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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미 Jun 08. 2020

인연을 배웁니다

운명론을 믿진 않지만, 과거의 나로 인해 현재의 내가 있다는 정도는 그동안의 경험으로 동의한다. 어떤 상황이 벌어진 이유는 이전의 과정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원치 않는 것이라면 더 그랬다. 사람과의 인연 역시 이유가 있다고 한다. 그 사람이 내 인생의 시간에 꼭 필요했기 때문에 관계를 이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우리 식구는 변두리였던 상계동에서 서대문으로 이사해 어느 한옥의 문간방에 세 들어 살았다. 안채에 사는 동갑내기 주인집 딸은 생전 처음 보는 하얀 레이스 양말에 빨간 에나멜 구두를 신고 학교에 가곤 했다. 같은 학교에 다니던 나는 그 애가 마치 공주님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 한옥 셋집을 떠올리면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마루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고 있던 주인집 딸의 머리맡에 놓여있던 크레파스다. 하얀색 직사각형 종이 상자에 무지개처럼 가지런히 담겨있던 색색의 크레파스. 내겐 크레파스가 없었던 걸까? 어쨌든 그 애가 가지고 있던 것처럼 근사하지 않았던 건 분명하다. 교내 사생대회에서 나는 ‘은상’인가를 받았고, 그 애는 ‘금상’인가(나보다 순위가 높은 상이었다)를 받았다. 대회 결과에 대한 당시의 내 판단을 아직까지 기억한다. ‘나한테 쟤만큼 좋은 크레파스가 있었으면, 내가 그 상-금상을 탔을 거야!’라는. 중학교 시절엔 미술학원에 다니지 않았는데도, 대회에서 큰 상을 받았다. 선생님이 하신 말씀도 기억한다. “미술학원에서 제대로 배웠으면 대상 탔을 텐데!” 하지만 내게 미술학원은 입에 올릴 수조차 없는 사치였다. 엄마의 계획은 ‘상고에 보낸 뒤 졸업하면 은행에 들여보내 몇 년 살림 밑천 노릇 시키다 시집보내’는 것이었으니까. 그렇게 그림은 내 십대 시절, 귀 밑을 간질이고 지나간 봄바람이었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 다시 그림을 시작했다. 마음 깊은 곳에 가라앉아 숨죽이고 있던 오랜 바람을 들추어, 화실 문을 두드렸다. 민화가 유행처럼 번지던 때였다. 문화센터에서 그림을 배우던 친구가 부추긴 영향도 있었을 거다. 날짜 지난 신문지 위에 물 수(水)자를 써 본 이후 처음으로 한국화 붓을 잡았다. 두세 시간씩 고개를 숙인 채 머리카락 굵기의 선을 긋기 위해 어깨와 손가락이 저리도록 연습했다. 동양화 물감은 서양 수채화 물감에 비해 사용방법이나 색감이 사뭇 달랐다. 모란이며 국화, 벚꽃에 색을 입혔다. 화실을 운영하는 젊은 선생은 나의 부족함을 나무라는 대신, 차근차근 그림을 살펴주었다. 화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일상 중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4년이 흘렀다. ‘다른 일 하지 않고 하루 종일 그림만 그릴 수 있었으면’하고 바랐다. 직장을 그만두자, 선생은 화실운영을 배워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실력도 얼추 갖췄고, 꾸준히 배우면서 함께 그림 그릴 회원을 모아 수업을 진행하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십 개월 정도 화실운영 컨설팅 수업이 진행되었다.      


‘인생이 뜻대로 흐르면 그게 무슨 인생이겠느냐’는 자조와 체념을 버무린 표현이 들어맞을 때가 있다. 실체가 눈앞에 있다면 한 대 쥐어박고 싶다. 말단이긴 해도 큰 대회에서 수상도 했다. 컨설팅이 무난히 진행되었더라면, 아마 이런 얘길 하지도 않았을 거다. 새 계획을 세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 닥쳤다. 컨설팅에 소홀해지게 됐다. 인간관계에 서투른 건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까. 내 딴엔 솔직하고 스스럼없다 여겼던 몇 마디 말과 행동이 화실 선생에겐 불편하고 서운했는가 보다. 컨설팅 마지막 달, 아무리 쥐어짜 봐도 수강료를 낼 형편이 안 됐다. 사정을 전하고 그림 수업료만 보냈다. 선생이 보낸 단편소설 분량의 메시지가 휴대폰에 떴다. 너무 서운하고 실망스럽다고 했다. 그동안 많은 배려를 했음에도 내가 알아주지 않았다고도 했다. 나를 은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다(선생의 아버지가 큰 수술을 받아야 했을 때 소개를 해 준 적이 있다. 나는, 잊고 있었다. 은인이라니…)는 내용이 이어졌다. 이젠 빚진 거 없다는 말과 함께, 무성의하고 마지못해 따라오는 회원과는 더 이상 수업을 진행하지 않겠다는 통보였다. 보낸 수업료는 위약금으로 대체하겠다고 했다. 답장도 하지 말랬다. 모든 SNS를 차단하겠다고도 했다. 그러더니 정말 그렇게 했다. 어안이 벙벙했다. 한동안 상황을 파악할 수조차 없었다. 내게서 등을 돌리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일방적 거절을 받을 정도로 뭘 그렇게 잘못한 건지 헤아려지지 않아 힘들었다.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 다녀오고 보니 버스가 이미 출발해버린 거 같다고 해야 할까. 일을 그르칠 때마다 내가 잘하는 것, 자책하기. 내 잘못으로 돌리기…도 이번엔 되지 않았다. 냉장고에 휴대폰을 넣고 찾아 헤매거나 치약을 짜 세수를 하는 따위의 헛짓을 했다. 제풀에 정신을 차릴 길을 텄다.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는 것.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그러고도 해결되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거로. 다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와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나 보다. 정말 필요했던 순간에 내 앞에 나타났고 필요한 것이 충족되어 인연의 시간이 다한 것이라 믿고 싶다. 우울하게 했던 껄끄러운 ‘인연의 마무리’도 이제 놓으려 한다. 여전히 나는 그림을 그리고 있고, 나아질 거라 믿는다. 그림이 일상에 좀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할 방법을 찾아가고 있다. 글과 더불어 그림은 나를 지탱하는 기둥이다.     




하지만 그 기둥을 붙잡아 두려면 적잖은 비용이 필요하다. 아슬아슬하게 꾸려가는 살림에 붓이며 종이, 물감 사는 데 드는 비용을 빼내 쓰기가 편치 않았다. 뭐든 해보자는 작정으로 시작한 일이 판매 아르바이트였다. 그 세계는, 야생이 살아 숨쉬는, 태어나 처음 접하는 세상이었다. 함께 일하던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 만났던 그 어떤 이들보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다. 원하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으며, 거리낌이 없었다. 살아내는 것에 대해 본능적인 감각을 지닌 것처럼 보였다. 일하던 곳이 갑작스레 폐업했음에도 금방 새 일자리를 찾더니 순식간에 흩어졌다. 나는 공중에 뜬 채 우왕좌왕하다가 실업급여를 신청했다. 야생의 직장생활을 마무리했다. 육학년 교실에서 공부하는 일학년 같았던 한 계절이었다.     


그건 약과였다. 오랫동안 연락 없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오면, 두 가지 중 하나랬다, 보험가입 권유, 아니면, 다단계 판매. 학교 동아리 시절 이후, 소식이 끊겼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다짜고짜 얼굴이 보고 싶다며 롤 케이크를 손에 들고 집으로 온 친구의 용무는, 아니나 다를까 ‘보험’이었다. 가입해 둔 보험이 없기도 했고, 두 시간 여를 달려왔을 그를 빈손으로 돌려보내기도 뭣해서 권하는 대로 계약을 했다. 친구는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돌아갔다. 도움이 되었다는 위안으로 씁쓸한 마음을 달랬다. 그리고 얼마 전, “○○생명 설계사 △△△입니다~”라며, 세상 친절한 낯선 목소리의 전화가 걸려왔다. 얼굴 한 번 보자는 간곡한 부탁이 이어졌다. 마침 궁금한 것도 있어서 일러준 보험회사 사무실로 찾아갔다.      


아차차! ‘보험설계사모집’이었다. 친절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지점장을 대동한 채 일식집으로 나를 끌고 갔다. ‘점심특선’을 사주면서 이 ‘일’의 좋은 점은 물론, 설계사들이 얼마나 행복하고 충만한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해 양쪽 뺨이 벌게지도록 열변을 토했다. 두어 시간이 지나서야 간신히 그 자리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집으로 가는 전철에 오르고 나니 황당했다. 조금 전까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머릿속에선 윙윙하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그럴 수도 있지. 자기 일에 긍지를 가지고, 생활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걸 거야!’라고, 좋은 마음으로 이해하기로 했다. 사람 만나는 일에 도가 튼(?) 사람들이다. 내게서 읽었으리라, 밥벌이를 찾는 다급한 모습을. 길을 걷다가, “○○생명! 인생금융전문가로 당신 안에 숨겨진 성공의 가능성을 깨우세요! 고소득, 주부환영, ○○생명 설계사 모집!”라고 쓰인 입간판 문구를 봤었다. 잠깐 혹하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다. 여전히 내겐 밥벌이가 필요하니까.     


이제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더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그들이 고맙다. 아침마다 보험 설계사가 고객관리 차원에서 명언이 담긴 메시지를 보낸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좀 더 들여다보며 어떻게 살고 싶어 하는지 확인하는 계기 삼아 읽는다. 하고 싶은 일이 밥벌이까지 이어질 수 있을 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 삶에 나타나 준 이들에게 감사한다. 얼마 동안의 만남이든, 기쁜 만남이든, 아픈 만남이든, 그들 덕분에 현재의 내가, 좀 더 나아지고 싶은 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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