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구도 나를 대신해 걸어줄 수 없어

국토종단하다 이혼할 뻔 14

by 두지


야산 가장 높은 곳에서 길이 끝났다. 성능 좋은 청소기로 싹 밀어버린 듯 수풀이 말끔히 걷히더니, 언덕 아래로 익숙한 도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야트막한 나의 외침. 힘이 풀려 언덕 위에 풀썩 주저앉는다. 그렇게 오래 걸었는데, 이제 고작 터널 반대편에 온 거야? 도로 왼편으로 보이는 터널의 시커먼 입구. 그 입구를 노려봤다. 성질나. 애초에 느리고 비효율적인 여행을 하자고 한 거지만, 한 시간 반 동안의 야산행 끝에 고작 1.5km라는 실적은 너무하잖아. 내가 말했다. 어떡해. 어떡하냐고. 데굴데굴 굴러버릴래. 구르면서 엉엉 울어버릴 거야.


더스틴이 내 어깨를 툭툭 친다. 약간의 자극에, 몸 어디선가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통증인가 싶었는데 허기다. 그러고 보니 목도 무척 마르다. 어깨는 아프고 종아리는 당기며 발바닥은 얼얼하다. 뱀 때문에 잊혔던 감각과 신경이 하나둘 살아나 아우성을 쳤다. 나 배고파. 내가 말했다. 가자. 더스틴이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물 한 모금이라도 마시고 밥 한 숟갈이라도 입에 넣으려면 이곳을 빠져나가야 해. 마을을 찾아야 해.




걷는다. 아무리 걸어도 가까워지지 않는 더스틴의 파란 배낭을 보며 걷는 데에 지쳐, 땅을 보며 걷는다. 회색 아스팔트. 하얀 해가 조금의 수분도 남겨두지 않은 채 바짝 말려버린 마른땅. 오른쪽으로 넓게 펼쳐진 논밭. 철원이 쌀로 유명하다는 게 맞긴 맞나 보다. 논밭이 저렇게나 많으니. 하지만 저 논밭들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림의 떡이요, 남의 집 곡간인 것을. 익지도 않은 벼에서 쌀알을 털어다 먹을 것도 아니고. 나에게 필요한 건 타인이야, 벼가 아니라고. 땅을 보며 중얼거린다. 하얀 해가 내 머릿속까지 바짝 말려버리고 있는 기분. 나에게 필요한 건 타인, 더 정확히 말하자면 타인이 일궈놓은 문명. 그러니까, 돈을 주면 영양가 있는 음식을 적절히 조리해 내어 줄 타인과 식당. 식당이 없다면 간단한 요깃거리라도 살 수 있는 작은 가게. 인간. 식당. 가게. 지난 이틀을 걷는 동안 그 무엇도 만나지 못했어.


“철원에는 마을보다 군부대가 더 많은 거 같아.”


다시 마주한 군부대를 보며 내가 말했다. 오늘로만 다섯 대 째 보는 군용 트럭의 뒤를 쫓아 사창리로 이어지는 박달로를 올랐다. 경사 약 30도의 고약한 오르막 도로. 하루 중 해가 가장 뜨거운 오후 1시. 몸속 배터리는 깜빡인다. 배는 고프고 몸은 지쳤다. 서 있을 힘도 없지만 서 있어야 한다. 서 있기만 할 뿐 아니라 걷기도 해야 한다. 배낭도 내려놓아선 안 된다. 죽을 것 같이 힘들어지면 차를 타고 마을로 가면 되지,라는 생각도 쓸모없어져 버렸다. 이젠 군용차량마저 보이지 않으니.


“더는 못하겠어.”


잦게 들리던 더스틴의 발소리가 멈췄다. 그래도 걸어야 해 수지. 여기서 주저앉으면 굶어 죽어. 아스팔트 도로를 짓이기는 더스틴의 발걸음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가냐. 잘 가라…. 매정한 자식. 하긴, 이 상황에 네가 나에게 뭘 해줄 수 있겠어. 날 업고 갈 것도 아니고. 떠먹여 줄 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려 턱밑으로 떨어졌다. 몸에서 발산되는 열기는 점차 두텁고 뜨거워졌다. 못해. 못하겠어. 혼자 중얼거려본다. 어디선가 올라오는 벌건 기운에 두 볼이 얼얼하다. 그렇다고 주저앉지도 못해. 주저앉으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테니까. 움직이지도, 주저앉지도 못한 채 한참을 서 있는다. 바람 한 점이 얼굴을 스친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본다. 더스틴은 이미 오르막길의 지평선을 너머로 가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더스틴마저 사라져 버린 길 위엔 아무도, 아무것도 없다.


나는 혼자다.


엄마를 잃어버렸을 때 이런 기분이었어. 아니, 엄마가 나를 잃어버렸던 건가. 몇 살이었는지 기억나지도 않는 어린 시절. 빛바랜 스틸 컷처럼 남아있는 장면들. 낯선 길. 엄마가 사라졌다. 누군가 나를 파출소로 데려갔다. 나는 울었던가. 아니, 아무 말도 없이 꼿꼿이 서 있었던 것 같다. 네 엄마 어딨니? 어디서 잃어버렸니? 파출소 아저씨가 물었다. 낯을 지독히도 가리던 나는 아무 말도 내뱉지 못하고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지. 그때 나는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무섭다.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될까. 영영 엄마를 만나지 못하면 어쩌지. 누군가 나를 찾으러 와 줄까. 아니, 안 올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회색 시멘트가 발라진 네모난 파출소에서, 파란 제복을 입은 파출소 아저씨들과 살게 되는 걸까. 고개만 끄덕끄덕, 절레절레 흔들면서.


수지야.


엄마의 목소리. 아이고 감사합니다. 몇 발자국 걷다가 뒤를 돌아봤는데 애가 없는 거예요. 여기 이렇게 있었구나.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나는 울지도, 웃지도 않은 채 엄마의 손을 꼭 잡았다. 엄마가 날 버린 게 아니었어. 나를 잃어버렸던 거야. 그리고 날 찾았지. 나를 찾는 방법을 알고 있었어. 어딘가에서 길을 잃어도, 엄마가 나를 찾으러 와줄 거야. 그런 믿음이 그때 생겼다. 지금도 그럴까. 내가 길을 잃으면 누군가 찾으러 올까.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누군가 와서 도와줄까. 내가 굶고 있으면 누군가 나에게 다정하게 다가와 밥을 먹여줄까.


아니. 그렇지 않아.


…. 한 발을 내디뎠다. 한 발을 내딛고 나니 다음 발이 움직여졌다. 두 발. 세 발. 나는 알을 품은 거북이처럼 느리게 박달로 경사길을 올랐다. 가야 해. 가지 않으면 안 돼. 스스로가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나를 움직여줄 수 없어. 지금 두 발을 움직이지 않으면 안 돼. 나는 어린아이가 아니야.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밥도, 물도 얻을 수 없어.


"아무것도 없어."


도로가 휘어지는 곳에서 더스틴을 다시 만났다. 그의 두 눈은 뻥 뚫려버린 파란 우주 같았다. 파란 우주에는 새로운 길이 담겨있었다. 도로의 휘어진 허리를 감아 돌자 새롭게 시야에 들어온 길. 휘어지는 곳만 돌면 상점이든 뭐든 나올 줄 알았던. 그러나 시야가 가늠할 수 있는 저 먼 곳까지, 나무와 바람과 길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혹시 근처에 상점이 있나요?”

타인을 만났다. 그토록 원하던 타인과의 조우. 중년의 남자였다. 이 근처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저기 사창리나 가야 있지. 남자가 말했다. 사창리라면 6km를 더 걸어야 한다. 빵! 총소리가 들렸다. 총소리에 충격을 받은 나무들이 파르르, 흔들렸다. 군용 차량 다섯 대가 줄을 짓고 도로를 달렸다.


“못해.”


내가 한 시간 전에 중얼거리던 말이 더스틴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너의 몸은 나의 몸보다 한 시간만큼을 더 견딜 수 있나 보다. 더스틴이 배낭을 땅바닥에 내던지듯 풀썩, 내려놨다. 군부대 건너편이었다. 군부대 입구를 지키고 선 군인 두 명이 우리를, 특히 더스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저 사람들이 너 쳐다봐. 내가 말했다. 보라 그래. 더스틴이 말했다. 그 답지 않은 말이다. 낯선이가 자신의 다름을 눈치채는 것, 그 다름이라는 표면 때문에 본인에게 집중하는 걸 끔찍이도 싫어하는 그인데. 그런 그가 하필 군부대 건너편에서 주저앉은 건 그의 선택이 아닐 테다. 무너져 내린 거다. 한 시간 전에 박달로에서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마셔. 물."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듯한 회색 아스팔트 도로를 초점 없는 눈으로 바라보는 더스틴. 그에게 물을 건넸다. 더스틴이 조심스럽게 물병을 입으로 기울였다. 두 모금 남은 물 중 한 모금을 마시고 나머지를 나에게 건넨다. 마음 같아선 다 마시라고 하고 싶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입에 물을 털어내고 일어났다. 다녀올게. 까짓 물, 군부대에 쳐들어가서라도 구해오마.


"응 떠 가라 떠 가. 펑펑 떠 가."


물을 얻은 건 주저앉은 자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민가에서였다. 집 안에 계시던 아주머니를 불러내 다짜고짜 물을 달라고 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내 얼굴을 본 아주머니가 마당 수돗가로 나를 안내했다. 1등급 받은 지하수야. 아주머니가 말했다. 물이 정말 맛있네요. 내가 말했다. 1등급이라 그런지, 종일을 걸어서 그런지, 정말 맛있는 물이다. 단숨에 한 통을 다 마시고 다시 한 통을 채웠다.


"남자친구 면회 왔나?"


아주머니가 물었다.


"면회요? …. 아, 앞에 군부대 말씀이시구나."


그게 아니라 뱀 나오는 야산을 넘어, 박달로를 넘어왔습니다. 사창리까지 가려고요. 대답하는 틈틈이 물을 반 통 더 비우고 다시 채웠다. 그나저나 아주머니, 지금 어떤 은혜를 베풀고 계신지는 아시나요? 아주머니는 오늘 저희를 구하신 영웅이에요. 복 받으실 거예요. 저요? 저는 복은 됐고, 이 물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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