줌마를 수상쩍어하기도 했다. 어린 눈에 그 많은 연탄 개수를 어떻게 알까 궁금했다.
연탄들이기를 끝낸 엄마의 다음 숙제는 김장이다. 김장까지 하고 나면 월동(越冬) 준비는 완벽하다. 엄마의 월동준비는 진작부터 시작된다. 연탄 값과 김장재료 값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생일날 자장면이 먹고 싶다고 하면,
“안 돼, 연탄 값 모아야 해.”
하셨고, 참고서가 필요하다고 해도,
“빌려 봐. 김장 배추 값이 모자라.”
할 정도였으니 장기 계획인 셈이다. 지금이야 아무 때고 김치를 사 먹을 수 있고 다른 반찬도 지천인 세상이지만, 당시만 해도 어려운 집 겨울 반찬은 김장김치와 김치 속 버무리고 남은 무채가 전부이다시피 했다. 며칠을 그것만 먹고 나면 속이 쓰려 배앓이를 하기도 했다. 그러면 엄마는 오뎅국이나 멀건 된장국을 끓여주셨다. 가난은 몸이 기억한다. 김장 김치가 없었으면 간장 넣어 비빈 밥으로 겨울을 났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김장 김치에는 갓이며 미나리, 생새우에, 형편이 조금 나은 해에는 생태까지 들어가기도 하니 봄부터 가을까지 막 담가 먹던 김치와는 맛의 깊이가 다르다. 나는 그저 김치는 겨울에 먹어야 맛있는 줄로만 알았다.
겨울 동안 먹을 게 김치가 거의 전부였으니 식구가 몇이든 김장김치는 ‘접’ 단위로 담그는 집들이 많았다. 배추 한 접은 100포기. 마당에 수북하게 쌓인 배추와 무를 보며 ‘저걸 우리가 다 먹는다고?’ 했었다. 다듬기부터 절이기, 버무리기까지 이박삼일은 족히 걸리는 김장은 내 기억으론 설날보다 더 큰 겨울 행사였다. 나는 뭘 했더라? 양념 심부름을 하느라 부엌을 들락거리거나, 빈 김치 통을 마루에 늘어놓는 일, 빈 그릇 뒷 설거지 정도가 다였다. 추운 겨울, 배추가 골고루 절여지도록 밤새도록 두세 시간마다 일어나 마당으로 나가 뒤적인다든지, 절여진 배추를 얼음장 같은 물에 세 번씩(최소한 백 포기는 되는 걸) 씻는 일, 엄지와 검지에 물집이 생기도록 무채를 써는 일의 고단함을 김치에서 찾아낸 건 시간이 한참 흐른 다음이다.
절인 배추와 버무릴 속이 준비되면 외숙모들까지 둥그렇게 둘러앉는다. 자식 얘기, 남편 얘기는 추가 양념이다. 광에 연탄이 쌓여 있고 김치 통까지 채워지고 나면 봄까지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을 리는 없다(다행히 쌀독이 빈 기억은 없다). 우리의 겨울이 깊어진다. 찌개로, 볶음밥으로, 입이 심심할 땐 부침개로, 그렇게 겨울 밥상을 책임지던 김장김치도 음력설이 다가오면 맛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아삭거리던 줄기가 조금씩 물러지고 선명하던 붉은색은 불그죽죽하게 바랜다. 결정적으로, 뭐라 설명하기 힘든 ‘쿰쿰한’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이제 만두를 빚을 때가 온 거다.
엄마의 고향은 황해도 개성이다. 외할아버지께서 사과 과수원을 크게 하셨다고 한다. 개성음식은 담백하고 깔끔하기로 유명하다. 엄마 역시 당신 고향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젓갈 많이 들어간 남도 음식이나 '네 맛도 내 맛도 아니게 밍밍한' 서울 음식은 별로라고 하셨다. 묵은 김치를 처리(?)하는데 만두만 한 게 없다. 만두를 하고 나면 큰 김치 통 두어 개가 설거지통으로 들어간다. 하루 종일 걸리는 ‘요리’라 시장이 열리는 시간에 맞춰 엄마를 따라 집을 나서곤 했다. 재료 준비하러 가는 길이다.
첫 집은 채소가게다. 커다란 검은색 비닐봉지 가득 숙주를 담는다. 가게 아줌마는 묻지 않고도 뭘 하려는지 알고 있다.
“만두 하게? 나도 몇 알 주슈.”
“그러든가.”
다음은 식료품 가게다(이 단어가 낯선 이유가 궁금하다). 당면을 사야 한다. 주인아저씨도 거든다.
“아니, 오늘은 잡채 하고 만두 하는 날인감? 아침부터 당면만 계속 나가네.”
“그래요? 김장도 비슷하게 했으니 만두도 비슷하게 해 먹나 보네.”
이어지는 곳은 두부집이다.
“만두 할 거예요.”
한마디면 된다. 찌개 끓일 때와는 다른 두부를 얼마나 필요한 지 물어보지도 않고 봉투에 담아 준다. 콩비지는 덤이다.
“네가 들어라. 아니다, 넌 당면이나 들어라.”
엄마의 양 손에 만두 재료가 가득하다. 한 군데가 더 남았다. 정육점이다. 간 돼지고기를 사러가는 동안 엄마는 장보기 '팁'을 전수하곤 하셨다.
“고기는 맨 나중에 사는 거야. 아무리 추운 날이어도 상하는 건 젤 끝에. 알았지!”
겨울 어느 날이면 듣곤 했던 그 가르침 덕분에 지금까지도 장을 볼 때마다 고기는 가장 나중에 장바구니에 담는다. 어릴 적 교육은 중요하다. 평생 간다.
양 손에 가득 만두 거리를 사들고 언덕길을 올라 집에 오면 더 바빠진다. 엄마만.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우와, 진짜 추워. 발 시려.”
하며 신발을 벗어던지고 방으로 쏙 들어갔다. 부엌엔 커다란 검정 봉지들과 엄마만 남아 있다. 뜨끈한 아랫목에 배를 깔고 뒹굴뒹굴하던 나는 스르륵 잠에 빠진다. 잠결에 부엌으로 통하는 문 사이로 “탁탁 탁탁”하는 도마 소리가 닿았다 흩어진다.
“그만 일어나라, 만두 빚어야지.”
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얼었다 녹아 발그레해진 뺨이 간지러워 비비며 일어나 앉는다. 방안에는 벌써 빨간 다라이*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김장 이후 고이 모셔져 있던 그 큰 그릇이 다락에서 내려오는 두 번째 행사 날이다. 아이 둘은 너끈히 들어감직한 크기에 만두소가 가득하다.
“엄마, 이걸 언제 다 했어?”
“너 자는 동안.”
“우와!”
만두소를 어떻게 만드는지는 대충 안다. 내가 방으로 뛰어 들어간 뒤, 엄마는 바로 빨간 장갑을 끼고 묵은 김치를 꺼내 켜켜이 들어 찬 속을 털어냈을 거다. 그리곤 김치를 도마에 올리고 다지기 시작한다. 이때 엄마는 무림의 칼잡이처럼 양 손에 칼을 쥐고 전투(?)에 임한다. 칼 하나만으론 하 세월인 데다, 적당한 크기로 다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잠결에 들은 소리가 바로 무림의 협객이 김치 다지는 소리였을 거다. (*함지, 함지박이라고 순화한 말이 있는데 집에선 한 번도 그렇게 부른 적이 없다. 우리말이 일본으로 건너가 변형된 거라는 주장도 있다, 암튼)
김치를 적당한 크기로 다졌으면 베보자기에 담는다. 물기를 짜줘야 한다. 그냥 버무리면 만두소가 너무 질척거린다. 여름에 오이지 담그며 오이가 뜨지 않도록 눌러두는데 썼던 넓적한 누름돌이 등장할 차례다. 부엌에 두고 쓰던 스댕(스테인리스)대야를 엎어 그 위에 다진 김치 담은 베보자기 주머니를 얹고, 돌로 눌러 둔다. 김치 국물이 줄줄 흘러나온다. 기웃대던 내가 징그럽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랬더니
“저기 들어간 양념이 얼만데.”
하시며,
“아까워도 별 수 없어. 쓸 데 없는 건 버리는 거야.”
음식은 때로 단호하다. 김치 식감이 좋으려면 그대로 한참 눌러 둬야 한다. 나중에 일명 ‘짤순이’라는 탈수 전용기계가 생겼다. 탈수는 잘 되지만 맛이 별로라고 하셨다. 더디긴 해도 아날로그식이 낫다는 당신의 ‘사용 후기’인 셈이다.
물기를 빼야 하는 재료가 더 있다. 두부다. 두부도 베보자기에 담는다. 이번엔 돌로 누르는 대신, 팔뚝과 손아귀 힘으로 쥐어짜야 한다. 물기가 너무 빠지면 퍽퍽해서 맛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두부에서 그렇게 많은 물이 나오는 줄 몰랐다. 아마 이때쯤 엄마가 다락으로 올라가셨을 게다. 자다가 갑자기 발이 눌렸었는데, 아랫목 쪽에 드나드는 문이 있던 다락에 올라가던 엄마가 모르고 내 발을 밟았던 모양이다.
“아이쿠, 저런. 아프겠다.”
라는, 혼잣말을 들은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부엌으로 자리 이동한 빨간 다라이에 물기 뺀 두부를 담아 한 쪽 구석에 둔다.
이제 연탄아궁이와 석유곤로 두 군데 불이 필요하다. 하나는 당면 삶는 용도고, 다른 하나는 숙주를 데치는 데 쓴다. 당면이 끓는 동안 데친 숙주는 적당한 크기로 다져 손으로 물기를 꼭 짠 뒤 다라이에 담는다. 당면은 완전히 익었는지 확인한 후 채반에 쏟는다. 물기가 빠지면 이것도 적당히 썰어야 한다. 너무 길면 속에서 삐죽삐죽 빠져나오고 너무 잘게 다지면 쫄깃하게 씹는 맛을 느낄 수 없다(본래 개성만두에는 당면을 넣지 않는다. 우리 식구의 취향 때문에 첨가된 재료다. 덕분에 만두소의 양이 많아졌으니 엄마는 좋았겠지). 눌러 뒀던 다진 김치까지 한데 담으면 기본 재료 준비가 끝난다.
이제부터 고수(高手)의 세계다. 양념하기다. 반찬 만들다가 난관에 부딪칠 때마다 엄마한테 SOS를 치곤 했다. 수화기 너머 건너 온 대답은, 열에 아홉이
“적당히 넣어.”다.
“어느 정도가 적당힌데?”
라고 되묻기라도 하면,
“얘, 고만큼 만드는데 그걸 한 움큼이나 넣으면 되겠니?, 그렇다고 손톱만큼 넣고 말면 맛이 나겠냐? 적당히 넣어야지.”
돌아오는 건 통박(痛駁)이다. ‘적당히’처럼 계측 불가한 단위가 세상에 또 있을까. ‘적당히’는 모든 요리 지망생의 의욕을 꺾는 결정적 한 방이다. 경험으로만 익힐 수 있는 절대치를 초보가 알 리 없다. 이제는 어느 정도 안다. ‘적당히’가 가리키는 눈금의 위치를. 경험은 손에 ‘눈’을 달아 준다. 그러니 다른 이의 손끝에 붙은 눈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김치 덕에 붉은 기가 돌기는 하지만, 만두소가 칼칼하면서 개운한 맛이 나도록 날고추가루를 넣어야 한다. 그리고 ‘갖은양념’을 하면 된다. 다진 파와 다진 마늘, 깨소금, 참기름과 후추 가루, 소금이다. 모든 양념의 분량은 당연히 ‘적당히’다. 중요한 사실은, 맛을 결정하는 건 양념의 가짓수보다 양(量)이다. 손끝에 붙은 ‘눈’ 때문에 집집마다 만두 맛이 다른 거다. 언 몸이 풀어지도록 한 잠 자고 난 내 앞에 놓인 빨간 다라이 속 만두소는 이 과정을 모두 거친 작품이다. 군데군데 숟가락이 푹푹 꽂힌 채. 옆 방 아줌마(이때만큼은 연탄 절도 용의자라는 의심에서 벗어난다)를 큰 소리로 부르며 방으로 들어오는 엄마는 스댕다라이와 칼, 도마를 들고 있다. 다라이엔 만두피로 쓸 밀가루 반죽이 한가득이다(반죽을 언제 했는지 모르겠다. 물어보면,)
“그냥 사이사이 했지.”
가 전부다. (‘사이사이’가 언제였지?).
개성만두의 특징은 과하지 않은 양념과 어마어마한 크기다. 만두 하나가 내 주먹만 하다. 세 개만 담아도 대접에 가득 찬다. 만두피의 크기 역시 손바닥을 덮는다. 엄마는 서울식 만두를 보고 처음엔 송편인 줄 아셨단다(진짜다). 만두피 반죽의 성패는 찰기에 달렸다. 되지도 질지도 않아야 한다. 소금 간을 하고 식용유를 좀 넣으면 반죽이 손에 달라붙지 않는다. 끓는 중에 만두피가 터지는 것도 막아준다. 고소하라고 계란을 넣기도 하는데 익으면 만두피가 노르스름해진다. 반죽한 덩어리를 적당한 크기로 떼어 내 홍두깨처럼 길게 모양을 잡아 늘인 다음, 일정한 크기로 자른다. 동글납작하게 자른 하나하나를 얇게 밀면 만두피가 된다. 만두피의 크기를 일정하게 만들고 싶으면 반죽을 크고 얇게 밀어 그릇 뚜껑으로 찍어 내면 된다. 큰외삼촌 댁에 모여 만두를 했을 때 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서울 토박이였던 외숙모가 찻주전자 뚜껑으로 모양을 찍으려 했다. 엄마가 손 사레를 쳤다.
“동전만 하게 만들어서 어느 세월에 다 해요? 그리고 큼직해야 먹을 맛이 나지. 사돈네라도 보내나? 우리 먹을 건데 뭐 그리 모양을 내요, 힘들게시리. 뚝뚝 썰어 밀면 되는 걸.”
외숙모는 엄마가 시누이 노릇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엄마가 만두피를 홍두깨로 밀어 다라이 아가리에 척척 얹어두면 나랑 옆 방 아줌마가 하나씩 집어다 속을 채웠다. 엄마의 당부가 이어진다.
“꽉꽉 채워. 떡 먹자는 송편이구, 소 먹자는 만두야. 소 적게 넣어 익히면 흐물흐물하고 먹을 게 없어.”
그때는 떡이 어떻고, 소가 어떻고 하는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이젠 안다. 쫄깃한 송편은 소가 들었어도 주재료는 떡이다. 그에 비해 만두피는, 갖가지 재료를 보듬은 싸개다. 소가 주재료다. ‘엄마표’ 개성만두가 생각날 때마다 지금도 가끔 만두를 한다. 만두피에 소를 숟가락으로 눌러 담고 반을 접어 가장자리를 엄지와 검지로 눌러 붙여서 반달 모양으로 만든 다음, 양 끝을 끌어당겨 서로 조금 맞물리게 겹쳐 꾹 누르면 둥그스름한 모양이 되면서 가운데가 봉싯해진다. 나는 모양을 잡으면서 중얼거린다.
“떡 먹자는 송편, 소 먹자는 만두야.”
어린 시절은 중요하다.
“새댁, 들어왔어? 만두 좀 같이 빚자. 내 한 대접 줄게.”
셋 만으론 부족하다 느꼈는지 엄마는 마루턱에 선채로 문간방을 향해 소리친다. 지금 짐작해보면 스물두세 살이나 되었음직한 문간방 새댁은 둘이 누우면 남는 자리 거의 없었을 좁은 방에 살면서 신랑과 함께 직장엘 다녔던 것 같다. 우리가 살던 안채에 들어온 적은 거의 없었지만 엄마가 무슨 부탁이라도 하면, 싫은 내색하지 않고 도왔다. 엄마는 새댁이 싹싹하다고 칭찬했다(‘싹싹하다’는 말의 뜻은 잘 몰랐지만 호의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빚은 만두는 쟁반에 그냥 올리면 안 된다. 소에서 배어 나온 물기가 만두피까지 적셔 쟁반에 들러붙는 바람에 떼어낼 때 찢어진다. 모양을 내어 빚은 만두 엉덩이(?)에 밀가루를 넉넉히 묻혀 쟁반에 얹어야 한다. 새댁까지 합세한 덕에 쟁반엔 만두가 금방 늘어선다. 어느새 부엌에선 만두 삶을 물이 끓고 있다(엄마가 분신술을 썼음이 분명하다. 냄비가 알아서 불 위에 올라가지 않은 이상).
빚은 만두가 담긴 쟁반을 들고 부엌으로 나간 엄마는 끓는 물에 만두를 하나씩 넣는다. 한 번은 그 일을 내가 한 적이 있다. 끓는 물이 무서워 멀찌감치 서서 만두를 던지듯 넣다가 물이 튀는 바람에 이마랑 손을 데었다. 비명에 놀라 뛰어나온 엄마한테 엄청 혼났다. 이후로 나는 ‘만두 삶기’ 담당에서 제외됐다. 만두가 끓는 동안 우리는 더 빨리 빚어야 한다. 엄마의 주장에 따르면, 일단 만두를 먹고 나면 더 이상 빚기가 싫어지기 때문이란다. 맞는 말이다. 점심도 거른 채 늘어지게 잔 덕에 뱃속에선 텅 소리가 날 지경이다. 냄비에서 만두가 끓는 동안 부지런히 빚어 가득 찬 쟁반을 들고 일어서며, 엄마는,
“고기 안 들어간 호박 만두는 칠 분, 고기 들어간 김치만두는 십 분만 끓이면 돼.”
했다. 시계라곤 마루 기둥에 달랑 하나뿐이었는데 어떻게 시간을 알았을까. 잠시 후에 채반에 담겨 김이 펄펄 나는 만두와 초간장, 사람 수에 맞춘 앞 접시며 숟가락이 쟁반에 얹혀 엄마와 함께 방으로 들어온다.
큼직한 개성만두는 먹는 방법이 중요하다. 우선 우묵한 앞 접시에 만두를 옮겨 담는다. 하나만 담아도 좋고, 그릇이 크면 두어 개쯤 담아도 상관없다. 그리곤 숟가락으로 만두를 뚝뚝 끊듯이 자른다(장담하건대, 개성만두는 절대 통째로 한 입에 먹을 수 없다. 혹시라도 시도했다가는 턱이 빠지거나, 아니면 입천장이 홀랑 벗겨지는 불상사를 초래할 수 있다). 깨진 만두피 사이로 알록달록하게 드러난 만두소에 초간장을 뿌린다. 초간장에 들어가는 식초의 양이나 종류도 입맛에 따라 제각각이다. 만두 본연의 맛을 침범하지만 않으면 된다. 이제 숟가락에 올려 입 안으로 가져가면 된다(이런, 침이 고이네). 아삭 거리는 숙주와 쫄깃한 당면, 부드럽게 으깨지는 두부, 미끌거리지만 이(齒) 사이에서 힘들지 않게 잘리는 만두피, 간간이 씹히는 고기 맛에 짭조름하면서 개운한 다진 김치까지. 입안의 향연이 따로 없다. 노동 후의 음식만큼 우리를 만족시키는 게 있으려나.
배가 터질 거 같은데도 만두 먹는 걸 멈출 수가 없다. 얼마 후 자리에서 일어나며 후회한다. 일어서기 힘들 정도로 먹었기 때문이다. 연신 만두를 끓여내느라 턱 높은 마루와 부엌 사이를 오르내리는 엄마의 얼굴이 땀으로 환하다. 자식을, 이웃을 먹이는 여신(女神)이다. 부엌을 오르내리며 빚어낸 만두와 찬물에 손 담그며 김장하던 그 시절의 노동이 지금 엄마의 류머티즘에 일조했을 거다. 총 출동한 채반 위로 옮겨져 김이 빠진 만두는 이제 옆방으로, 문간방으로, 두 정류장 떨어져 살던 둘째 외삼촌댁으로 전해진다. 그러고도 남은 만두는 달라붙지 않게 층층이 겹쳐 담겨 냉장고로 들어간다. 며칠 동안 우리 집 냉장고엔 간식이 넘쳐난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달달 외웠던 영어단어, 수학공식은 하얗게 잊었는데, 만두 하면 떠오르는 기억 속 이웃들의 모습은 신기할 만큼 선명하다. 두부집 사장님의 국방색 앞치마와 채소가게 아줌마가 양 팔에 끼고 있던 꽃무늬 팔 토시, 고등학교 다니는 아들이랑 열다섯 살이나 아래라는 동거남과 한 방에 살던 옆 방 아줌마의 문신한 눈썹, 끈 달린 검정 구두가 유일한 출근용 신발이었던 문간방 새댁. 엄마가 만들어 주던 개성만두 속에는 그들이 모두 들어있다, 갖은양념처럼. 내 유년의 시간과 함께.
아버지는? 바쁘셨냐고? 엄마가 아버지와 함께 산 시간은 팔 년 남짓이다. 술 좀 그만 먹으라는 아내의 성화를 귓등으로만 듣다가 머릿속에서 혈관이 터져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다. 엄마 역할에 아버지 노릇까지 하느라 철인처럼 사셨던 엄마는 이제 더 이상 만두를 빚지 않으신다. 요양병원에 계시다. 베드-아일랜드(Bed-Island)에 사신다. 이제 어디서도 ‘엄마표 개성만두’를 먹을 수 없다. 만두가게를 지날 때마다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사 먹어 봤지만 ‘아니올시다’였다. 그마저도 이젠 그만뒀다. “어떤 음식을 평생 기억에 남을 정도로 맛있게 먹었을 때의 그 맛을 찾는 건, 그때의 자신을 찾는 것과 같다.”** 고 한다.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로 만두를 먹어 대던 그때의 나는 이제 어디서도 찾을 수 없게 됐다. 장사하느라 바빴던 엄마를 둔 우리 남매는 기껏해야 어묵볶음과 콩나물무침, 그리고 막 김치가 반찬의 전부였다. 한 겨울, 묵은 김치를 해치울 목적으로 빚어 먹은 ‘엄마표 개성만두’는 삶을 살아 내느라 지쳤던 당신이 자식들에게 주는 최고의 애정 표현이 아니었을까. 마음은 언제나 ‘갖은양념’을 한 풍성한 밥상을 차려주고 싶다는. '딸표 개성만두'를 해드리고 싶지만, 엄마가 드실 수 있는 끼니는 천장 아래 매달린 투명한 비닐 팩 속 '영양 수액' 뿐이다. 늦어버린 것이 많다.
* 사진출처- 한식진흥원
** <꾸들꾸들 물고기씨, 어딜 가시나 >(성석제/한겨레 출판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