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무선 이어폰을 선물 받았다. 주변 소리를 차단하는 기능이 뛰어나, 고가(高價) 임에도 인기가 많다고 한다. 과연 소문대로였다. ‘능동 소음 제어’라는 이 기술은 작동시키면 음악 감상실에 앉아있는 기분이 들 정도다. 신기하게도 전철 소음은 들리지 않는데, 정차 역을 알리는 방송은 들리고, 옆으로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는 전기차인 듯 조용하지만 새소리는 또렷하게 들린다. 신(新) 문물임에 틀림없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으니 세상이 정말 조용하다. 눈앞에 펼쳐진 장면이 마치 소리를 끄고 TV를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그러다 이어폰을 빼는 순간, 소리가 와락 달려든다. 당황스럽다.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왔던 주변의 소리가 새삼 다르게 다가온다.
나는 말수가 적은 아이였다. 옆에 있는 줄도 모를 정도로 조용했다. 감정을 드러내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웃을 때도 소리를 내지 않았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젓는 것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난 귀는 열어두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빼놓지 않고 들었다. 가만히 ‘듣기’만 하다 보면, 말의 내용뿐 아니라 더 들리는 것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말하는 것과 다른 것을 원했다. 말의 내용보다 그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는 심정을 알아주기를 바라기도 했다. 여럿이 이야기를 나누지만 한 사람의 일방적인 주장만 오갈 때도 많았다.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자기 얘기로 덮어버리기도 한다는 것을, 들으면서 알게 됐다.
듣기만 하다 보니 말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말은 따뜻한 포옹일 수 있지만, 차가운 칼바람이 되기도 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어쭙잖은 말은 오히려 나를 가볍고, 속없는 사람으로 보이게 할 수도 있었다. 그건 절대 안 되는 일이었다. 편모슬하의 자식이 ‘애비 없는 후레자식’이란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매사 신중하고 반듯해야 하므로. 말수가 적은 내게 엄마는 ‘대하기 어려운 자식’이라고 했는데, 듣기 나쁘지 않았다. 동생들에겐 막말을 아무렇지 않게 쏟아내는 엄마였지만 내겐 그러지 않았기 때문이다. 섣불리 입을 열지 않는 것이 나를 지키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입을 닫고 듣기를 좋아하는 태도는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더 심해졌다. 별거 아닌 얘기를 비밀로 삼고 그 비밀이 서로를 묶어주었던 또래들 사이에서 나는 한 발짝 떨어져 있는 아이였다. 비밀을 발설할 위험은 없지만 비밀을 만드는 과정에 함께 하지 않은 ‘다른 세상’ 아이였던 셈이다. 머릿속에선 온갖 생각과 감정이 요동치지만 누군가와 공유하거나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렇게 소리는 나의 중심이 되어갔다. 아파트지만 낮은 층에 살아서 아침이면 새소리들 들으며 잠에서 깬다. 부지런한 경비아저씨의 비질 소리도 들리고, 늦었는지 뛰어가는 직장인의 구두 소리도 들린다. 빗방울이 목련 잎에 타닥타닥 떨어지는 소리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다녀오겠습니다!” 외치는 유치원 등원 인사, 허리 굽은 노인이 밀고 가는 보행보조기 바퀴 소리까지 모두 듣기 좋다. 얼마 전부터 매미가 떼 창을 시작했다. 어떤 이는 소음이라고 하지만, 나는 좋다. 시골 둥구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할머니의 부채바람에 머리카락이 귀밑을 간질여도 팔꿈치까지 물을 줄줄 흘리며 수박을 먹고 있는 기분이다. 아쉽게도 내게 그런 추억은 없다. 할머니 얼굴도 본 적 없고, 태어나서 지금까지 도시에서만 살아온 ‘도시 내기’다. 그런 내가 매미소리에서 그림 같은 장면을 듣는다. 소리에 집중할 때 느끼는 나만의 기쁨이다.
하지만 모든 소리가 듣기 좋은 것은 아니어서, 도심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많은 ‘소리’가 ‘소음’이 된다. 무엇보다 자동차 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자박 거리는 발걸음도 수십수백이 동시에 들리면 귀를 때린다. 상점의 광고방송이나, 기호와 상관없이 종일 틀어대는 음악소리도 소음으로 전락하고 만다.
듣고 싶은 소리를 찾아 휴대폰을 켜고 귀에 이어폰을 꽂는다. 눈 떠서 잠들 때까지 신경을 곧추세워 사방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는 피로감은 생각보다 무척 힘든 일이다. 보기 싫은 장면은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리면 된다. 귀는 덮개가 없으니 닫을 수가 없다. 비록 이어폰일망정 나를 둘러싼 소리로부터의 일탈이 가져다주는 편안함을 누리고 싶다.
‘능동 소음 제어’ 기능은 원치 않는 소음을 차단하기만 하는 게 아니다. 들어야 하는 소리까지 닫아버리는 역기능이 있다. 이어폰을 낀 채 문구점에 갔다. 직원에게 사려는 문구의 이름을 말하는데 자꾸 되묻는 거였다. ‘이 사람이 말 귀를 못 알아먹네!’ 하며 서너 번을 반복하다가 알아챘다. 이어폰 때문에 내 목소리가 너무 작았던 것이다. 손님이니 화는 못 내고 자꾸 되묻는 거였는데, 나는 직원이 못 알아듣는다고만 생각했으니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문구점을 나오면서 소음 차단 기능을 껐다. 음악과 주변 소리가 동시에 귀를 파고들었다.
그래도 소리를 없애고 싶어 하는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닌가 보다. 길을 걷다 소리를 채집하는 장면을 만났다. 아파트 단지와 공원 사이로 왕복 4차선 도로가 있는 길가였다. 공원 옆에 학교가 있어서 등하교 시간이면 분주하다. 음향기사인지, 개인적으로 소리를 모으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무 소음을 향해가는 세상에서 그는 어떤 소리를 빨아들이고 있었을까. 그가 듣고 싶은 소리는 무엇이었을까 궁금했다. 때로 위로가 되는 ‘하얀 거짓말’처럼 우리를 다독이는 ‘하얀 소리’를 모으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소리는 물건이 아니다. 소리는 사라진다. 사라지면 끝이다. 그러니 모으는 것이리라. 이야기도 그렇다. 입 밖을 나온 이야기는 공중에서 사라진다. 마음에 담지 않으면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말을 뱉고 나서 후회한 적은 많았지만, 들어서 후회한 적은 없다. 그것이 설사 상대의 가슴 아픈 사연이거나 나를 향한 원망이라 할지라도 그렇다. 듣는다는 건 상대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이다. 상대가 입을 떼는 순간이 자신의 세계로 들어오길 허락하는 것이니, 당당히 들어가도 된다. 그의 ‘집’을 샅샅이 둘러보는 일이다. 이야기로 들려주는 세계를 내 마음속에 펼치다 보면, 알지 못했던 나의 세계도 보인다. 그가 그려내는 내 세상이다. 그의 세상 덕분에 내 세계가 더불어 넓어진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그전에는 짐작하지도 못한 무수한 사연과 그 사연에 얽힌 마음의 길을 엿본다. 나와 사뭇 다르거나, 아주 비슷한 지점을 만나기도 한다. 사람은 제각각 고유한 존재라는 걸 깨닫기도 하고, 우리는 모두 비슷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동료의식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세상에 목소리 없는 것은 없다. 듣지 못하거나, 들으려 하지 않을 뿐이다. 나는 어떤 목소리를 듣고 있나. 고성능 이어폰처럼 듣고 싶지 않은 소리는 소음으로 치부해서 나로부터 차단한 채, 듣고 싶은 소리만 듣고 있지는 않은가. 더 많은 목소리, 더 작은 목소리도 들을 수 있도록 귓바퀴를 활짝 펼쳐야겠다. 마음을 귀보다 더 크게 열어야겠지. 입은 하나로 충분하니, 몸뚱이 구석구석 촉수 같은 귀를 더 달아야지. 들은 이야기로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면, 그때는 열린 마음으로 이야기를 들어줄 믿을 만한 이에게, 들어서 넓어진 내 이야기를 할 거다. 내가 들은 말들이 내 삶과 어떤 관계를 맺을까. 내가 하는 이야기를 내가 들으면서 비로소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갈 것이다. 천 개의 귀를 달고 하나의 다른 귀에 속삭이는 일이 내 업(業)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