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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미 Oct 12. 2020

“우리가 남이가?”

 어쩌다 보니 하루에 한 편씩 사흘 내리 영화를 봤다. <82년생 김지영>, <시동>, 그리고 <가족의 탄생>. 관람 장소는 모두 안방극장이다.


 동명소설이 원작인 <82년생 김지영>. 이상증세(빙의)를 보이는 주인공 지영은 출산과 육아로 전업주부가 되었다. 친정엔 가부장제와 남아선호에 희생된 엄마가 그늘진 얼굴로 살아간다. 시댁에서 지영은 며느리로서만 존재한다. 단란해 보이는 자신의 가족 역시 그녀의 희생 위에서만 가능하다. <시동>에 등장하는 엄마는 가출한 아들에게 “무슨 짓을 해서라도 뒷바라지할 테니 대학가라.”라고 종용한다. 그런 엄마에게 주인공은, “엄만 엄마 인생 살아,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살게.”라며 맞받아친다. 엄마 인생 살라는 자식의 말에, “그래, 알았다.”하는 엄마가 있기는 한가. 속 썩이는 자식에게 “그럴 거면 어디 네 맘대로 살아봐라.”는 말은 “네가 누리는 모든 것이 내 간섭과 통제 덕분인 걸 깨달아라.”의 다른 표현이다. <가족의 탄생>에선 사랑을 쫓아 사는 엄마에게 ‘이기적’이라고 비난하는 딸이 있다. 자신은 이기적으로 살아도 엄마는 안 된다는 거다.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한 애인에게 ‘헤프다.’고 비꼬는 남자는 ‘헤픈’ 여자의 사생아다. 옴니버스인데 등장인물 중 ‘정상’ 인이나 ‘정상가족’은 하나도 없다. 

 

 작가 정희진은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인식은 사회적 약자뿐만 아니라 대다수 사람들에게도 폭력이 되기 쉽다.”라고 했다. ‘정상 가족’이란 게 뭘까? 부모와 자녀(경우에 따라서는 조부모를 포함한)로 구성된 가족? 수입이 안정된 아버지와 전업주부든 직장을 다니든 헌신적으로 가족을 돌보는 어머니, 정규 학교를 다니거나 취업에 성공한 자식이 존재하며, 소박하지만 있을 건 다 있는 집에 함께 사는, 혈연으로 맺어진 사람들을 일컫는 말인가? 그렇다면,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낮은 학력 탓에 땀으로 생계를 잇는 엄마가 가장이었던 우리 집이 ‘정상’ 가족이 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아무리 기를 써봐야 아버지가 주체인 가부장제가 규정하는 가족의 조건에 결정적인 결함이 있기 때문이다.

 

 정상 가족은 온전할까. 비록 폭력적 가르기임을 감수(甘受)하고 현재는 ‘정상’ 가족으로 분류되었다 치자. 언제, 어떻게 ‘비정상’의 영역으로 쫓겨날지 알 수 없다. 그러니 무슨 수를 쓰던 ‘정상’ 가족으로 남아야 한다는 압박은 쇼윈도 부부일망정, 무늬만 자식일지언정 정상가족의 껍질을 벗지 못하게 만든다. 온몸이 시퍼렇게 멍들었어도 얼굴만 깨끗하면, 문제가 없어 ‘보이면’, 정상인 것이다. 정상으로 보이기 위해 비정상으로 산다. 

  가족계획을 권고하거나 흡연의 위험성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며 국민을 계몽하던 국가가 요즘엔 정상 가족에 대해 가르친다. 한 부모 가정, 조손가정, 다문화가정(나는 이런 표현들이 끔찍하리만치 싫다.) 모두 ‘정상’ 가족이라고. 그러니 차별의 시선을 보내거나 ‘비정상’으로 여기지 말잔다. 여태 ‘비정상’으로 간주했음을 실토한 것과 진배없다. ‘비정상’들이 겪어 온 헤아릴 수 없는 차별과 고통의 책임을 온통 개인의 능력 부족으로 치부하던 이들이었다. 가족을 통해 계급을 재생산하고, 체제를 유지해오던 그들이 이런 공익광고(누구에게 이익인?)를 하는 속내가 궁금하다. 일부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기존의 ‘정상’ 개념으로는 시스템(가부장제 자본주의)을 유지, 확장시키기 어렵다는 판단에 기인한 건 아닐까. 아니면 부조리와 불합리를 스펀지처럼 빨아들여 무마시키던 ‘모든’ 가족이 더 이상 견뎌낼 수 없음을 알아챈 건가. 스펀지 역할은 거의 대부분 여성의 몫이었다. 여성의 서사 없이 가족 이야기를 하는 건 앙꼬 없이 찐빵을 만드는 일이다. 


  <시동>의 배경장소는 중국집이다. 온갖 이유로 혼자가 된 인물들이 부대끼며 지낸다. 있어도 없어도 괜찮은, 개방성 때문이다. 공간적 의미가 아니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진절머리 나게 강요되는 친밀감과 의무가 그곳에는 없다. 꼰대가 없다(전직 조폭 주방장의 엄청난 주먹 한 방 꼰대 질은 판단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뇌를 재정리한다). <가족의 탄생>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엔딩 크레디트였다. 기차역 승강장에 사람들(등장인물)이 이리저리 오간다. 같은 기차를 타기도 하고 내려서 다른 곳으로 향하기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보이는 이도 있다. 잠시 같은 시·공간에 머무는 관계, 가족이다. 가족의 정상 여부를 정의하는 일은 마블링하려고 풀어놓은 물감을 도형으로 부르려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다.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아닌,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스스로를 노출시킬 때 진짜 가족의 가능성이 열린다. 공부할 게 많다. 실천할 건 더 많다. 


 <82년생 김지영>은 《봄바람 영화사》가 제작했다. 우리 (봄) 바람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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