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글쓰기 프로젝트 100-5
스물여덜에서 서른까지는 나이에 꽤 민감했던 것 같다. 몇살이예요? (질문 자체가 무례하다) 물었는데 상대방이 나보다 나이가 많으면 알 수 없는 찌질한 우월감까지 느꼈던 것 같다. 다시 생각해보니 우월감이 아니라, 안도감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안도감은 상대방의 나이가 나보다 더 많으면 많을수록 컸다. 나는 아직 1년 더 남았지롱, 3년 더 남았지롱, 뭐 이런 안도감이랄까. 1년간 더 시도해 볼, 내가 네 나이가 될 무렵에는 조금 더 멋져보이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그런 시간적 여유가 주는 안도감이었던 것 같다. 다시 생각해도 정말 찌질하군.
나이 어린 사람에 대한 어떤 거부감 같은 것도 있었다. 나는 동갑 혹은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과 잘 어울렸다. 나는 나이 많은 사람과 잘 어울리는 스스로를 성숙하다고 판단했다. 어린 사람들은 나와 수준이 맞지 않아 어울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야말로 꼰대기질의 싹틈이었다. 일찌감치 뿌리뽑길 잘했다. 지금은 그것도 어느정도 극복해서 한참 어린 사람과도 잘 지낸다. 나이가 많든 적든 나와 동등한 위치의 존재로 보는 것, 그게 사람 관계의 기본인 것 같다. 언니인 척 가르치고 동생인 척 수동적으로 일관하는 관계는 오래 못 간다.
지금은 서른셋이다. 며칠 후에 서른넷이 된다. 정말, 거짓말 아니고, 아무렇지도 않다. 주위에 스물아홉살이 많은데 내년이면 서른이 된다고 난리다. 20대의 마지막을 기념한다고 친구들과 프로필 사진을 찍기도 하고, 결혼한 친구는 은근히 안도하고 결혼 안한 친구들은 뭔가 불안해한다. 나는 의자에 두 팔을 걸치고 거만하게 앉아 말한다. “서른 따위, 개나 줘버려.”
학벌, 집안, 외모, 재산처럼 나이 역시 하나의 라벨링이란 생각도 든다. 그런 것들이 말해주는 것들이 분명 있지만, 그건 지극히 평면적이고 얕은 정보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 정보들로 상대방을 평가하는 건 게으르고, 어쩌면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난 멋진 할머니가 되고 싶다. 물론 할머니가 되기까지 사는게 허락된다는 전제하에. 내가 생각하는 멋진 할머니는 이런거다.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고, 따뜻하고, 자주 웃고, 자주 울고, 자주 안아주는. 나이 따위 개한테나 줘버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