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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미 May 10. 2021

봄의 비행

 거실 바닥에 창틀 무늬대로 펼쳐지는 빛에 이끌려 자리에서 일어선다. 현관에 던져져 있던 운동화를 꿰신고 집을 나서 백 여 걸음 남짓 거리의 공원에 다다른다. 예상보다 붐빈다. 둘레를 따라 깔린 트랙 위를 바지런히 걷는 사람들이 경보대회 출전자들 같다. 방해가 되지 않도록 트랙을 피해 뽀얀 볕을 받으며 설렁설렁 걷다 보니 공원 끄트머리에 있는 시립 도서관 앞이다. 안으로 들어선다. 여기도 사람들이 많다. 빈자리를 찾아 앉으며 무심히 양 옆으로 시선을 옮긴다. 왼편에 앉은 아저씨 책상 위에 ‘적중 공인중개사 예상문제’라고 인쇄된 페이지가 펼쳐져 있다. 이십 대 후반쯤일 오른쪽 여성은 책상 위 노트북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고 있다. ‘저에게 진정한 성공이란…’으로 시작하는 한글 창이다. 자기소개서를 쓰는 모양이다. ‘상반기 취업 완전정복’이라는 책이 함께 보인다. 내 손에 들린 건 ‘창업, 이렇게 하면 성공한다.’ 한 책상을 차지한 셋의 고민이 같은 모양인가 보다 하는 마음에 씁쓸한 웃음이 배어 나오려던 찰나, 의자가 들썩댄다. 글쎄, 이렇다니까, 아니 도서관 의자로 3인용 벤치를 두는 데가 어디 있담, 이런 건 조금 전 지나 온 공원 나무 밑이나 둬야지…. 불편하기 짝이 없다 툴툴대는데 바닥에 닿아 있던 발이 들리는가 싶더니 벤치가 공중으로 붕 떠오른다. 뭐지, 지진인가,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보지만 다른 의자나 책상은 그대로다. 사람들도 책에 코를 박고 꿈쩍도 하지 않는다. 얼떨결에 양 옆 사람의 손을 움켜잡는다.


 갑작스런 공중부양에 자소서녀도 놀라고 당황한 표정인데 공인중개사 아저씨는 복권 당첨이라도 된 듯 흥분한 얼굴이다. 그러더니 알고 있었느냐, 여기 삼 년째 드나들며 들은 얘기다, 열람실 어딘가에 일명 날개 의자가 있다, 어느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람을 앉힌 채 공중을 떠올라 하늘을 날아다닌다, 단, 그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 소원이 일치해야 한다더라, 뭐 대강 이런 얘기를 후다닥 쏟아놓는다. 벤치는 열람실 천장에 머리가 닿을락 말락 할 정도의 높이까지 다다르더니 환기를 위해 열어 둔 창문을 통해 터널을 빠져나가듯 밖으로 나온다. 꽃향기와 흙냄새가 섞인 시원한 바깥공기가 벤치를 감싸 안는다. 우리 셋은 누가 뭐라 하기도 전에 잡은 손에 힘을 준다. 


 날개 의자는 공원 위를 스키장 리프트처럼 천천히 유영한다. 녹색 트랙 위를 걷는 사람들이 공장 컨베이어 벨트 위를 흐르는 상품들 같다. 잎이 나오기 시작하는 벚나무가 바람에 몸을 흔들자 꽃비가 흩날린다. 땅에 착지하는 대신 하늘로 떠오른 꽃잎 하나가 발등에 올라앉는다. 가로수나 건물에 방해받지 않고 내리쬐는 햇빛은 연한 크림색이다. 이렇게 볕을 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고 공인중개사 아저씨가 혼잣말을 한다. 공원을 벗어날 즈음 진한 향기가 코에 닿는다. 근처에 라일락이 있나 봐요, 자소서녀가 환한 얼굴로 속삭인다. 


 마을 가까이에 산이라고 하기에는 낮으나 언덕이라기에는 가파른 산책로가 있다. 벤치가 그쪽을 향해 나아간다. 큰길을 건너야 하지만 우리는 신호등색이 바뀌길 기다릴 필요 없이 앉은 채로 도로 위를 훌쩍 건넌다. 아라비안나이트에 등장하는 하늘을 나는 양탄자가 문득 떠오른다. 6차선 도로 양옆으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늘어선 개나리가 한창이다. 여름부터 겨울까지 동네 울타리 노릇이나 하더니 이제야 샛노란 꽃을 피워 길을 밝힌다. 시절마다 하는 일과 빛깔이 다른 게 개나리뿐일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산자락 초입을 널따랗게 차지한 배 밭을 지난다. 수확을 위해 키를 맞춰 키운 덕에 위에서 내려다보니 하얀 꽃방석이다. 위에 앉으면 향기가 온몸에 스며들 것만 같다. 왼쪽 아저씨가 산 이쪽은 진달래가 모두 져버렸지만 반대편으로 넘어가면 아직 한창이라고, 그쪽도 보러 가자고 한다. 인강들을 시간이라며 자소서녀가 미적거리자, 지금 아니면 언제 또 보겠느냐, 금방이다, 부추긴다. 드디어 산등성이를 넘어서려는 순간, 뒤에서 뭔가 쿵 부딪히더니 벤치가 한쪽으로 기우뚱한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지나가다가 그만.” “네? 어?” 산 저편으로 막 넘어가려는 참이었는데…, 날개 의자는? 어느새 벤치는 사라지고 나는 둥근 등받이가 달린 진회색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다. 공인 중개사 아저씨도 자소서녀도 온 데 간 데 없다. 그들이 앉았던 자리 책상 위에는 ‘코로나 19 방역을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 자리입니다.’라고 쓰인 안내문만 붙어 있다. 날아다니는 봄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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