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직 일기 16] 2025년 6월 기준 실업률 2.8%. 그건 바로 나
실직을 한 지 세 달 째다.
이번 주에는 서류 탈락 소식을 연달아 두 번이나 들어야 했다. 하나 더 대기하고 있는 서류 발표가 있기는 한데 떨어진 것과 비슷한 직급과 직무라 아무래도 이것도 실패하지 않을까 싶다.(라고 쓰고 일주일이 지나 글을 이어 쓰고 있는데 역시나 떨어졌다.) 늦가을 나뭇가지에서 마른 낙엽 떨어지듯 면접에서 우수수 떨어져 왔기 때문에 떨어지는 데에는 익숙하지만, 서류 탈락은 조금 오래간만이다. 지원한 직무가 내 경력과 좀 맞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경쟁률이 너무 높았던 게 원인인 걸까? 하나 걱정되는 건 실직을 하고 경력이 단절된 시기가 길어지고 있어서, 그게 원인인 건 아닐까 하는 거다. 만약 그렇다면 앞으로 서류에 합격하는 것마저 점점 더 어려워질 테고, 그렇다면 나는 이대로 영영 놀고먹는 백수가 되어서 사회의 부담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정상성'에서 점점 멀어져서 '비정상'의 통계에 잡힐 확률도 높아진다. 아니, 이미 그러고 있다. 나는 이미 사회 문제다. 실직자로서 뿐만 아니라 아주 여러모로. 가지가지.
1. 나는 실업자다.
실업자는 국가 통계로 관리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실업자'란 15세 이상 인구 중 ① 조사대상기간에 수입이 있는 일을 하지 않았고, ② 지난 4주간 적극적으로 구직활동을 하였으며, ③ 조사대상기간에 일이 주어지면 즉시 취업이 가능한 사람을 말한다.
바로 나다.
2025년 6월 기준으로 실업자는 82.5만 명에 달했고 백분율로 따지만 2.8%다. 82.5만 명 중 하나라고 하니 조금 마음이 놓이고 2.8% 중 하나라고 하니 마음이 조급해진다. 아마 저 실직률에 들어가지 않는 1) 저임금의 간헐적 노동자 2) 실업급여를 받고 있지 않거나 구직 활동을 아예 포기한 자 3) 여러 가지 이유로 취업이 불가능한 자 등을 포함하면 실업률은 훨씬 더 높아질 테다.
실업률을 국가 통계로 챙기는 이유는 실업률이 국가 전체적로 경제적으로 손실이기 때문이다. 내가 실업을 하면 당장 내 주머니에 돈이 안 들어오는 게 즉각적인 문제지만 그렇게 되면 내 소비는 줄어들 거고, 그러면 (물론 나의 소비 따위 미미한 영향이겠지만) 내수 활성화가 안 될 거고, 경기 침체로 이어질 거고, 그러면 더 큰 실업률로 이어진다. 그 외에 나에게 일정 기간 동안 실업급여도 줘야 하고 실업이 장기화되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수준이 되면 생계 지원을 해야 할 수도 있다. 소득이 없으니 세금도 덜 낼 테고 그럼 국가 재정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리고 나같이 노동 적령기(?)에 있는 사람이 오래 손가락 빨고 노는 게 국가로서도 좋은 일만은 아닐 텐데? 그러니 국가가 내 재취업을 더 발 벗고 나서서 도와줘야 하는 게 아닐까? 책임져! 책임져!
2. 나는 경단녀다.
경단녀, 즉 경력단절 여성은 15~54살 기혼여성 가운데 결혼, 임신·출산, 육아, 자녀교육, 가족 돌봄 등의 사유로 직장을 그만둔 미취업 여성을 뜻한다. 올해 통계청이 상반기 지역별 고용조사를 활용해 파악한 ‘기혼여성의 고용 현황’에 따르면 35~39살 기혼여성은 4명 가운데 1명꼴로 육아·결혼 등 때문에 경력 단절을 겪고 있다. 올해 4월 기준으로 보면 121만 5천 명이다.
나는 결혼은 했지만 결혼을 이유로, 혹은 육아를 이유로 직장을 그만두거나 잘린 게 아니기 때문에 엄격히 말하면 경단녀라고 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렇지만 과연 그럴까? 내가 실직을 한 게 내가 여자인 것과 기혼인 것, 그리고 '가임기 여성'인 것과 아예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육아가 아니더라도 돌봄이라는 의무가 가족 중 여성 구성원에게 더욱 부과되는 게 사실이고, 고령인 부모에 대한 돌봄 이슈로 여기저기 뛰어다닌 게 나의 실직과 아주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을 텐데?
경력 단절 기간이 길어지면 재취업하기가 어려워지고 들어갈 수 있는 직장의 질도 떨어진다. 내가 점점 불안해지는 이유다.
지자체 등에서 경력단절 여성 지원 사업이라고 재취업 노력에 필요한 현금을 지원해 주거나 교육, 상담 등을 진행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런 것조차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여성의 경력이 단절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사회 구조, 단절된 후에 재취업이 거의 불가능하거나, 수입과 노동환경 수준이 현저히 낮은 직장으로 재취업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먼저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
3. 무급 돌봄 노동 중이다.
보건복지부에서 2023년도에 실시한 노인실태조사를 보면 독립생활이 어려운 부모를 돌보는 가족 중 딸의 비율은 배우자와 거의 비슷하다.
신체기능 유지를 위한 도움 제공을 보면 주로 배우자(13.8%), 딸(15.2%), 사회복지 관련 종사자(14.1%) 등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청소·빨래·시장보기 등의 도움 제공은 주로 배우자(29.3%)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딸(18.4%), 사회복지 관련 종사자(15.3%), 장남의 배우자(10.1%), 장남(6.7%) 등 의 순으로 제공되고 있다.
외출에 있어 도움 제공은 주로 배우자(21.4%)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다음은 딸(14.3%), 사회복지 관련 종사자(12.9%), 장남(11.6%) 등의 순으로 제공되고 있다.
식사 준비 도움 주체를 살펴보면, 배우자(27.6%) 비율이 가장 높았으며, 다음으로 딸(16.9%), 사회복지 관련 종사자(15.2%), 장남의 배우자(10.7%) 등의 순으로 나타난다. (출처) 2023 노인실태조사, 보건복지부
읽다 보니 좀 이상하지 않은가? 왜 장남의 배우자가 돌봄을 하는 비율이 장남보다 높냐고.
하여간. 우리 엄마의 경우 아빠가 거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책임져 주고 있지만 아빠도 고령이고 여기저기 성치 않은 데가 많아졌기 때문에, 그리고 엄마를 데리고 병원 진료를 가는 건 아빠가 혼자 하기 어렵기 때문에 내가 나서야 한다. 그리고 엄마가 입원이라도 할 시에는 아빠가 병원에서 간병을 했다가는 아빠마저 탈이 나고, 그러면 일이 더 복잡해지기 때문에 (실제 이런 적이 있다.) 내가 주로 담당한다. 지금은 실직한 백수 상태라 그나마 버티고 있지, 회사를 계속 다니고 있었으면 어떻게 감당했을까. 차라리 실직한 게 그나마 다행한 일인 걸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들기도 한다.
회사를 다닐 때도 상황이 너무 안 좋아져서 돌봄 휴직이나 휴가를 알아본 적이 있다. 근데 '아동 돌봄'에 대해서만 유급 휴가 혹은 휴직이 허용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나마 무급휴가나 휴직마저도 허용이 안 되는 직장도 많다.) 아니 왜? 부모를, 노인을 공경하라며? 내가 안 돌봐주면 나라가 나서서 다 책임져 줄 것도 아니면서?
4. 나는 딩크족이다.
딩크족과 실직이 무슨 상관이냐 싶겠지만 아주 상관이 없지만은 않다. 애를 안 낳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경제적 불안정성이 아무래도 제일 크지 않을까? 직장에서 언제 잘릴지 모르는데, 잘리지 않았더라도 '아직' 잘리지 않은 것뿐이지 언제까지 직장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지 보장을 할 수 없는데, 애를 낳으면 거기에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을 텐데, 그리고 이런 경제적 불안정성은 대물림되고 앞으로 점점 더 심해지면 심해지지 나아질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이는데, 애를 낳고 싶겠냐고.
저출산은 틈만 나면 뉴스에서 문제라고 떠들어댄다. e-나라지표에 따르면 2024년 기준 합계출산율은 0.75명이다. 합계출산율이란 가임기 여성(15-49세) 1명이 가임기간(15-49세) 동안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수를 말한다. 그게 0.75명이나 된다니 조금 놀랍다. 49세까지가 가임기간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40대 초반 이후로 아이를 낳는 건 매우 어려울 텐데, 내 주위이 40대 초반인 또래들만 봐도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은 지인은 거의 절반도 안된다. 내가 느끼는 체감 합계출산율은 0.5명 정도인 것 같다.
저출산이 큰 사회문제라고, 세금이 사라진다고, 고령 인구를 감당할 수 없어진다고, 북한의 공격을 방어하려면 상비 병력을 일정 정도 이상으로 유지해야 하는데 현재 출산율 추세로는 어렵다고(? 실제 있는 기사다.), 나라는 누가 지키냐고(실제 들었던 말이다.), 한국이 외국인으로만 가득 찰 거라고(실제 들었던 말이다.) 난리다. 하지만 그런 사회문제를 해결해 주자고 내가 애를 낳을 순 없다. (이미 내가 사회문제인걸)
저출산 문제를 '극복'하겠다고 이런저런 부처나 지자체에서 추진하는 사업들을 보면 그냥 웃음만 나온다. 아니, 웃음도 안 나온다. 그냥 나랑 아주 먼, 매우 먼, 지구 반대편 얘기처럼 들려 흘려보낸다. 들어보라.
- 저출산 문제 인식 전환을 위한 로고 및 슬로건 공모전
- 저출산 인식개선 강사 모집
- 저출산 극복 위한 릴레이 캠페인
인식 전환 슬로건을 만든다고 내가, 혹은 가임기 여성들이 "그래? 그럼 한 번 낳아볼까?"라고 생각을 바꾸기라도 한단 말인가? 불안정한 고용과 침체된 경기 속에서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마당에 저출산 인식개선 교육을 듣는다고 "그래... 내가 생각을 잘못했어.... 나라를 구해야지"라고 생각하기라도 한단 말이냐고. 내가 앞으로 혹여라도, 혹시라도, 애를 낳아볼까? 하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하려면 정말 많은 것이 바뀌어야 하는데, 예를 들어 이런 거다.
- 고용불안 해소 -> 애가 없는 지금도 실직하고 재취업을 못해서 바둥거리고 있는데, 애가 생기면 더 안 뽑아주겠지.
- 주거안정 -> 이게 될 리가.
- 기후위기 극복 -> 가능해 보이지 않다.
- 육아 시간 확보 및 안정적 수입 -> 취직도 못하고 있는데...
- 안전한 사회
이렇게 통계 안에 숨어 들어간 나를 분석해보고 있자니 무슨 해수욕장에 널리고 깔린 모래사장의 모래 한 알이 된 기분이다. 실업자, 경단녀, (무급) 돌봄 노동자, 딩크족 등 외에도 나를 '설명'하는 단어들, 그리고 내가 포함된 통계들은 많을 것인데, (주로 '사회문제'와 관련된 단어들이라는 것이 좀 그렇지만...) 이런 단어들을 모으고 모으면, 혹은 내가 포함된 통계들의 교집합을 찾으면 내가 되는 건가? 실직자가 되고 나니 쓸데없고 이상한 생각만 늘어난다. 실직을 하고 살짝 더 이상해진 사람들의 통계를 잡는다면 거기에도 반드시 포함되지 않을까.
됐다. 이제 일어나자. 나가서 햇볕을 쐬고, 산책을 하고, 빵과 커피를 마시자.
우울증 통계에까지 잡히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