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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미 Nov 02. 2020

광화문 연가(戀歌)

 “골목에 들어가 있자, 길에서 서성대면 눈에 띄어.” 동료가 옷깃을 잡아끌며 식당이 즐비한 골목으로 들어서 주위를 살핀다. 운동화 끈을 고쳐 맸다.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친다. 잠시 뒤, 바짝 붙어 섰던 그가 내 손을 움켜잡고 큰길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호헌철폐! 독재타도!” 


 광화문 사거리는 도로 폭이 정말 넓다. 한가운데까지 가는 데 시간이 꽤 걸린다. 초동(初動)이 어긋나면 대열은 깨진다. 자동차 경적 소리를 뒤로 하고, 차로에 모인 시위대와 스크럼을 짰다. 구호에 발을 맞춰 광화문 사거리를 향해 달린다. 가슴이 터질 것 같다. 공중으로 뿌려진 전단이 꽃비처럼 날린다. ‘됐다!’ 건물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사람들의 박수소리가 들린다. 인도(人道)에도 행인들이 늘어섰다. 그렇게 이삼백 미터쯤 달렸을까, “따따따 따, 따다닥!” 최루탄 발사 소리다. “철컥 철컥” 전경의 위협적인 군화 소리가 따라붙었다. 그 소리는 언제나 유치장 철문을 떠올리게 한다. 거기 가기 전 우선 닭장차(전경 수송버스) 안에서 흠씬 두들겨 맞겠지만. 


 시위대는 해산됐다. 이제 관건은 잡히지 않는 것. 일단 골목으로 들어가 가능한 한 멀리까지 가야 한다. 오늘 ‘동뜬(시위를 주동한) 학우가 잡히지 않아야 할 텐데…’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돈다. 가쁜 숨을 고르며 큰길로 나왔다. 버스와 택시가 오도 가도 못하고 엉켜있다. 가까이 있는 버스 문을 두드려 올라탔다. 고개를 숙인 채 복잡한 차 안을 비집고 뒤쪽으로 파고들었다. 버스 안을 수색하는 경우가 있다. 걸리면 바로 닭장차 신세다. 어서 출발하길 기다리는 수밖에. 밖에서 도보로 이동하는 건 더 위험하다. 옆 승객이 연거푸 재채기를 한다. 나한테 잔뜩 묻은 최루탄 가루 때문일 것이다. 그때였다. “버스 뒤지다 데모대 걸리면 우리도 잡혀가는 거 아냐? 기껏 돈 들여 대학 보내 놨더니, 세상 물정 모르고 데모나 해 쳐대고! 이러다 김일성이 쳐들어오면 어쩌려고 말이야!” 한 아저씨가 나 들으라는 듯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아이고, 고만한 자식이 있을 법 한 양반이! 학생들이 잡혀가면 좋겠어요?” 여자 승객이 맞받아친다. “내 가게가 요 근천데 오늘 장사 공치게 생겼으니 그러지! 지들이 먹여 살릴 것도 아니잖아!” “학생들이 괜히 그러겠어요, 배운 애들이에요! 뭐가 잘못된 게 있으니 저러지! 최루탄 뒤집어쓰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어, 오죽하면 그럴까! 이제 그만 해요!” 버스 안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여기저기서 승객들이 재채기를 해댄다. 그렇다고 창문을 열 수는 없다, 밖은 더 심하니까.


 내 앞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일어나더니, 나를 그 자리에 앉혔다. 당신 짐을 내 무릎에 올려놓더니 자리를 가로막고 섰다. 울컥했다. 엄마가 생각났다. 엄마는 내가 ‘데모’하는 건 모르는 눈치였다. 그저 딸이 어서 졸업해서 ‘살림밑천’ 노릇이나 해 주기를 학수고대할 뿐이었다. “학생 전부가 데모를 해도 넌 맨 뒷줄에서 흉내나 내라.”는 얘길 가끔 뉴스 보며 하는 게 다였다. ‘엄마, 미안해요. 그치만 세상이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내 앞가림하느라 눈 감고 살기엔 너무나 말도 안 되는 것들 투성이에요!’ 알루미늄 새시 부스 안에서 재봉틀을 돌리고 있을 엄마에게 혼잣말을 보낸다. 옳고 그름을 떠나 엄마에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일이었다. 


 운전기사가 원래 노선이 아닌 듯 한 차로로 버스를 모는 가 싶더니, 다시 제 노선으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무릎 위 짐 보따리에 고개를 파묻고 있던 나는 내릴 준비를 했다. 아주머니께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살살해, 다치지 말고!” 내 귀에만 들릴 만한 목소리로 건네는 말에 그만 눈물이 찔끔 나왔다. 최루탄 범벅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눈가에 손을 대자, 불에 덴 듯 화끈거린다. 학교로 돌아와 학생회의실 문을 여니 조용하다. 세수를 하고 가방에서 저녁에 있을 세미나 주제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그제야 허기가 느껴졌지만 바로 먹으면 토한다.




 “(…) 향긋한 오월의 꽃향기가 가슴 깊이 그리워지면

 눈 내린 광화문 네거리 이곳에 이렇게 다시 찾아와요.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아련해진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인생의 덧없음을 이야기하는 음악에, 늘 다른 장면이 겹친다. 노래 속 네거리에서 ‘그날’의 네거리가 떠오르는 것이다. 충무공 동상 앞에 서면 광화문 인근이 모두 눈에 들어온다. 한편에 <4·16 기억 공간>이 있다. 이순신은 제 국민을 수장(水葬)하는 나라를 상상이나 했을까. 광화문 광장은, 목소리를 뺏긴 이들이 흘리는 눈물을 받아줬고 뜨겁게 떨어지는 촛농을 견뎠으며, 노란 리본을 달고 항해했다. 내 운동화 자국도 기억할 것이다. 중앙청을 허물고 제 자리를 찾은 광화문 현판 너머 북악산이 편안해 보인다. 


 광화문에서 종로 쪽 끝에 동대문이, 오른쪽으로 청계천이 있다. 거기에, 내가 광화문 사거리로 뛰어들기 훨씬 전, 고통받는 노동자를 위해 몸을 불사른 이가 있었다. 그는 인간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인간적인 삶을 살기 위한 길을 죽음으로 보여줬다. 나는, 전태일이 그렇게 친구 하고 싶었던, 대학생이었다. 그의 친구가 되고 싶었다. 불의에 ‘침묵’하는 것은 그것에 ‘동의’하는 거라 여겼다. 그런 나의 뜨거움이 세상에 어떤 역할을 했을까. 근로기준법 준수가 마땅하게 되도록 했는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에 제동을 걸었는가. ‘완성’은 아닐지라도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 닦는 데 삽 한 자루의 노릇이라도 했는가. 


 의식주는 넘쳐나지만 관계는 야박해졌다. 경제적 부(富)의 달성을 성공한 인생으로 치환(置換)하는 세상에서 가난과 실패에 대한 공포와 불안은 각자도생(各自圖生)만이 살 길이라 외치게 만들었다. 청년이 제 몸에 불을 붙이고, 시위대가 곤봉에 두들겨 맞으며 최루탄에 토악질을 해도, 광장 바닥이 촛농과 노란 깃발로 덮여도, 우리들 삶에 기적 같은 변화는 찾아오지 않았다. 하루하루를 버텨내듯 살다 보면 더욱 교묘하고 정교해진 자본과 권력의 눈속임에 앞이 뿌예지곤 한다. 허우적대며 세상에 절망감이 들 때 광화문에 간다. 그곳에서, 운동화 끈을 고쳐 매던, 그 시간을 지나온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지금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나는 누구의 친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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