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서 왔나요

by 두지

지프는 우리가 조금 전 들렀던 군 검문소로 방향을 틀었다. 검문소에는 아까는 없던, 한참 고참으로 보이는 군인 하나가 서 있었다. 우리를 데려다준 군인이 차에서 내리더니 고참에게 뭔가를 설명했다. 보초를 서고 있던 군인이 지프 안을 빼꼼히 들여다봤다. 아까 우리를 돌려보냈던 앳된 군인이다. 그의 얼굴이 말하는 것 같았다. 또 쟤네야? 포기를 모르는 애들이네…. 잠시 후, 선글라스를 쓴 고참이 지프 차창으로 다가왔다. 선글라스 너머로 의심에 가득 찬 그의 시선이 흘러넘쳤다. 나와 더스틴을 차례차례, 위아래로 훑어본 그가 말했다.

“민간인 출입 금지 구역입니다. 사전 허가 없이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의 단호한 말투에 미련이 후드득, 깔끔하게 떨어져 나갔다. 우리를 데리고 온 군인들이 미안한 미소를 흘려보냈다. 두 번을 시도했다. 두 번 다 안 됐다. 그럼 안 되는 거다. 더스틴 말대로, 여행은 이미 시작되었다. 폼나는 시작은 끝내 이루지 못했지만, 시작은 시작이다. 이제 미련 없이 걷자. 남쪽을 향해.




도로 오른쪽으로 도정장이 보였다. 도정장 앞 담벼락에 세워진 사다리 위에서 아저씨 한 분이 가로등을 손보고 있다. 할아버지 한 분이 사다리 아래 서서 지시를 내린다. 저쪽으로 더, 아니 그게 아니고, 이쪽, 이쪽! …. 어이! 할아버지가 외쳤다. 어이! 어이! 돌아보니 아, 우리를 부르는 소리구나.

“저희 부르신 거예요?”

“웨어 아유 프롬?”

할아버지가 물었다.

“네?”

“웨어 아유 프롬?”

“…. 아 저희는. 여기서 살아요. 한국.”

“아니 아니. 웨어 아유 프롬!”

“이 외국 친구요? 이 친구도 저랑 한국에서 살아요. 서울.”

“에이그. 그게 아니라. 애초에 어디서 왔을 거 아냐.”

아. 외국인의 고향을 묻고 싶으셨던 건데 내가 눈치도 없이…. 근데 그게. 음…. 애초에 온 곳이라…. 그니까 고향. 더스틴의 고향….

“아이엠 프롬 엘에이.”

엘에이? 엘에이가 아니고요. 내가 더스틴의 말을 받았다. 내 말에 할아버지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사이 더스틴이 뒤에서 손을 내저었다. 아 그래…. 알았어. 아무 말 안 할게. 그냥 엘에이라고 해라.

“아! 아! 엘에이! 엘에이 알지 엘에이!”

할아버지는 더스틴이 퀴즈 결승전에서 정답이라도 맞힌 양 기뻐한다.

“여기는 뭐 하는 데예요?”

내가 물었다.

“쌀 도정하는 데지.”

“구경해도 돼요?”

아 그럼. 내가 물어봐줄 수 있지. 앞장서는 할아버지를 쫓아갔다. 어이 치프! 도정장 마당에서 할아버지가 외쳤다. 커다란 기계들 사이에 서 있던 4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우리를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이 사람이 여기 치프야. 할아버지가 말했다.

“영어로 자기 소개 좀 해봐. 외국 사람 왔잖아.”

이 사람 고향이 엘에이래 엘에이. 자네도 엘에이 알지? 남자가 불편한 웃음을 흘려보냈다. 왓 아유 두잉 히어? 남자가 물었다.

“국토종단해요. 철원에서, 부산까지, 가요.”

백마고지역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 연습한 한국어 문장이 더스틴 입에서 띄엄띄엄 흘러나왔다. 아이고, 멀리도 가시네. 치프가 말했다. 여기 구경 좀 시켜줘. 할아버지가 말했다. 아 구경…. 뭐…. 뭘 보여드려야 하지. 음…. 이 큰 기계는 쌀이 들어오면 무게를 재는 데 써요. 트럭 컴 히어. 위 웨이 라이스 히어. 치프가 한국어, 영어로 차례로 말했다. 얼마나, 톤? 더스틴이 안 되는 한국말로 천천히 물었다. 음…. 유쥬얼리…. 어 데이…. (보통 하루에….) 나는 뒤에 서서 그들의 대화를 잠자코 경청했다. 한국어가 모국어인 사람은 영어로,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은 한국어로 말하는 저…. 서로에 대한 처절한 친절함. 마당에 중량계가 있길래 배낭을 올려봤다. 내 배낭 12.50kg. 더스틴 배낭 20.38kg. 거기에 앞에 맨 보조 가방까지 합치면…. 제정신이 아니구나 우리. 이걸 들고 부산까지 걷겠다니.

“우쥬 라이크 썸 커피? (커피 한잔할래요?)”

치프가 물었다. 네. 캄사합니다. 더스틴이 답했다. 할아버지와 함께 치프의 사무실로 가서 믹스커피를 얻어 마셨다. 달콤한 액체가 혈관에 척척 달라붙는 기분. 엘에이가 고향이라고 하길 잘했다. 끝끝내 한국에서 산다고 주장했으면 도곡장 투어도, 달콤한 믹스커피 두 잔도 없었을 거야.





“아까 왜 고향이 엘에이라고 했어? 할아버지가 어디서 왔냐고 물었을 때.”

도정장을 나와 장흥리 방향으로 걸었다. 아스팔트가 깔린 좁다란 도로. 차는 한 대도 없다. 사람도 한 명 없다. 길 위엔 우리뿐이다.

“그럼 뭐라고 말해. 내가 어디서 왔는지 설명하려면 반나절이 걸리는데….”

더스틴이 말했다.

“그래도 고작 6개월 산 엘에이가 고향이라고 하는 건 너무 뻥이야.”

“그럼 이렇게 말할까? 저는 오클라호에서 태어났지만 갓난아기 때 떠났기 때문에 딱히 거기가 고향이라고 할 순 없어요. 워싱턴주랑 사우스다코타주에서도 몇 년 살았는데, 고향이라고 부를 만한 시간 만큼 살지는 않았죠. 대학교 가기 전에 스물다섯 번을 이사했어요. 그래서 아까 수지가 말한, 서울에서 왔다는 말도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에요. 왜냐하면 제가 태어난 오클라호마에서보다 서울에서 훨씬 더 오래 살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아 알았어. 됐어. 그냥 엘에이라고 하도록 하여라.”

“거봐.”

“그렇게 스물다섯 번을 이사하며 사는 건 어떤 느낌이야?”

“미련이 없어져. 나는 한 사람하고 깊게 친해지는 타입이라 늘 베스트 프렌드가 있었는데, 그렇다고 초등학교 때, 중학교 때 베스트 프렌드들을 지금에 와서 찾고 싶고…. 그런 마음은 전혀 없어. 그때의 친구는 그때의 친구니까.”

“그러면 좀 외롭지 않아? 결국에는 남는 친구가 없잖아.”

“별로. 원래 인생이라는 건 이동하고 변화하는 거잖아. 이제는 만나지 않는다고 함께 한 시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난, 이사를 자주 해서 외로운 것보다 한곳에 오래 있어서 답답한 게 더 커.”

“이렇게 다르게 살아온 우리가 만나서 같이 사는 것도 신기하다. 난 한동네에서 자라고 학교 다니고 생활하고 그랬잖아…. 어디로 멀리 떠나도 늘 다시 돌아왔으니까, 서울이 삶의 기준이었고.”

교환학생으로 미국 갔을 때 1년 떠나 있었던 거 말고는 서울에서 벗어나 살아본 적이 없었으니까. 이번에 여행 오려고 집 정리할 때, 너는 뭐든 쉽게 잘 버렸지만 난 못 그랬잖아. 결국 짐을 네 박스나 채워 엄마 집으로 보내고…. 서울을 떠난다는 게 너와 나에겐 다른 의미였지. 너에겐 네가 거쳐온 수많은 도시 중 한 곳을 떠나는 일이었지만, 나에겐 내가 태어나고 자란, 부모님과 친구들과 내 과거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묻어나 있는 곳을 떠나는 일이었어. 멀리 떠나 있다가도 다시 돌아가던 서울인데. 이번에는 모르니까. 다시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서울에서 살던 부모님이 보성으로 가버린 후 처음 떠나보는 거였잖아. 내 일부를 간직해주던 부모님 집이 더는 서울에 없었지. 집과 짐을 없애고 나니 내 흔적은 서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어버렸어. 돌아갈 곳이 없어진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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