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만 있으면 형제 중 한 명은 딸 역할을 한다고 했다. 엄마 외롭지 않게, 대화도 많이 하고, 엄마 마음을 잘 알아준다고. 그리고 그 역할자는 대부분 둘째가 그 역할을 담당한다. 맞는 말인 것 같다. 시어머님의 형제 둘이 그러하고, 우리집도 그러하다. 자주 부모님을 찾아뵙고, 안부를 묻고, 병원을 모시고 다니는 것은 남편이 한다. 남편의 형은 대부분 큰 일을 결정할 때만 나선다. 그렇다고 부모님의 생각하는 마음이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겠지만, 표현하는 면에 있어서는 둘째가 더 살갑다.
우리집의 아침 풍경은 둘의 대비가 극명하다. 우선 둘째가 먼저 일어나 나오며, 더벅머리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채 “엄마, 사랑해”라고 말한다. 아침 소변을 보러 화장실에 다녀와서는 나를 껴안고, 볼에 뽀뽀를 해주며, 다시 한번 말한다.
“엄마, 많~이 사랑해.”
우리는 서로의 등을 토닥거리며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를 말해주며 하루를 시작한다. 반면 첫째는 가족들 중에서 가장 늦게 일어난다. 본인이 인정하기에도 잠이 많다. 깨우지 않으면 오후가 되어서야 일어난다. 학교 등교때문에 억지로 깨우면 이불 속에서 불쾌한 목소리로 웅얼거리다 깨어난다. 그렇게 방에서 나온 첫째는 시크한 얼굴로 바로 화장실로 직행한다. 이후에도 첫째는 대부분 말없이 식탁 앞에 앉아서 졸린 얼굴로 인상을 구기며 앉아있다. 기껏 아침을 차려놨는데 구겨진 얼굴이라니, 그냥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가도 어느 날은 화가 나는 날도 있다. 아침부터 따듯한 국과 밥을 해서 대령하는 엄마 마음도 몰라주고 자신만 아는 아이에게 화가 나는 것이다. 하지만 화를 내지는 않는다. 아침부터 아이와 말다툼을 하기 싫은 것도 있고, 혹시 편애를 하는 것처럼 비춰질까봐서다. 이미 덩치가 나보다 한참 커버린 아이는 스스로가 어른이라고 생각하며 내 말을 듣지 않은지 오래되었고, 그러면서 우리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진 것만 같다.
형제를 키우는 집안을 보면 대부분 첫째 아들을 어려워 하는 것 같다. 나 또한 다르지 않다. 나만의 뇌피셜일 수도 있지만, 성인이 된 이후의 첫째 아들의 발언이나 태도는 아버지 다음으로 집안의 어른과 같은 느낌이랄까. 그건 예전 회사 동료를 봐도 그렇고, 형제만 있는 남편의 집안을 봐도 그렇다. 가끔 큰 아이가 나에게 반항할 때마다 내가 나중에 나이 들어서 남들처럼 큰아이 눈치를 보게 되는 것은 아닐지 은근히 걱정도 된다. 아이 눈치를 보는 엄마의 모습만은 피하고 싶은데…
이것이 몹시 싫어서 아이가 나에게 반항할 때마다 더 크게 화를 내고 감정이입을 하곤 했다. 아이에게 지기 싫었다. 그러나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나도 큰아이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춘기의 예민함을 일일이 상대하려니 피곤한 것도 있다. 다들 이렇게 큰 아들을 어려워하게 되는 걸까?
반면 둘째는 대부분 편하게 생각한다. 사소한 심부름에서부터 부모님이 아프실때 병원에 모시고 다니는 역할도 남편 몫이다. 우리 집에서도 둘째가 심부름 담당이다. 꼭 그렇게 하려고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둘째가 더 빠릿하다고나 할까. 기계를 다루거나 공구를 다루는데 형보다 더 능숙한 것도 한 몫하고, 형보다 거절 횟수가 적으니 더 시키게 되는 것도 있다. 그렇다고 첫째가 안 하는 것은 아닌데, 둘째가 더 편하다.
격정의 사춘기를 겪으며 간혹 첫째가 나에게 심하게 잔소리를 할 때가 있다. 같이 싸우다 지쳐서 내가 입을 다물고 있어도 그의 잔소리를 끊이지 않는데, 그때 둘째가 나서서 중재를 한다.
“형, 엄마가 알았다고 하잖아. 그만해.”
역시 내 편은 둘째밖에 없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첫째와는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표현에 있어서 어색하고 부자연스럽다. 둘째보다 어른으로 먼저 어른으로 대하게 되고, 스스로도 어리광을 부릴 나이가 아니라고 생각해서인지 사춘기 이후 부쩍 어른 스러워졌다. 본격적으로 사춘기 성장기를 거치며 스킨십도 싫어했다. 밥을 먹을 때 “먹고 건강해라~”하면서 등을 쓰다음을 때가 종종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아이가 싫어하는 티를 냈다. 어느 육아서에서 사춘기 남자 아이들은 과도한 스킨십을 싫어한다고 읽은 것 같은데, 등을 쓰다듬는 일이 그렇게 과한 스킨십인가 싶어 서운해졌다. 그 다음부터는 말만 하고 끝내거나 필요한 말만 하게 되었다. 손님 같은 느낌이랄까.
이런 거리두기 자체가 아이를 어렵게 하는 것일까? 어째서 첫째는 거리두기가 되고, 둘째는 아직도 친밀한 것인지, 그것이 부모의 양육태도 때문인지, 어쩔 수 없는 환경때문인지 궁금했다. 나는 4남매 중 맏딸이다. 엄마도 나를 이렇게 불편해할까, 궁금했다. 친정엄마와 그렇게 친밀한 사이는 아니라서 부담없이 스킨십을 한 기억도 별로 없어 비교대상이 없다. 주변에 딸을 키우는 엄마들에게 물어보니 사춘기 때문에 겪는 고통은 비슷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딸이 어렵거나 손님같이 느껴지지는 않는다고 했다.
예전의 어른들은 아버지 대신 장남에게 기대하는 바가 많았기때문에 그렇다고 쳐도, 나는 남편 대신으로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왜 어려워 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두 가지다.
첫째, 아이와 나의 성향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는 나보다 남편의 성향을 더 많이 닮았다. 자존심과 고집이 세고, 꾸준히 무언가를 축적해가기보다는 승부사의 기질이 있다. 이상이 높고, 현실적인 결과가 있어야 성취감을 느끼는 스타일이었다. 아침보다는 저녁과 밤에 공부하는 올빼미형이었다. 나도 자존심과 고집은 세지만 현실적인 결과보다는 무언가 꾸준히 성실히 해내는 것에 성취감을 느끼는 편이다. MBTI도 나와 반대였다. 나는 J, 그는 P. 그러니 많은 부분을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갈등을 겪었다. 사춘기 아이와 부딪칠때마다 데자뷰처럼 남편과 신혼시절 싸웠던 기억이 떠오르곤 했다. 반면 둘째는 나와 성향이 비슷했다. 그렇다고해서 첫째와 둘째의 사랑의 무게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형제를 이해하는 내 마음이 달라지는 것이었다. 첫째는 불안하고, 둘째는 편했다. 반면 남편이 아이들을 보는 시각은 첫째는 편하고, 둘째는 불안해하는 것 같다. 남편에게 첫째에 대한 불안을 이야기하면 그는 아이가 무엇을 하든 믿으면 된다고 했다. 반면 둘째는 똘똘한만큼 조심해서 가르칠 것이 많다고 했다. 즉, 나와 다른 성향의 아이를 키우게 되면 불안하고 불편한 것 아닐까.
두 번째는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이 사회에서 규정되는 어떤 무의식에 나나 남편을 통해 내 아이에게 전달되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내 양육 방식에서, 무의식에서 맏아들로서의 어떤 책임감이 아이에게 전달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네가 형이니까 양보해”라던가, “네가 동생을 돌봐야지”하는 것들 말이다. 나 또한 맏이로서 많은 책임감을 느끼며 자랐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공동체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굴레 아닐까. 아마 형제가 있는 많은 가정에서 이런 식으로 맏이의 성향이 완성되리라 생각한다. 그러니 보통의 가정에서 엄마와 다른 성향의 아들이라면 첫째는 어려운 어른으로 자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아마 첫째만 키웠다면 나는 아이를 더욱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둘째를 키우면서 서로 다름을 알 수 있었다. 만약 성별이 다른 남매를 키웠다면 성별의 차이일 수도 있다고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결국 나는 첫째를 어려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나와 다른 성향, 무의식적으로 전달된 책임감, 무엇이든 처음인 육아, 사춘기 등, 이 모든 것이 첫째와 나 사이에 있었다. 하지만 안다. 그렇다고 해서 애정과 사랑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내가 그를 잘 이해하지 못하듯이, 그도 나를 잘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인정과 간극이 오히려 우리 사이를 더 윤택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많은 가정들이 그런 선택으로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언젠가 그는 어른이 될 것이다. 내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많은 것을 알아갈 것이다. 둘째보다 조금 일찍 엄마의 품안을 떠나는 그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푸는 것이 지금 내가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