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전 일본 사람들이 걸었던 길

쿠마노코도를 걷자 06

by 두지

“힘들어.”

“이제 시작했어.”

“무지하게 힘들어.”

“이제 십분 걸었어.”

“아니 무슨 길이 초입부터 이렇게 가팔라?”

“산길인 거 몰랐어?”


더스틴이 물었다. 사실 몰랐다. 쿠마노코도를 걷겠다고 2주 전부터 노래를 불렀고, 쿠마노코도 웹사이트를 뒤적거리며 조사도 할 만큼 했지만 단 한 번도, 쿠마노코도가 산길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내 머릿속에 각인된 쿠마노코도의 이미지는 기분 좋은 숲길을 힘들이지 않고 술렁술렁 걷는 것이었다. 근데 아니다. 관광안내소에서 받아낸 지도에는 신사와 신사, 마을과 마을 사이의 고도 차이가 표시되어 있었다. 타키지리에서 시작되는 순례길은 산길이었다. 그것도 좁고 가파르고 험한 산길.


쿠마노코도 순례길


“쿠마노는 왜 쿠마노냐.”

고행을 잊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좀 떠들어봐라. 네 얘기에 집중하다 보면 걷고 있다는 걸 좀 잊을 수 있겠지.


“그건 내가 아주 잘 알지. 쿠마노는 쿠마노 산….”

“쿠마노 산잔.”

“아 그래. 쿠마노 산잔, 그러니까 쿠마노에 있는 세 개의 신궁을 말하는 거야.”


그 세 개의 신궁이란 혼구와 신구, 나치인데, 쿠마노코도는 그 세 개의 신궁으로 이르는 순례길을 말하는 거지. 더스틴이 말을 이었다. 천 년 전 일본 사람들은 일본의 고도였던 교토에서 쿠마노 지역까지 30일 40일을 순례를 했대. 교토에서 타나베까지 해안가를 따라 걷고,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나카헤치 루트’를 걸었어. 나카헤치 루트가 우리가 지금 걷는 루트야. 쿠마노코도에는 다른 루트도 있는데 나카헤치 루트가 가장 대표적인 길이야. 아까 말한 세 개의 신궁을 모두 잇는 길이지.


“여기가 타키지리 오지다. ‘신성한 숲으로의 길이 시작되는 곳’이라고 알려진 데래.”

내가 말했다. 오지(Oji). 쿠마노의 신을 모시는 작은 신사다. 나카헤치 루트는 이 오지를 이정표로 삼아 걸으면 된다.


“오늘은…. 쯔기자쿠라까지 걸어보자. 쯔기자쿠라에 마을이 있네.”

더스틴이 말했다. 지도를 확인해봤다. 타키지리 오지부터 쯔기자쿠라까지의 거리는 18.2km.


“친절하게 소요시간도 적어놨네. 걷는 시간은…. 6시간 반. 쉬는 시간 합치면…. 9시간 40분.”

“어디 봐봐.”

더스틴이 내 옆으로 와 지도를 들여다봤다. 근데 우리는 느리니까…. 11시간은 더 걸리겠지.




“여긴가?”

거대한 바위를 보며 더스틴이 말했다. 뭐가 여기야? 내가 되물었다. 아니. 뭔 바위가 있다고 했는데…. 두 바위가 서로 기대고 서 있는데 그 사이 틈이 있대. 그 사이를 통과하면 영적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대.


“그래? 이름이 뭔데?”

“타….”

“타나이 쿠루리 바위. 지도에 쓰여있네. 여기 맞나 보다.”

영적으로든 몸적으로든 다시 태어나고 싶은 욕구는 그다지 없다만, 바로 눈 앞에 있으니 통과해보기로 한다. 배낭을 땅바닥에 내려놓고 바위틈 사이로 들어갔다. 그다지 비좁은 느낌은 아니다. 어렵지 않게 바위를 통과했다.


“어때?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내 모습.”

바위 틈새에서 나와 내가 물었다.

“겉모습은 똑같은데. 영락없는 이수지야. 기분은 어때?”

“기분? 똑같아…. 하지만. 다시 태어났다 치겠어. 영적으로 성스러운 쿠마노코도를 걷고 있으니까, 영적인 것처럼 행동할 거야. 너한테 시비도 덜 걸고.”

“잘 생각했다.”


타나이 쿠루리 바위. 틈 사이를 통과하면 영적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믿거나 말거나.


타나이 쿠루리를 지나니 평지다. 바로 여기야, 내가 상상했던 평화로운 숲 속 흙길. 내가 중얼거렸다. 산길을 정신없이 오름과 동시에 중간중간 더스틴과 다투며 열을 낸 덕인지, 타키치에 처음 닿았을 때의 뼈저린 추위도 가셨다.


“여기서 좀 쉬다 가자.”


조금 더 걸으니 타카하라 키리노 사토(Takahara kiri-no Sato)다. 지도에 화장실, 공중전화, 약수터, 벤치, 일출/일몰 포인트, 뷰포인트 등 온갖 편의시설이 표시되어 있던 탓에 뭔가 대단한 거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단출한 나무 벤치 몇 개에 공중화장실 하나가 다다. 벤치에 앉아 마을에서 사 온 귤 봉지를 풀었다. 타이트한 러닝복을 입은 젊은 남자 두 명이 벤치 앞을 스쳐 달려갔다. 노부부가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오더니 옆 벤치에 앉았다.


“초겨울인데 걷는 사람이 꽤 있네.”

더스틴이 말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서양 남녀와 일본인으로 보이는 남자 한 명. 일본어로 대화를 나누던 그들이 우리 앞쪽 벤치에 앉았다.


“니혼진데스까? (일본인이세요?)”

일본 남자가 내게 물었다.

“아…. No. 아니 아니. 이이에. 칸코꾸징데스. (아뇨. 한국인입니다)”

떠듬떠듬한 일본말로 겨우 대답을 했다. 우리 앞에 앉은 세 명이 거의 동시에 활짝 웃었다. 그리고 돌아온 친절한 영어.


“어디까지 걸어요?”

서양 여자가 물었다.

“잘 모르겠어요.”

더스틴이 대답했다.

“오늘 민슈꾸(민박)에서 자세요?”

“민슈꾸는 얼마일지 몰라서…. 가격 봐서 안되면 야영할까 생각 중이에요.”

“멋지네요. 저희는 너무 힘들어서 야영은 못할 것 같아요. 오늘 하루 걸은 피로를 풀어야죠. 온센이 딸린 민슈꾸를 예약했어요.”


서양 남자가 말했다. 좋겠다. 온종일 산행을 한 후에 온센에서 말끔하게 푸는 피로. 따뜻한 방에서 먹는 따뜻한 밥. 그리고 아늑한 잠자리. 그립다. 정상적인 인간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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