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종단, 그런거 왜 하냐고 물으신다면

국토종단하다 이혼할 뻔 23

by 두지

“재미난 아저씨네.”

아저씨의 모습이 사라져간 먼 곳을 바라보며, 내가 말했다.

“근데 저 아저씨는 왜 하고 싶다는 걸까. 국토종단을 하고 싶다는 거잖아. 한국의 끝에서 끝까지 걸어보고 싶다는게.”


더스틴이 말했다. 사람들은 왜냐고 물었다. 국토종단? 도보여행? 왜 해? 힘들지 않아? 그때마다 우리는 쭈뼛쭈뼛, 우물쭈물,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우리도 모르니까. 왜 이 여행을 떠나고자 했는지, 이 여행으로 뭘 얻으려고 했는지. 막연하게 고달프고 힘든 일을 해보고 싶다는 거 말고는, 별다른 이유나 동기는 없었으니까.


“글쎄…. 근데 저 아저씨가 유별난 건 아니야. 지금까지 한 세 명쯤 만나지 않았나. 우리가 하고 있는 이 걸음이, 자기 꿈이라고 말한 아저씨. 철원 캠핑장 아저씨도 그런 말 했었고. 명월리에서 차 태워주겠다고 했던 아저씨도 비슷한 말을 했었고.”

“그러네. 중년 쯤 되는 아저씨들이 이런 욕망이 있나보네. 왜인 것 같아?”

“몰라…. 새로운 걸 해보고 싶어서? 도전? 성취감? 오랫동안 들고다닌 의무감을 벗어던지기 위해서? 근데…. 하고 싶다면서 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뭐, 이유야 많겠지. 다들 나름의 사정이 있으니까. 직장, 가정, 돈, 시간….”


우리는 모두, 제 나름의 이유와 변명, 굴레와 고달픔을 메고 살아가니까. 많이 가질수록 소심해지는 게 사람이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여행이 해답이 되어 줄 거라고, 떠나면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모든 것이 뜻대로 될 거라고, 이미 떠나온 우리조차 선뜻 말해줄 수 없으니까. 떠난다는 건 얻기 위한 행위라기 보단 잃는 것, 포기하는 것, 내려놓는 것, 그럼으로써 자신 너머의 생경한 무언가를 바라보는 거니까. 그러므로 불확실성 속에서도 불안감을 안고, 무엇을 찾는지도 모른 채 떠나는 건 오롯이, 자신의 선택이 되어야 하니까.




“저기 소양강 다리 건너서 숙소 잡자. 더는 못 가겠어.”

내가 말했다. 공지천까지 7km를 남겨둔 지점. 아저씨가 말씀해주신 만오천원짜리 모텔은 아쉽지만 포기해야겠다. 다리를 건넜다. 저녁 8시다.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 12시간동안 25km를 걸었다. 소양강 안으로 빠져버린 해가 제 붉은 빛을 풀어내다 이내 사그라들었다.


“잘 왔네. 원래 주말에 오면 5만원이야. 단체로 왔던 손님들이 마침 오늘 다 빠졌어. 오늘은 2만 5천원에 해줄게.”

모텔 주인 아주머니의 말이 너무 고마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1만 5천원에는 못 미치지만 2만 5천원도 훌륭하다. 열쇠를 들고 3층 방으로 올라갔다. 방문을 여니 익숙한 모텔 방의 구조가 눈에 들어왔다. 현관문 바로 옆에 화장실. 더 들어가면 커다란 침대. 침대 앞에 놓인 TV.


“샤워 네가 먼저 해.”

더스틴이 말했다. 싫어 네가 먼저해. 난 나중에 할거야. 아주 오래 할거거든. 내가 말했다. 내가 오래 하려고 너 먼저 하라고 한건데? 그냥 너 먼저 해. 오래 해도 돼. 난 여기 이렇게, 꼼짝 않고 누워있을테니까. 고개를 벽에 받혀 세우고 누운 채, 더스틴이 말했다.


샤워기는 욕조 위에 달려 있었다. 욕조 안에 들어가 뜨거운 물을 틀었다. 평소보다 살짝 더 뜨겁게. 샤워는 짜릿했다. 발바닥이 움찔거렸다. 오늘 걸은 먼 거리만큼, 오늘 흘린 짜가운 땀 만큼, 오늘 느꼈던 발과 다리와 어깨의 통증만큼.


“씻고 나오니 때깔 좋은데?”

나 다음으로 더스틴이 샤워를 하고 나왔다. 수건으로 머리를 터는 더스틴을 보며 내가 말했다. 우리 지난 일주일 간 약 120km 걸은 거 알아? 너 샤워하는 동안 계산해봤어. 뱀을 보기도, 밥을 굶기도, 옥수수를 얻어먹기도 하며 여기까지 온거야. 그렇게 우리 여행의 첫 목적지, 춘천까지 와버렸어.


새 셔츠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땀 한 방울 묻지 않은 옷가지 사이로 소양강의 시원한 바람이 살랑거렸다.


“근데 우리 진짜 웃기지 않냐. 하루 종일 걷다가 쉬는데, 쉬는 것도 걷는걸로 쉬다니.”

5,000원짜리 피자집까지는 2km. 모텔로 다시 돌아오는 거리까지 합하면 4km를 걸어야 한다.

“이게 쉬는 거지. 배낭 없이 걷는 건 쉼이야. 그리고 드디어 바라고 바라던 춘천에 닿았잖아. 이건 빅토리 랩 같은거야. 자동차 경주에서 우승하고 한 바퀴를 더 천천히 도는, 빅토리 랩.”


더스틴이 말했다. 우리는 소양 2교를 다시 건넜다. 까만 강 위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가로등 위로 나방이 어지럽게 날아올랐다. 그래, 빅토리 랩. 전쟁에서 이겨 돌아온 영웅의 기분이다. 아니, 그 반대인가. 아무도 아닌 기분. 아무도 아니어서 좋다. 잘 보이지도 않는 움직이는 작은 점, 시야를 막는 비닐봉지, 동네 개. 그런 존재가 된 것 같아 좋다.


우리는 잊혀졌다. 사라졌다. 중요하지 않다. 비닐봉지처럼 가볍다. 이렇게도 살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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