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글쓰기 프로젝트 100-20
대학생 시절은 대체 이 많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 늘 난감했던 것 같다. 시간은 많은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고, 내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는. 여기저기서 젊을 때 놀아라, 젊을 때 도전해라, 공부해라, 준비해라 난리난리들인데 그래서 대체 뭘 어쩌라는 건지 몰라 매일 술만 마셨다. 그래도 1학년 때는 새내기라 부르는 술자리도 많고 신기한 것도 많아서 나름 재밌었다. 문제는 2학년이 되었을 때였다. 정말이지 할 일이 없었다. 도서관에 가서 책도 빌려보고 알바도 했지만 그래도 시간이 남았다. 하루는 친구랑 이야기를 하다 야 이렇게는 안 되겠다 우리 뭐라도 해보자 어디라도 가보자 해서 여행을 가기로 했다. 소심해서 멀리는 못 가고 가까운 인천.
인천공항이 막 들어섰던 때였다. 우리는 인천공항에 가보기로 했다. 가서 데스티네이션 구경이라도 해보자, 야 100만 원만 들고 (100만 원 같은 게 있을 리 없었지만) 어디로 확 가버릴까? 돈 떨어질 때까지 있으면 되잖아. 뭐라도 되지 않을까? 적어도 죽지는 않을 거 아냐,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 얘기를 하다 보니 공항에 꼭 가보고 싶어 졌는데, 문제는 인천공항은 지하철을 타고 가야 한다는 거였다. 여행을 많이 안 해본 촌시러운 애들이라서, 기차에 나란히 않아 맥주 마시는 걸 꼭 하고 싶었다. 근데 지하철이라니!
기차를 타고 맥주를 마시기 위해 인천이 아닌 다른 곳을 가느냐, 아니면 곧 죽어도 인천공항이냐를 두고 고심하다 결국 인천공항에 가기로 했다. 그렇다고 맥주를 포기할 순 없었다. 당시에는 지하철이 공항까지 연결되지 않아, 1호선을 타고 인천까지 간 후 버스를 타고 공항을 가야 했다. 우리는 왕십리역에서 만나 역사 편의점으로 갔다. 캔맥주 두 개를 사서 가방에 넣었다. 용산에서 1호선으로 갈아탔다. 출근 시간이었는데 세상에. 사람이 정말 많았다. 인천에서 서울로만 출근하는 줄 알았지, 서울에서 인천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사람들 사이에 껴서 서서 한참을 가다 겨우 자리에 앉았다. 우리의 꿈을 이룰 순간이다. 우리는 가방에서 맥주가 담긴 비닐봉지를 꺼냈다. 사람들은 키 큰 해바라기처럼 우리 앞에 빽빽이 서 있었다. 칙! 캔 맥주를 땄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따가운 시선이라기보단, 부러운 시선이랄까. 하긴 왜 안 부럽겠어? 아침 8시 출근길 지하철에서 캔맥주를 마시는 뻔뻔하고 호기로운 젊음의 위용이라니.
공항은 거대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국을 떠나고, 또 들어오고 있었다. 우리도 언젠가 한국을 나가볼 수 있을까, 힘들지 않고 불안하지 않은데 돈도 버는 직업은 없을까, 이런 얘기를 하며 공항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그게 우리의 스무한 살이었다.
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 친구는 강사로, 나는 간헐적 여행자로(? 이게 직업은 못되지만) 각자 잘 산다. 그때의 뻔뻔함과 호기로움은 조금 죽어버렸지만, 그래도 아주 조금 철이 든 것 같기도 하고 여기까지 온 우리가 자랑스럽기도 하다. 지금 출근길 지하철에서 맥주를 마시는 스무 살짜리 여자애 두 명을 본다면 난 아마 짜증을 낼 것이다. 그건 아마 약간의 부러움이 섞인 짜증이겠지.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까. 가끔 그때의 어렸던 우리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