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글쓰기 프로젝트 100-26
머리를 했다.
머리가 지저분하다. 머리를 빗어도 지저분하다. 아예 곱슬이거나 아예 생머리일 것이지, 이 어정쩡한 머리 상태는 뭐란 말인가? 마치 내 인생 같군. 근래 사무실 동료 몇몇이 머리를 변신했다. 새해가 되서일까? 새해가 되면 뭔가 변신을 해야 할 것 같은데 갑자기 살을 뺄 순 없고, 느닷없이 부자가 될 수도 없는 일이니, 가장 만만하면서도 크게 드러나는 변화를 헤어에 주는 것일까? 새해가 되었기 때문에 머리를 바꿨다는 말은 뭔가 클리셰인데, 오늘 내가 그 클리셰의 주인공이 되었다.
저녁 7시. 늦은 시간이라 가도 괜찮을지 전화를 했는데 오란다. 웹사이트에 있는 가격표를 보고, 현금이면 40%를 할인해준다는 광고를 보고 간지라 6~7만 원의 지출을 예상했는데 웬걸. 미용실 언니는 각각 6만 원, 9만 원짜리인 일반 펌과 디지털 파마는 펌 취급도 하지 않았다. 디지털 파마와 세팅 파마는 무슨 차이예요? 디지털은 약을 갖다 바르는 거고 세팅은 $#%@#$.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언니는 같은 말을 반복한다. 나는 이해를 포기했다.
세팅과 매직 세팅이 있는데 가격엔 큰 차이가 나지 않아요. (무려 6만 원이 차이 나는데!) 추천드리고 싶은 건 매직 세팅과 클리닉이에요. 펌은 40%, 클리닉은 50% 할인가로 들어가요. 당장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미용실이란 한 번 들어가면 머리를 지지고 볶기 전까지는 못 나오는 구조로 되어있다.
세팅만 할게요. 클리닉 안 하시고요? 네. (그럼 할인받아 7만 2천 원에 머리를 할 수 있다!) 휴, 머리가 많이 상하고 부시시해져서 안될 텐데. …. 그럼 일단 샴푸 하시고 천천히 생각해보세요. (이 언니 고수다.)
결국 난 샴푸실로 끌려갔고, 때로는 부드럽고 때로는 강한 언니의 손길에 무릎을 꿇어버렸다. 젖은 머리로 돌아간 거울 앞. 매직을 안 하실 거기 때문에, 파마 안 들어간 위쪽은 조금 부스스할 거예요. 이렇게 붕, 뜰 거예요. 네. …. … 매직 세팅은 얼마라고 하셨죠? 언니가 다시 계산기를 가져왔다. 여기에 이렇게 할인을 하면 10만…. 근데, 이거보단 차라리 클리닉을 하시는 걸 추천드려요. 매직은 제가 위에 넣어드릴 수 있어요. 진짜. 클리닉 꼭 하세요. 언니는 약간 자존심이 상한 것처럼 보였다. 클리닉을 안 하면 머리가 예쁘게 안 나올 텐데, 그러면 본인의 커리어에 커다란 흠이 갈 게 아니냐는, 나를 원망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네 뭐 그럼…. 클리닉 하셔야 본인도 마음에 들고, 보는 사람도 좋고, 무엇보다 제가 좋아요. 네…. 아 내 통장. 월급날이 내일모레라 다행이다.
언니는 열심히 내 머리를 만졌다. 샴푸를 하고, 약인지 트리트먼트인지 모를 걸 바르고, 내 머리를 비닐로 씌우고, 열로 가열하고, 다시 샴푸를 하고, 머리를 동글동글 말아 고정시켰다. 다시 열이 가해지고 머리를 풀었는데 이건 정말…. 아니다… 앞머리 왜 이래. 침착해야 해. 이게 끝이 아닐 거야. 근데 이 앞머리는.. 어쩌지.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앞머리를 쓱, 손으로 빗었다. 앞머리 그렇게 안 나오는 거 아시죠? 네? 이게 다가 아니에요. 이제 중화시켜야지. 설마 내가 머리를 이렇게 해놨을까 봐. 네…
머리에 뭔가 시원한 걸 바르고 다시 샴푸를 했다. 마지막 샴푸는 예술이었다. 언니가 머리를 마구 마사지를 해 줬는데 머리 옆쪽이 특히 시원했다. 정수리 쪽은 너무 아팠다. 아파요? 네. 큰일이네. 왜요? 아프면 혈이 뭉쳐있다는 거거든요. 스트레스 많이 받는구나? 글쎄요…. 지금은 어려서 괜찮지만 나중엔 혈이 뭉친 곳이 탈모될 수도 있고 그래요. 샴푸 하시고 자주 마사지해주세요. 네.
머리를 말렸다. 이제 끝이겠지. 이 미용실에 발을 디딘 지 세 시간이 넘었다. 마감시간이 9시 반인 걸로 알고 있는데 10시 반이 다 돼가고 있다. 내가 늦게 와서 괜히 고생시키네. 기장 추가 비용 만원 깎으려고 했던 게 미안해진다. 위쪽 매직까지 원장님 몰래 슬쩍해줬다는데. (괜히 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머리는 망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파마 치고 자연스럽다. 일주일 정도만 비웃음을 감당하면 사람들이 적응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이다. 언니는 내 머리를 말리며 에센스 사용에 대해 신신당부했다. 머리를 이렇게 중간쯤 말리고 에센스를 발라줘요. 그다음에 머리를 바짝 말려요. 앞쪽으로 말아도 되고 뒤쪽으로 말아도 돼요. 그다음 또 에센스를 발라요. 네…. 아 언니 잘 안 바르실 거 같아. 아 뭐 네…. 열심히 바를 거라 저랑 꼭 약속해요! 풉. 뭐 네.
돈을 내고 인사를 하고 나왔다. 언니는 자랑스러워 보였고, 나는 내 머리 따위에 언니의 세 시간 반을 앗아간 게, 세 시간 반의 고된 노력에서 만원을 깎으려고 한 게 조금 미안해졌다. 집에 오자 11시다. 남편은 나를 기다리다 곯아떨어져있다. 갓 뽑은 내 세팅 머리 봐줄 사람은, 역시 우리 동네 미용실 언니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