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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틀 Aug 23. 2021

X세대의 '라떼는 말이야'

누구나 기성세대가 된다

"우리도 한때는 X세대였는데..."


나의 말에 90년대생 A가 빵 터졌다. 생각보다 웃음소리가 커서 나는 조금 민망해졌다.


지금은 4050세대가 되어버린 70년 대생들. 우리도 한때는 시대와 유행을 선도했던 신세대였다. HOT의 힙합 바지로 동네를 쓸고 다니기도 했고, 기성세대와 충돌하며 우리의 개성을 뽐내기도 했다. 다 같이 잘살아보자는 새마을 운동 노래를 듣고 자랐지만, 권위주의에 저항하며 개인주의를 내세울 줄도 아는 낀 세대.


요즘은 밀레니엄 세대를 뜻하는 MZ세대가 대세다. 그들과 대화를 할 때는 나도 모르게 '라떼는 말이야'라는 말을 하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한다. 꼰대라는 말을 듣고 싶지도 않거니와 '라떼는 말이야'라는 식으로 시작되는 말에 공감하고 행동을 변화시킬 MZ세대는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검열을 하다 보면 MZ세대인 그들과 나의 공통 관심사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꽤 어색한 침묵이 꽤나 길게 이어진다는 사실에 훔칫 놀라기도 한다. 내가 이토록 대화력이 부족한 사람이었나.  


나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면 이리저리 튀고 싶지만 튈 곳을 찾지 못하는 공 같았다. 공은 불완전했으며, 언제 터질지 모르는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았고, 홀로 있을 때면 바람이 빠져 너덜너덜했다. 공에는 열정이 있었다. 열정은 다시 차오르고 빠지기를 반복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그 주기가 꽤나 길어졌다. 반복의 주기가 길어지자 공은 탄력을 잃었고, 분노와 억울함의 감정들이 고무공 늘어지듯 늙어버렸다.


어색한 침묵을 뚫고, A가 물었다. '라떼'를 물어보는 거였다.

"여자라고 차별대우를 당하거나 억울함 같은 거 없으셨어요?"

"있었죠."

"구체적으로 어떤 사례가 있을까요?"

"많았는데..."


'많았는데...'라는 말 뒤로 더 이상의 말을 잇지 못했다. '라떼는 말이야' 사연은 많고 많았다. 그런데 떠오르지 않았다. 그 사연들이 사라진 건 아닌데, 그냥 더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이 느낌은 뭘까, 한참을 멍하니 생각했다.


백설공주도, 신데렐라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까지만 알았던 젊은 시절, 그 이후의 현실적인 이야기가 사실은 그들이 늘 행복하지만은 않을 거라는 진실을 알기까지 오래걸리지 않았다. 취직하고 나서는 회사와 오래오래 행복할 것 같았지만 시시때때로 퇴사의 고비가 있었고, 결혼 후 불행은 남의 나라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내 이야기였다.


나는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했고, 불안을 꽁꽁 끌어안은 채 화장실에 숨어 숨죽여 울곤 했다. 일하면서 억울했던 사연은 모두 풀어내 책 한 권이 되었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고, 내가 변해야 했다. 다윈의 진화론처럼 나는 세상에 적응해 나갔다. 이런 젊은 날을 보내는 것은 X세대나 MZ세대나 다르지 않다고 본다. 젊음은 그 자체로 어설프고 벅차니까. A의 질문은 그런 면에서 의미 있었을지도 모른다.


"많았는데, 이제 잘 생각이 안 나요. 그땐 억울하고 흥분했는데, 글로 풀어내서 그런가 생각이 잘 안 나네요. 다 지나간 일이기도 하고, 세상도 변하고 있으니까. 좀 느리지만 세상도 변하고 있으니까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나만 적응하고 변하는 게 억울했는데, 어느 순간 고개를 들어보니 세상도 변하고 있었다. 여자들의 육아휴직 1년은 보통의 일이 되었고, 육아휴직 중에도 승진하는 직원이 생겼다. 남자들의 육아휴직도 흔해졌다. 승진시기에 맞추어 출산 계획을 늦추기도 한다. 여전히 야근이 존재하지만 주 52시간이 정착되는 분위기고, 적어도 야근하지 않는 것을 열심히 일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진 않는다.


나는  변화의 바람에 X세대가  역할을 했다고 본다. 아이 키우며 차별받고 흥분하던 워킹맘 선배는 이제 팀장의 자리에 섰고, 권위에 저항하던 동료도 팀장이 되었다. 주변을 돌아보면 집안일에 적극적이진 않았던 남성들도 적어도 노력은 하고 다.집안일을 맞벌이라는 환경하에 결혼  가르쳐하는 힘겨움이 있었지만, 어쨌든 그들도 집안일이 여자의 일만이라고 외치진 않는다. 그런 면에서 X세대의 '라떼는 말이야'  달달하지 않나.


'라떼는 말이야'라는 말은 기성세대의 언어겠지만, 누구나 기성세대가 된다. 그리고 '라떼는' 누구의 언어라도 될 수 있다. MZ세대가 기성세대가 되는 날, '라떼는 말이야'가 그들의 언어가 되는 날, 그들이 더 이상 젊음을 버거워하지 않는 날, 세상은 또 어떻게 변해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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