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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미 Jun 02. 2020

봄편지

선생님께

창문을 타고 넘어든 수수꽃다리 향기가 코끝을 스쳐 지나더니 이내 방안을 가득 채웁니다. 세상이 어수선해도 꽃은 핍니다. 뿌리가 땅 속에 굳건하기만 하다면. 지난주는 독후감을 둘이나 쓰느라 훌쩍 지나갔습니다. 매일 글을 쓴다는 분들이 대단하다는 걸 새삼 실감합니다. 제 경우 처음 며칠은 머릿속에서 말들이 맴돌고, 그걸 꺼내 종이 위에 옮기느라 또 몇 날을 끙끙대거든요. 그러고도 글은 눈앞에 온전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씨름하듯 매달려 기어코 완성을 해보지만 정리가 될 무렵 첫 글은 난장판입니다. 완성한 글은 다시 쓴 것이나 마찬가지인 경우가 태반이고요. 처음 글은 연필로 씁니다. 키보드 자판에서 반자동으로 자음과 모음을 찾아 문장을 조직하는 방식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이어지기는커녕 흩어질 뿐 아니라, 제 생각이 뭐였는지 조차 순간적으로 자주 잊는 이유도 있습니다. ‘Delete’ 키만 누르면 맘에 안 들었던 내용을 흔적도 없이 지워주는 기계의 편리함보다 두 줄을 그어 지워졌지만 여전히 보이는 상태가 더 좋습니다. 종이와 연필이 주는 마찰의 느낌이 생각을 끌어옵니다. 그렇게 생각에서 글로 바뀐 모습을 여러 차례 지우거나, 다르게 바꾸고, 뭉텅뭉텅 빼가며 조금씩 정돈을 하는 거죠.     


시작은 ‘블로그’였습니다. 관공서에서 무료로 가르치는 컴퓨터 사용법을 배우던 중이었습니다. 포털 사이트에서 기본 틀을 제공해주니 몇 가지 항목만 더하면 완성이 되더군요. 그렇게 얼렁뚱땅 만들어진 저의 글 집은 이후로 오랫동안 비어있는 채로 방치되었습니다. ‘디지털’ 보다 ‘아날로그’가 좋다는 말이 온전히 거짓은 아니지만, 자고나면 달라지는 디지털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인 이유도 크지 않았나 싶은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아날로그’ 수호자가 돼버린 셈입니다.      


책을 읽다 마음이 멈춰서는 문장을 만나면 작은 노트에 옮겨 적곤 합니다(선생님의 문장도 많지요). 분량이 제법 됩니다. 그러다 우연히 어떤 블로그를 보게 됐는데, 책 속 문장을 기록하더군요. 자신의 생각을 짧게 덧붙여서. 텅 빈 제 글 집이 생각났습니다. 이후 제 문장노트의 내용을 이따금씩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문장만 옮기는 정도였는데 그것만으론 어쩐지 성에 차지 않았습니다.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옮긴 문장은 처음 읽으며 한 번, 마음에 두느라 여러 번, 노트에 옮기느라 한 번, 그리고 블로그에 싣느라 다시 한 번, 이렇게 열 번 이상 읽다보니 문장의 내용과 관련한 제 느낌이나 생각이 (저도 모르는 사이) 생겨나더라고요. 며칠 지나기도 전에 사라질 게 뻔 한 그 마음을 글의 말미에 끄적이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사는 동안 생각보다 많은 일들이 계획 없이 저질러진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책 속 문장에 한 두 마디 더하다 보니 생각을 좀 더 다듬어 ‘제대로’ 써보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쓰고 싶다는 마음만 앞 설 뿐이지 막상 쓰자니 뭘 써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아쉬운 대로 찾아 간 도서관의 서가에는 글쓰기 관련 책이 따로 분류되어 있을 정도로 많더군요. 당황했습니다.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을 줄 몰랐거든요. ‘많이 읽어라! 많이 써라! 뭐든 써라! 관찰하라! 포기하지 말라!’는 제안이 공통적이었습니다(물론 책마다 결이 다르긴 합니다만). 선생님의 글 곳곳에 숨은 ‘글쓰기 수업’에서도 얼핏 느끼곤 했던 지침(?)입니다.          


제가 쓴 글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어 진입 문턱이 높지 않은 서평이벤트에 응모했습니다. 기회를 얻으면 출판 예정인 책을 받아 여러 번 읽고 독후감을 썼습니다. 어떤 책은 주제나 내용이 좋아(제 판단입니다) 할 말이 많기도 했지만, 빈약하거나 어설퍼(역시 제 생각이지요) 과장을 하자니 예비독자를 속이는 것 같고, 솔직히 쓰자니 저자와 출판사에 미안해서 글이 삐걱대는 바람에 제출 마감일까지 썼다 지웠다하기를 반복하기도 했습니다. 어쨌거나 최선을 다해 세상에 내놓은 책일 텐데 말입니다. 저의 소양이 얕은 이유가 가장 클 것이고, 조심스레 짚어보자면 시류에 편승해서 이문 내려는 목적으로 출간된 책이 더러 있기도 한 듯합니다. 하지만 어떤 책이든 읽은 보람이 없지 않습니다. 제 생각을 두텁게 해주는 글은 지원군을 만난 듯 반갑고, 더 튼튼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합니다. 제 생각과 다르거나 하려는 말을 알아듣기 어려운 글을 읽을 때는 조목조목 짚어보며 혹시 제가 놓치거나 무시한 건 없는지, 근거 없이 책의 내용에 거부감을 갖는 건 아닌지 자기검열을 하기도 했습니다. 비평을 공부한 전문가가 아닌 일반 독자의 서평을 찾는 이유가 있을 겁니다. 출판업계의 영업 필요와 저의 필요가 만나 쓰게 되는 독후감이지만 제게 공부가 되는 시간임은 분명합니다. 얼마나 많은 독서와 사색, 인간과 세상에 대한 성찰, 그리고 절박함이 쌓여야 선생님이 쓰신 서평 같은 글이 나올까요.      




작가 정희진은 “사회적 약자에게 공부는 취업, 성장 같은 당연한 의미 외에 자신의 삶과 불일치하는 기존의 인식체계에 도전하는 무기가 된다.”(「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中) 라고 하더군요. 공감합니다. ‘공부’라는 자리에 ‘글쓰기’를 놓고 읽습니다. 이제껏 저의 언어라고 믿었던 것이 실은 제가 태어나기 훨씬 오래전부터 갈고 닦으며 세상을 지배해온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았다는 깨달음이 점차 또렷해집니다. 책을 읽으며 세상과 만날수록, 제가 지나온 삶을 모조리 ‘다시보기’하고 나서야 ‘나다운’ 발걸음을 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 느낌은 때로 두렵기까지 합니다. 부모 때부터 이어진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을 거라고, ‘거기’에 빠져 허우적대는 인생을 살지는 않을 거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근거 없는 막연한 바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벗어나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사회의 불평등 구조는 저들에게 ‘이익’을 줄 것 같지 않은 자를 편입시키지 않습니다. 저 역시 꾸역꾸역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특출 나거나 냉혹하지 못합니다. 그 안에 들어가기 위해선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웃의 눈물을 외면할 작정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를 외면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절망하거나 체념하지 않으며 자기 속도로 걷는다는 건 쉽지 않습니다. 글쓰기도 그런 것 같습니다. 치열한 사유의 흔적이 드러나고 깊은 공감을 일으키는 글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저는 두 눈을 부릅떠도 잘 보이지 않는 순간의 느낌을 놓치지 않고 풀어내는 글, 대체할 수 없는 바로 ‘그’ 단어와 문장으로 옮겨 생각의 자리를 펼치는 글을 보면 무릎이 꺾이곤 합니다. 그럼에도 다시 일어서는 건 빨강과 노랑을 비교할 수 없고, 숲에는 나무만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서입니다. 제게 그만큼 깊은 생각과 절실함, 그에 이어지는 실행이 있었는지 되돌아봅니다. “한 사람이 작가로 성장한다는 것은 한 세상을 다른 세상으로 바꾸는 의미”라고 하셨지요. 소소한 글쓰기로 세상이 크게 달라질 리는 없겠지만 글을 쓰기 전과 후의 저는 분명 달라질 테고, 그건 제가 사는 세상이 달라지는 거라 믿습니다. 그래서 선생님, 저는 글쓰기를 ‘무기’ 삼아 세상과 만나려 합니다. 때로는 창(槍)이 되고 때로는 방패 역할을 할 겁니다. 나아가 무기에 머무르지 않고 창(窓)이 되기를 바랍니다. 눈곱만큼이라도 나아지는 세상이 되는 원(願)을 품어 봅니다.      


책을 읽으며 그저 공감에 그치지 않고 제 안에 살아있게 하고 싶습니다.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 살라고 하셨지요. 읽고 쓰면서 일 년보다 한 달에, 한 달보다 하루에, 하루보다 순간에 집중하는 저를 봅니다. 불안이 줄었습니다. 땅바닥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이 나무와 구름, 동네 골목, 골목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옮겨갑니다. 그들과 왠지 모를 연대감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요. 글쓰기가 주는 보상인가 싶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시를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짧은 몇 줄 속에 담긴 많은 얘기를 풀어내기가 힘에 겨워 오랫동안 고개를 외로 꼬고 있더랬습니다. 시인이 세상 모든 말들에서 골라 낸 딱 하나를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나지막하게 입에도 올려봅니다. 제 안에 그 언어는 어떤 모양으로 들어있는지 찾아보는 시간이 이제는 좋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제가 아름다워지고 있다는 착각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선생님, 아직은 제 글이 어떤 길로 접어들지, 어떤 길을 따라 갈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루의 글, 한 달의 글, 일 년의 글이 제 글의 길을 만들어 갈 거라고 짐작할 뿐입니다. 제게 일어났던 일들과 기억을 들추다 보면 지금의 ‘나’를 알 수 있을 거라 기대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좋은’ 글로 드러나도록 애쓰려 합니다. 머뭇거리기만 반복하는 대신, 어설프게라도 자신감을 장착해야겠습니다. “자신감을 가진다는 것은 자신의 사소한 경험을 이 세상에 알려야 할 중요한 지식으로 여긴다는 것이며, 자신의 사소한 변화를 세상에 대한 자신의 사랑으로 이해한다는 것”(「밤이 선생이다」中)이라는 말씀을 응원이라 여기겠습니다. 제가 떼어 놓는 걸음을 격려해 주십시오. 거창할 필요 없다고, 빼어나지 않아도 괜찮다고 토닥여 주십시오. 그러면 힘을 얻겠습니다. 제 안의 작은 소리, 스치는 인연을 모른 척 하지 않겠습니다. 감히 글과 일치하는 삶을 살고자 하겠습니다. 그러다 어느 때쯤 글로 남아 기억되고 싶습니다. 저의 “사소한 부탁”을 기꺼이 들어주시리라 믿습니다. 뉴스보이 캡을 쓰고 안경 너머 싱긋 지어보이던 미소를 든든한 뒷배로 두렵니다. 이제는 뵐 수 없는 선생님, 제게 글이 되어 남으셨습니다.     


“작가가 된다는 것은 변호사가 된다는 것과 다르고 의사가 된다는 것과 다르다. 공부를 많이 해서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글을 잘 써야 하지만 글을 잘 쓴다고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문학과 인간에 대한 지식이 풍부해야 하지만 지식의 풍부함이 한 사람을 작가로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다. 타고난 것일 수도 있고 훈련된 것일 수도 있는 어떤 특별한 능력이 필요하고, 그 능력이 발휘될 계기가 필요하다. 하기 쉬운 말로 흔히 미학적 재능이라고 부르는 이 능력은 둔중한 것에서 날카로운 것을 발견하고 단단한 것에서 무른 것을 발견하며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의 질서를 바꾸는 힘이다.”(황현산 「우물에서 하늘보기」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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