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할 수 있는 것들.

투덜거리기 4

by 두지


나이가 어떻게 돼요?

서른 하나요.

에이, 그럼 아직 애기네.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예전에는 이런 대화를 하는 상황이 가끔 있었다. 누군가의 내 나이를 묻는다. 내 나이를 들은 상대방은 나보고 아직 어리다고 한다. 내 나이에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혼을 내듯 외친다. 본인도 3~4살 정도밖에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무엇이든이라니. 무엇이든 대체 뭘 할 수 있다는 소리일까? 뭘 해야만 한다는 의미인 건가? 무엇이든 시작하기에 전혀 늦지 않은 나이다, 이 말인가? 근데 당신도 별로 나이 안 많잖아. 당신과 나 사이의 3~4년이, 그렇게 큰 차이야?


그 뒤로 사 년이 지났고 나는 서른다섯이다. 이제 내 나이를 물어보는 사람도 별로 없고 내 나이를 듣고 ‘아직 애기네!’라든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는 별 쓸데없고 영양가 없는 소리를 하는 사람도 없다.


아무도 나에게 외쳐주지 않으니 궁금해진다. 이제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고 자신 있게 외칠 나이는 아닌 건가?


먼저 그 ‘무엇이든’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자.


사람들이 말하던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건 어떠한 성취나 업적을 의미하는 터이다. 예를 들어…. 이 회사는 비전이 없으니 퇴사 후 대기업에 취직한다. 아니면…. 먼 미래를 생각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 대학원에 간다. 사업을 해본다. 아니면…. 그 밖에는 별로 떠오르는 게 없다. 사람들이 말하는 ‘젊으니’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말에는 쿠키커터 같은 규정성이 있다.


하지만 ‘무엇이든’까지는 못 되더라도, 아직 나는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특히나 그게 성취나 업적과 관련 없는 거라면 말이다. 이따금 갑갑한 기분이 들 때면, 예를 들어 두 다리 꿋꿋하게 한 시간 가량 서 있어야 하는 출근길 전철 안에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1. 가방 한 개만큼의 짐만 싸들고 소도시로 내려간다. 이름을 들어본 적 없는 작은 도시면 더 좋다. 어딘가에서 며칠 묵고 도시를 둘러보다, 내가 마음 편하게 하루에 4시간 정도 일할 수 있는 곳을 알아본다. 거기서 일한다. 나머지 시간에는 글을 쓰고 산책을 한다.


2. 성격을 바꿀 수는 없으니 연기를 배운다. 내가 아닌 타인 인척 가장하는 것이다. 그걸 회사에서 써먹는다. 나 같지 않은, 그러니까 매사에 적극적이고 상냥하고 상사에게 잘 하는 이른바, 사회생활을 잘 해서 승승장구하는 누군가가 되어본다. 물론 그 승승장구란 건 보장할 순 없지만. 2번은 딱히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아니다. 그런 짓은 귀찮으니까. 하지만 나는 지금 어디까지나 내가 하고 싶은 게 아닌, 할 수 있는 걸 생각해보고 있는 거다.


3. 자격증을 딴다. 예를 들면 맹수 조련사 자격증 같은 거. 그 후 동물원이나 야생동물보호센터에 취직한다. 호랑이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조련사가 된다.


4. 수영을 시작한다. 바다 수영 대회에 나가 금메달을 딴다. 혹은, 바다 수영을 하며 돌고래와 논다. (그게 가능한가?)


5. 미국 소도시의 클럽을 찾아간다. 돈을 내도 좋으니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한 곡만 부르게 해 달라고 클럽 사장에게 부탁한다. 생각해보니 이건 영화 <탠저린>에 나왔던 상황이다. 여하튼, 무대 앞에 서고, 관객석은 깜깜하고, 내 눈 앞은 더 깜깜하고, 나는 체구도 작고 마음도 소심한 아시아 여성인데 무대 위에 홀로 서 있고, 노래는 더럽게도 못 부른다. 하지만 끝까지 부른다.


6. 어제 <엉망>이라는 전시를 봤다. 전시물들 중에 작가가 자신에게 ‘지시’를 내려놓은 인쇄물들이 있었다. 도시를 여행하는 지시.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도곡역 3번 출구로 나간다. 나가자마자 왼쪽으로 보이는 세븐일레븐에 들어가 물 한 통을 산다. 편의점에서 나와 한 블록 걸어가면 나오는 골목으로 들어가 30분가량 직선으로 걷는다. 점심은 xx 레스토랑에서 한다. 메뉴는 햄버거 스테이크 혹은 연어 덮밥 중에 선택한다.’ (전시 내용과는 차이가 있다. 기억을 바탕으로 내가 다시 작성한 거다.) 일부 인쇄물 옆에는 작가가 자신이 내려놓은 지시 사항을 그대로 따라한 후 보고서 혹은 일기 형식으로 작성해 놓은 인쇄물도 있었다. 그런 걸 해보는 거다. 낯선 도시를 찾아내 미리 나에게 지시를 내려보는 거다. 지시 사항을 적고, 날짜를 정해, 그곳을 찾아간다. 그리고 지시 사항을 따른다.


7. 스타벅스에 알바로 취직한다. 거기는 알바를 지시하는 이름이 있던데…. ‘지기’였던가. 아, ‘파트너’인가. 여하튼, 어느 정도 스킬을 익힌 후, 다른 도시의 스타벅스에 가서 일한다. 그런 식으로 5개 지점 정도 돈 후 (주기는 2개월에 한 번 정도), 다른 나라의 스타벅스에서 일한다. 거기서도 2개월에 한 번씩 도시를 바꾼다. 아 근데 이건, 취직 비자가 안돼 불가능한가? 에잇….


8. 차를 산다. 배를 타고 러시아로 넘어가 육로 로드트립을 시작한다. 러시아, 중국, 몽골, 중앙아시아, 중동, 유럽, 아프리카를 여행한다. 중간에 차가 망가져버리면 길바닥에 누워서 울어버린다.


9. 길에서 우는 사람을 찾아다닌다. 출퇴근하다 보면 1년에 한 번은 길에서 혹은 지하철에서 우는 사람을 만난다. 그런 사람들을 적극 찾아다니는 거다. 물론, 언제 어디서 만날 지 모르니 주기가 1년에 한 번이 될지 5년에 한 번이 될지 영영 만나지 못할지 알 수 없다. 어쨌든, 만나게 된다면 진지하게 물어본다. 왜 우세요?


10. 매일 밤 천 원 노가리집 호프를 찾아간다. 매일 밤 다른 지점이어야 한다.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테이블로, 혹은 중년 남녀 둘이 조용히 서로의 잔을 채우고 있는 테이블로 찾아간다. 그리고 말한다. 합석해도 되나요?


11. 노점을 차린다. 종로 3가를 걷다 보면 자주 보이는 사주나 타로점 집처럼 아주 작은 노점이어야 한다. 그런 집들처럼 천막이 쳐져 있어야 하고, 천막을 제치고 들어가면 파란 간이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어야 한다. 의자는 두 개뿐이다. 내가 앉은 의자, 그리고 맞은편에 상대방 의자 하나. 이 노점의 사업은 단순하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드립니다.' 이야기를 듣고 사주를 해석해주는 건 아니다. 상담을 해 주는 것도 아니다. 책을 처방해준다든가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것도 아니다. 그냥 들어줄 뿐이다.


아 재밌다…. 이토록 많은 일을 해볼 수 있다니…. 내일 출근길에도 몇 개 더 생각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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