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마노코도를 걷자 15
잘 잤다. 아주 으뜸으로 잤다. 십만 원 어치를 잤다.
사흘간의 개고생 끝에 따뜻하고 신변이 확실히 보장되는 안전한 방에서 푹신한 요 위에 누워있었더니, 토스터기에 든 빵 마냥 겉은 바삭, 속은 나른해져 한 번도 깨지 않고 잠을 푹 잤다.
“오늘도 비 온대.”
요 위에 드러누운 채 더스틴이 말했다.
“응. 근데 오전 11시쯤까지만 올 건가 봐. 그렇다고 11시부터 걷자는 건 아니고.”
“응. 오늘은 걷지 말자. 이 동네에서 오랫동안 어슬렁거리다가, 오후쯤에 카와유나 와타제 온센 마을에 있는 캠핑장으로 가자. 거기까지는 그렇게 오래 안 걸어도 되니까.”
짐을 챙겼다. 야외에 널어놓은 침낭과 더스틴의 바지는 어제보다 한껏 더 젖어있다. 밤이슬 때문인가 보다. 체크아웃 시간인 9시 반에 딱 맞춰 1층으로 내려갔다. 주인아주머니가 우리를 맞았다. 아주머니의 단발머리는 여전히 유쾌하다. 피 같은 9300엔을 아주머니 손에 쥐어드렸다. 후회는 없다. 피 같지만, 피만큼 가치 있게 잘 썼다.
“혼구 @#$#먀쇼?”
아주머니가 물었다. 서른쯤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의 딸이 식당에서 나왔다. 아주머니도 딸도 영어를 하지 못했다. 더스틴은 일본어를 전혀 못한다. 나는 일본어가 2%쯤 된다. 여기 모인 네 사람이 소통을 하기 위해선 2% 밖에 안 되는 내 일본어 실력에 기대는 수밖에….
“에?”
“혼구 @#$#먀쇼?”
음…. 혼구로 가냐는 뜻이겠지? 아뇨, 이 동네 좀 돌아다니다가, 커피숍에서 쉬려고요,라는 말을 하고 싶은데. 문장이 너무 복잡하다….
“노. 위 스테이 디스 빌리지. 고 커피숍. 레스트. (아뇨. 이 동네에서 놀다가. 커피숍에서 쉬려고요)”
어쩔 수 없이 영어로 말했다. 에? 아주머니가 되물었다.
“이 동네에서 놀다가. 커피숍에서 쉬려고요.”
“에?”
“코히. 코히. (커피. 커피.)”
“에? 아! 코히! (아, 커피!)”
커피라는 말이 전달되었다. 하이. 코히. 코히.
“후리! (Free!)”
코히, 후리! 아주머니와 딸이 동시에 외쳤다. 딸이 우리에게 소파를 가리켰다. 아. 앉으라고? 커피가 공짜니까 마시고 가라고? 아니 그게 아니라 커피숍에 간다니까요…. 아니다. 더스틴, 앉자. 내 2%의 일본어 실력으로 공짜 커피를 얻어냈어. 마시고 가자.
잠시 후. 아주머니가 부엌에서 뜨거운 물과 커피통이 담긴 쟁반을 가지고 나왔다. 커피통을 내려놓더니 엉덩이가 보이지 않게 뒤로 사사사, 걸어 나가신다. 그리고는 미닫이 문을 살짝, 닫으신다. 커피 한 잔이라도 자기 없이 마음 편히 마시라는 배려. 참, 일본인스럽다. 사려 깊다.
“인스턴트 커피인데 꽤 맛있네?”
후룩,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더스틴이 말했다. 나는 프리마랑 설탕을 넣을 테다! 자그마한 티스푼을 집어 들었다. 길게 여행을 할 때, 특히 이렇게 많이 걷는 여행을 할 때는 꼭 이렇게 단 게 당기더라니까. 뜨끈하고 달콤한 커피를 마시며 소파에 푹, 기댔다. 다시 사우나를 하는 기분이다. 오늘은 진짜 별다른 거 하지 말자. 많이 걷지 말자. 한참을 앉아있다 다시 일어나 짐을 짊어졌다. 기척을 알아챘는지, 아주머니와 딸이 미닫이 문을 열고 식당에서 나왔다.
“@#$#%#$#”
아주머니가 말했다. 이번에는 단 한 단어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에?”
“@#$#%#$#”
“음….”
““@#도터$#칸코쿠$#”
아. 도터가 칸코쿠에 간다고? 딸이 한국에 간다고? 하이! 아주머니가 고개를 연신 끄덕거렸다. 손바닥 열 개를 펼치더니, 다시 두 개를 펼친다. 12월에 간다고?
“쏘데스까?”
나의 완벽한 일본어 대꾸. 아주머니가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호호호호, 웃는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입 한쪽을 가리더니, 나에게 속삭였다.
“신라 호텔 #$#”
“아. 신라 호텔에서 머문다고요?”
하이! 호호호호. 그렇구나. 근데 왜 귓속말을 하시지? 귀여운 아주머니 같으니라고….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민슈쿠를 나섰다. 할 줄 아는 말이 별로 없는 우리는 하염없이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만 앵무새처럼 무한 반복했다. 아주머니와 딸이 우리를 따라 나오며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라고 백만 번 말했다. 마루네 민슈쿠와 스고이! (마루네 민박 멋져요!) 내가 말했다. 아!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아주머니와 딸이 하하하 호호호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며 신나게 웃었다. 그러더니.
“&&*&#$#@%#$@#$#%#%#”
너무 길다….
“에?”
“&&*&#$#@%#$@#$#%#%#”
“에?”
“…. 쏘리!”
아주머니가 외치더니 하하하하하하 호호호호호. 대체 무슨 말이었을까. 아주머니는 했던 말을 반복하는 대신, 다시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를 외쳤다. 문을 열었더니 아리가또 5번, 한 발짝 걸어 뒤를 돌아봤더니 또 5번. 마을 쪽으로 걸어가는데 아리가또 무한반복. 빨리 사라지지 않았다간 아리가또를 1000번이라도 반복할 기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