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 "이제 거기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100일 글쓰기 프로젝트 100-25

by 두지

보자마자 사랑에 빠지는 영화들이 있다. 시작한 지 10분도 안되어 나를 사로잡아버리는 영화. 새로 시작하는 연인과 보내는 한때처럼, 지나가버릴 줄 알기에 한 순간 한 순간이 애틋하고 아련한 장면들. 어제의 화양연화가 그랬다.


화양연화는 내게 그저 ‘봤던 영화’ 정도의 기억으로 남아있는 영화였다. 분명 보긴 본 것 같은데, 언제 봤더라? 내용이 뭐였더라? 어제 곰곰이 생각해보니 대학교 때 책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였던 것 같다. 비디오를 틀어놓고 손님이 오면 정지를 시켰다가 다시 보기를 반복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기억에 안 남지. 화양연화 같은 영화를 감히 그딴 식으로 보다니.


모든 것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 모든 것이 내 안에 남아 오랫동안 나를 따라다닐 것 같다. 영화의 색감. 분위기. 녹슬고 그을은 듯한 배경. 오래된 전등갓. 소나기. 홍콩의 좁은 골목길. 국수를 담은 보온병. 낡은 문. 분홍색 립스틱. 구두 소리. 계단을 내려오는 옴직임. 가려진 방 안. 거울 속 그녀. 연습인지 실제의 말인지 헛갈리는 그들의 대화. 담배연기. 상처.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는 대화. 이런 상처를 준 그들같이 되고 싶지 않다는 몸부림. 하지만 시작돼 버린 사랑. 어찌할 수 없는 꿈. 오래된 사원 안에 묻어버린 비밀. 영원히 나올 수 없는 비밀. 그렇게 끝. 뼈아픈 끝.


"그는 지나간 일들을 기억한다. 먼지 낀 창틀을 통해 모든 것을 볼 수는 있겠지만 이제는 희미하기만 하다"

"그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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