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미아 Jan 09. 2023

내 천사, 그 애를 위해서라도.

어제는 딸과 엄마와 함께 외식을 하러 점심에 레스토랑에 다녀왔다. 조잘거리며 음식을 먹는 딸이 너무 귀여웠다. 이제 다섯 살이 된 딸은 아직도 작다. 조그만 발에 조그만 손에 조그만 머리통. 그 애는 모든 게 다 작고 귀엽고 소중하다. 그 애에게선 좋은 냄새가 난다. 너무 작은 입은 조금만 뭘 먹어도 그 냄새가 진동을 한다. 딸기를 먹으면 딸기 냄새가, 짜파게티를 먹으면 짜파게티 냄새가 난다. 확 퍼진다. 그 애의 작은 입이 오물거릴 때마다 나는 행복감을 느낀다. 뭔가를 먹고 있는 그 애의 얼굴은 천사같다. 사랑스럽다. 나는 딸의 부드러운 볼에 몇십 번의 키스를 남겨 주었다. 볼을 우물우물 씹고 싶다. 뒤통수에 이를 박고 갉아먹고 싶을 정도로 귀엽다. 내 사랑하는 딸, 나는 딸과 기어코 헤어질 수 없다. 내 조증이 아무리 악화된다고 해도, 그 애를 전 남편에게 보낼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나는 그 애와 헤어질 수 없다. 내 분신, 내 핏줄, 내 천사. 내 천사...


내 천사는 지금 할머니 집에서 쿨쿨 자고 있을 것이다. 내 천사는 파란색 잠옷을 입고 이불 위를 뒹굴거리고 있을 것이다. 내 천사가 태어나던 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감히 단언컨대 내 생애 최고의 날이라고 할 수 있었던 출산날. 2019년 10월 11일 12시 2분에 그 애가 태어났다. 내가 평생 동안 짊어지고 가야 할 그 핏덩이, 그 육체, 그 영혼. 새로운 삶. 조리원에서 그 애의 얼굴을 수백 번이고 더 들여다 봤다. 아름다웠다. 예뻤다. 내가 품고 잉태한 그 생명이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눈물이 났다. 아무리 내게 자격 없는 엄마라고 누가 욕을 한다 할지라도 내 딸, 내 천사를 향한 내 사랑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 애가 너무 좋다. 새삼스럽게 나는 내가 엄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를 엄마라고 불러주는 작은 사람.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사랑과 충만감에 휩싸여 그 애를 바라본다. 그리고 자각한다. 그 애에게서 나는 영원히 떠날 수 없을 것임을.


나는 조울증, 양극성 정동장애 환자이다. 그리고 싱글맘이다. 그리고 이혼인이다. 그리고 프리랜서이다. 나는 무엇 하나 고정되지 않았다. 언제든 변할 수 있고, 언제든 튀어오를 수 있는 상황이다. 조울증은 나를 계속해서 괴롭힌다. 이혼했다는 사실은 벌컥벌컥 나를 덮친다. 방구석에 누워 가끔 이혼 전 사진을 보면서 운다. 전 남편을 생각한다. 아직도 그렇다. 남친이 있을 때도 나는 전 남편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 시절이 너무나도 그리워서, 아까워서 울었다. 그렇다고 돌아가고 싶은 것도 아닌데, 나는 그렇게 가끔 이혼 전의 시간들을 그리워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가슴이 선득해진다. 일거리가 떨어지면 불안이 급습한다. 나는 불안이라는 유령과 함께 동거 중이다. 밤마다, 밤마다, 그 유령과 함께 잠들고 일어난다.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나는 쓰지 않으면 못 견딘다. 내 불안을 이렇게라도 풀어놓지 않으면 목에 뭐가 막힌 듯 살 수가 없다. 내 불행한 이야기를 여봐란 듯이 풀어내고야 마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라도 좋아? 하면서. 이런 이야기라도 읽어줄 수 있어? 라는 듯이. 내 인생의 서사는 지금 어디쯤에 와 있을까. 나는 언제 죽을까. 나는 언제 하늘의 별이 되어 스러져 갈까. 죽기 전까지 쓰다 죽고 싶다. 내 몰아치는 광증들을 풀어낼 공간이 필요하다. 독자가 필요하다. 내 인생을 읽어 줄 독자가. 그래, 나는 관심종자다. 작가가 관심종자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쓰는 사람은 필히 읽는 사람을 원한다. 읽히길 바라는 것이다. 내 슬픔을, 내 아픔을, 내 고독을, 내 쓰라림을 읽어줄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당신들을 원한다. 간절히 원한다. 간절히 바란다.


내 인생을 관조해 본다. 멀리서 관조해 본다. 나는 조증에 시달리고 있고 다섯 살이 된 딸 아이를 양육하고 있다. 그리고 입원을 앞두고 있다. 나는 내 몸을 잘 돌보지 못해 볼품없이 말랐다. 그 몸에 커피와 담배를 들이붓고 있다. 불안 초조에 시달린다. 인간의 본연적 고독을 견디지 못해 허우적댄다. 내게 주어진 몫의 고독을 감당해 내지 못하고 있다. 내게 주어진 몫의 기쁨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다. 그래, 나는 결국 고독을 이기지 못해 이러고 있는 것이다.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스스로 짊어지고 가야 할 외로움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이러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그 외로움을 감당하나. 나는 바스라지고 서글퍼졌다. 외로움이란 펀치에 제대로 당한 것이다.


다시, 나는 내 천사를 생각한다. 내 인생에 와준 그 애의 작은 뒤통수 따위를 생각하는 것이다. 누가 감히 날더러 딸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누가 감히 날더러 딸을 아끼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딸을 향한 내 사랑은 내 무엇도 고정되지 않은 흔들리는 인생에서 단 하나, 분명한 사실이고 진실인데. 나는 마음을 고쳐먹는다. 그 애에게 내 사랑을 퍼부어주리라고 결심한다. 조증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도 그 애에게 따뜻한 밥 한 입을 넣어 주리라 결심한다. 아무리 아프고 힘든 날이라도 그 애를 재울 때 사랑의 언어로 말을 걸어 주리라 결심한다. 나는 그 애를 사랑한다. 그 애를 너무 사랑해서 아프다. 내 아픔과 슬픔 따위와는 상관없이 쑥쑥 커가는 그 애가 너무나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 애는 나를 이끈다. 내가 그 애를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생명을 발견할 수 없다면, 내 자식에게서라도 생명을 보았으면 한다. 넓은 거실에 덩그러니 혼자 앉아 티비를 보는 그 애의 작은 몸을 볼 때, 나는 눈물이 왈칵 난다. 어쩌자고 저 애를 낳았을까, 어쩌자고 저 애를 두고 이혼했을까, 어쩌자고 나는 저 애를 두고 이렇게나 아픈 걸까, 어쩌자고 나는 저 사랑스러운 생명을 이렇게나 방치할 수밖에 없는 걸까 생각한다. 나는 내 안에서 새로운 생명의 물결을 발견해야만 한다. 축축해져야만 한다. 왈칵 젖어 흘러야만 한다. 콸콸 쏟아져 내려야만 한다. 그 생명의 물결로 그 애의 영혼을 적셔줘야만 한다. 그 애를 나와 같은 슬픔에 젖게 할 수는 없다. 나는 다시 일어서야만 한다. 힘을 내야만 한다. 몸부림쳐야 한다. 살려고, 살려고, 발악해야만 한다. 나는 먹고, 걷고, 스러진 몸을 일으켜야만 한다. 뜨거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삶의 작은 기쁨들을 도처에서 발견해야만 한다. 내 자식을 위해서라도 나는 살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아도 영원하지 않은 삶, 짧은 삶, 언제 끝나지 모를 삶, 이 삶을 아껴줘야 한다.


내 천사, 그 애를 위해서라도,

나는 먹고, 씻고, 다시 일어나 힘을 내 본다.

그 애의 뺨에 천만 번의 키스를 남길 것이다.

살려고 살려고 발버둥 칠 것이다.

억겁의 분노와 슬픔이 날 덮쳐도,

나는 그 무게를 거뜬히 감당해 낼 만한 강함을 찾아내리.

기필코 승리하리.

내 천사, 그 애를 위해서라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