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검사결과표를 들여다보던 담당의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입을 뗐다. “2기와 3기 사이쯤 되네요. 수술하시고, 방사선 치료도 하시고, 잘 관찰하면서 경과를 보도록 하지요. 모양이 예뻐요, 이런 애들은 착해요. 겁먹지 마세요.” 나는 유체이탈이라도 한 것처럼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생이 참 버라이어티 하다는 생각을 했다. 삶의 총량이 곧 경험의 총량이라면 아주 묵직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거다. 물론, 이런 것도 경험에 포함된다는 전제 하에 말이다.
의사에게 ‘선고’를 받던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아주 특별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보도블록 조각처럼 흔해빠진 존재라고 여겼는데, ‘당신은 남들과 달라, 특별해! 이거 봐, 다른 사람들은 걸릴 확률 별로 없는 병에도 걸리고 말이야.’라는 귀밑 속삭임이 들렸다. 사춘기 시절, 아프지 않고 주사도 안 맞으며, 수술도 안 하는 그럴듯한 병에 걸려 일주일쯤 입원해보고 싶다는 상상을 했었다. 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학 일 학년 때 같은 과 남학생이 위암 진단을 받은 지 한 달도 안 돼 죽었다. 황당하고 어이없었지만 ‘낭만적’이라는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서 꼬물거렸다.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이었다.
전신마취는 무서운 마술이다. 눈꺼풀 한 번 깜박했을 뿐인데 몇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영화 필름 잘라내듯 내 인생에서 잘려 나간 시간이 생겼다. 이어지는 치료과정은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의학은 냉정했다. 나는 사람이라기보다 그저 개체로 취급됐다. 의료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친절했지만, 말이 실행되는 과정은 불친절했다. 퇴원 후 첫 외래진료를 받던 자리에서도 의사는 무심하게 일렀다. “경과 좋아요, 잘 지켜봅시다. 정기검사 잊지 마시구요. 처방해 드리는 약은 이제 평생 드시는 겁니다. 영양제가 아닙니다, 환자 분의 생명줄이에요. 친구라고 생각하세요.” 이런 걸 위로라고 받아들여야 하나. 약을 평생 친구라고 여기란다. 어쨌든 몸속 장기의 일부를 떼 버리는 바람에 모자라고(생물학적 인간 조건에 결격사유가 생겼다며 친구들이 그랬다), ‘특별’해진 나는 그 후로 고분고분 정기검사도 받고 약도 잊지 않고 복용한다. 여행 꾸러미를 챙길 때 일 순위가 약병이 될 만큼(시중에서 처방 없인 구할 수 없으므로).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다.’고 했나. 몸에 칼을 대고, 참기 힘든 통증으로 잠들지 못하는 밤을 지나(덕분에 일출을 여러 날 목격했다), 주렁주렁 꽂힌 링거 줄 때문에 돌아눕는 것조차 맘대로 할 수 없었던 시간을 보내며 나는 조금 순해졌다. 다른 이들의 육체적 고통에 마음이 어렵잖게 가닿았다. “허리 아파, 다리 아파.”를 입에 달고 지내는 엄마의 하소연이 가벼이 들리지 않았다. 아픈 건 아픈 거다. 속으로 견디다간 질식할 거 같으니까 말로라도 고통을 덜어내는 거다. 손톱 밑에 가시만 박혀도 빠질 때까지 온통 거기에 신경이 쏠리지 않던가. 다른 것에 눈 돌릴 겨를이 없다. 어리석게도, ‘칼을 맞고’ 서야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뜻을 알게 됐다.
겉보기에 멀쩡하니 말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내 상태를 모른다.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어깨를 토닥이고 난 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짐을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이다. ‘어쩌다…’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 눈빛, 한 명씩에게만 전달되는 비밀. 결국엔 모두 아는, 나만 모르는 나에 관한 비밀이 된다. 내 상태를 모를 거라 짐작한 상대가, “몸은 괜찮아?”라고 묻기라도 하면 당황한 나는 그저 멋쩍게 웃는다. 덤덤히 넘기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정기진료일은 죽을 때까지 병원에 다녀야 한다는 현실을 다시 자각하는 날이다. 병원에 가면 세상에 아프지 않은 사람은 없다. 살아나고 싶은 사람, 살아난 사람, 살아날 사람, 살아날지 알 수 없는 사람, 살아남기 어려운 사람들로 북적인다. 병원에 있을 때가 차라리 편하다. 그렇지만 그건 교문 앞에서 복장 불량으로 걸린 아이들이 지들끼리 모여 있을 때 느끼는 동질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우리는 모두 비슷하지만, 다르기도 하다. 각자 이름 붙일 수 없는 영역에 들어있다. 복권 추첨 통에 든 알록달록한 색공들처럼. 제 무게를 감당하며 자기 색깔로 살아간다. 삶에 번호(이름)를 매기지는 말자. 다를 뿐이다. 오월의 숲을 보면 “푸르다.”라고 말하지만, 시월의 숲을 보면서는 “아름답다.”라고 한다. 소나무 숲이라고 해서 소나무만 있는 건 아니다. 그늘에서 꿋꿋하게 살아가는 작은 관목이며 찾아야 나 보이는 봉싯한 버섯들, 땅 속 건강을 책임지는 작은 생물들이 없으면 소나무는 살 수 없다. 아름다우려면 온갖 것이 필요하다. 불행한 일이 많은 세상이지만 아름답기라도 해야 살아갈 힘이 나지 않겠는가. 누가 아는가. 아름다움이 불행(不幸)의 틈 사이로 균열을 일으켜, 다행(多幸)인 세상으로 바꾸어 갈지. 역지사지(易地思之)하면 소수(小數)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