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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미 Mar 15. 2021

왼손 쓰기

 뇌의 활동이 무뎌지지 않길 바란다. 얼굴에 주름이 늘어가고 거울 앞에 서면 몸이 중력의 지배를 받는다는 걸 절감하지만, 뇌의 기능만큼은 총명함과 팽팽함을 유지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요란하지 않아 남들 눈에 티 안 나게 시작한 일이 왼손 쓰기. 나는 오른손잡이라 손으로 하는 일의 대부분을 오른손이 맡아한다, 왼손은 그저 거들뿐이다. 박수를 치거나 옷의 단추를 채울 때, 무거운 짐 때문에 오른손이 힘들 때, 또 뭐가 있더라… 의도적으로 왼손을 쓰기 시작했다. 오른손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양손을 고르게 사용하면 뇌가 균형 있게 작동하면서 활동이 활발해진다는 귀동냥으로 시작한, 일종의 뇌 운동 프로젝트인 셈이다.


 먼저 쌀 씻기에 도전했다. 그동안 오른손만 사용했었다. 쌀알이 부서져라 북북 문질러대다 보면 일종의 희열이 느껴지기도 한다. 쥐어박고 싶은 누군가가 생겼을 땐 그 사람이겠거니 하고 더 힘을 주기도 하니까. 그 일을 왼손에게 맡기기로 한 거다. 처음엔 힘 조절이 안 돼 쌀알이 양푼 밖으로 흩어졌다. 그 바람에 배수구로 흘러가버린 쌀이 한 솥은 족히 더 될 거다. 그렇게 시작한 왼손으로 쌀 씻기 경력이 쌓여 이제는 제법 오른손의 실력과 맞먹을 정도가 되었다. 비슷한 무렵에 왼손으로 수저 사용하기도 병행했다. 쌀 씻기보다 난이도가 훨씬 높은 도전이었다. 그 결과, 젓가락은 아직 유치원생 수준이지만 숟가락질은 자연스러워졌다. 실력을 키우는 데 연습만 한 게 없다는 걸 증명했다. 왼손이 보조 손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건 큰 덤이다.


 저녁 땅거미가 다가오듯 시나브로 기억력이 약해지는 걸 느낀다. 딱 그만큼 건망증의 힘이 커진다. 활발한 뇌 운동이 왼손 쌀 씻기와 수저질만으로는 유지되긴 어려운 모양이다. 나를 잊는 천형(天刑), 치매가 어느 때부턴가 요양병원에만 있는 건 아니라는 불안이 일었다. 내 삶에 끼어들게 하고 싶지 않다. 하긴 누군들 그걸 반기겠는가. 익히 알고 있던 유명인의 이름이나 특정 브랜드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경우가 잦다. 머릿속이나 입안에서만 맴돌 뿐, 불투명 유리창 너머로 사물을 바라보는 것처럼 도무지 명료하지 않아 답답했다. ‘머리카락을 쥐어뜯어’도 소용없었다. 


 며칠 전에도 그랬다. 한때 서민이 애용하는 중저가 수입 의류 대표 노릇을 했으나, 전국적 불매운동 때문에 여러 점포가 폐업을 하고, 남은 매장들 역시 빈 바람만 손님 노릇을 하는 지경에 이른 곳이었다. 비슷한 생활용품 브랜드 이름은 생각나는데 그곳만 새하얬다. 우리말 ‘가’부터 시작해서 ‘힢’에 이르기까지 되는대로 엮어보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인터넷에 접속하거나 내게도 그 회사 옷이 몇 벌 있으니 상표 라벨을 들춰보면 단박에 해결될 문제였지만 그건 나의 뇌가 퇴화되었다는 걸 인정하는 것만 같아 시도하기 싫었다. 어떻게든 생각을 해내고 말겠다는 오기가 발동했다. 한참을 끙끙대다 브랜드 로고의 형체가 생각났다. 사각형이었지, 그 안에 영어로 브랜드명이 쓰여 있었어, 첫 글자가 뭐였더라, 아, 지금 앉아있는 의자 등받이에 걸린 조끼에 로고가 찍혀 있을 텐데, 고개를 돌려 확인하기엔 자존심이 상한다, 여태 낑낑댔는데 말이야… 혼자 구시렁대다 갑자기 생각이 났다. 맞다, 그거였어, 아, 왜 그 정도를 가지고 여태 애를 먹은 거람, 이거 혹시 진짜 뇌가 힘이 빠졌다는 걸 반증하는 거 아냐? 떠오르지 않던 이름이 생각나면 통쾌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게다가 따지고 들자면 나는 퇴출될 처지에 놓인 브랜드 이름을 끝까지 기억하려고 애쓰는 꼴이었다. 뭐 하는 거야, 도대체.


 식구들끼리 영화를 보다가 출연배우의 이름이나 이전 작품이 궁금해지면 아이들은 곧장 휴대폰을 집어 들고 검색을 시작한다. 나는 그 배우와 연관된 것들을 떠올리며 궁금증을 해결하려 머릿속이 분주해진다. 금방 알 수 있는 걸 뭘 그리 애쓰느냐 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러고 싶다. 내 머릿속의 저장소를 뒤져 먼지 덮여 있던 기억을 깨워 일으키다 보면 나의 시간이 함께 딸려 나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누구와 함께 봤는지, 어떤 계절이었는지, 영화를 본 뒤 무얼 했는지까지. 아직은 기억력이 그런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안도감이 밑자락에 깔려 있음은 물론이다. 어떤 이름이나 지명은 끝까지 생각나지 않기도 한다. 그럴 때는 인터넷의 도움을 받거나 아예 모르는 채로 덮어둔다. 뭐 기억나지 않는 것도 좀 있는 게 당연하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모두 기억하려다간 머리가 터지고 말 거라며.


 기억 속에 있던 것들이 하나둘씩 지워져가고 있다. 어떤 것들이 사라졌는지는 그걸 떠올리려 해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 내게서 사라져 어디로 갔을까. ‘코코’라는 애니메이션(지금 이 영어단어도 생각나지 않아 애를 먹었지만 쓰는 게 바빠 인터넷의 도움을 받았다, ‘만화’라고 쓰면 어때서? 내 글에 배어든 허세를 지우는 건 또 하나의 과제다. 일패!)에선 죽은 이들은 산 이들의 기억에서 사라질 때 진짜 소멸된다고 한다. 내 기억에 떠오르지 않는 사람이나 장소, 이름들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걸까. 아니면 그 안에 함께 있던 내가 사라진 건 아닐까.


 치매를 앓을까 염려하며 시작했던 왼손 쓰기는 단순한 뇌 운동 차원이 아니었다. 나는 해가 지날수록 활동력이 줄어드는 뇌도 걱정스럽지만 기억이 빠져나간 빈 몸뚱이가 될까 두렵다. 사는 동안 잊지 말아야 하 것들이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그렇게 지나온 시간이다. 나를 이루는 것에는 기억도 있다, 그것도 아주 큰 자리를 차지한다. 어쩌면 세상을 떠날 무렵의 인간이란 기억저장소에 다름 아닐지도 모른다. 기억이 남아 있지 않은 탄소 덩어리로 흩어지는 건 슬픈 일이다. 그나저나 기억이 머무는 곳이 정말 머릿속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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