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본캐는 리서처(Researcher)다. 하루 종일 모니터 앞에 앉아 시장의 거시적인 흐름을 읽고, 트렌드라는 이름의 파도를 분석한다. 그리고 퇴근 후, 양말을 벗기도 전에 몇푼 모아 산 위스키를 조금 따라 혀에 적시면서 부캐인 '서비스 기획자'로 변신한다. 이것저것 사이드 프로젝트를 벌여놓고, 화면 설계서를 그리며 끄적이는 게 내 밤의 일상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이 이중생활엔 꽤나 낭만이 있었다. 낮에 얻은 인사이트를 밤의 기획에 녹여내면, 세상에 없던 편리한 무언가가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요새 나는 기획서의 '개요'란에서 커서가 깜빡이는 걸 보며, 도박꾼들이 경마장에서 느꼈을 법한 깊은 허무를 느낀다.
리서처로서 단언하건대, 창업할 만한 IT 아이템의 영토는 쪼그라들다 못해 소멸 중이다. 기획자로서 머리를 쥐어짜며 "사람들이 뭘 불편해하지?"를 고민하는 순간, 옆 모니터에 띄워둔 인공지능 관련 리포트가 나를 비웃는다. "그거, AI가 다 해줄 건데 뭘 고민해?"
과거의 기획은 '아이디어' 싸움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속도'와 '인프라'의 싸움이다. 내가 밤잠을 줄여가며 6개월짜리 로드맵을 짜고, 제품을 완성해 런칭할 시점? 리서처의 시각으로 볼 때, 그때쯤 인공지능 모델은 이미 두 세대는 진화해 있을 것이다. 내 기획서는 인쇄되기도 전에 고문서가 된다.
사주 분석 앱을 보자. 예전 같으면 용한 알고리즘을 짜고, 신비로운 보라색 UI를 입히느라 밤을 새웠을 것이다. 지금은? 생년월일만 던져주면 LLM(거대언어모델)이 3초 만에 토정비결을 읊는다. 생활 편의 서비스부터 검색까지, 모든 '기능'이 인공지능이라는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할까?"
이건 이제 레드오션을 넘어선 질문이다. 그냥 죽음의 땅에 발을 들이는 꼴이다. 인공지능의 학습 속도가 나의 기획 속도와 개발 속도를 압도한다. 우리는 지금 포크레인 앞에서 삽질을, 아니 티스푼으로 흙을 파며 "어떤 숟가락이 더 그립감이 좋을까"를 고민하고 있는 셈이다.
유발 하라리가 말했듯,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의 시대에서 데이터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인간 유저의 눈을 즐겁게 할 UI/UX 개선 따위에 목숨을 건다. 버튼의 위치, 컬러의 배합... 인간을 현혹시키려는 그 표면적인 노력들은, 감정이 없는 인공지능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나는 밤마다 쓰는 기획서의 방향을 틀었다. 다음 시대의 아이템은 사람을 대상으로 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이제 개별 앱을 켜는 대신,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거대한 인공지능 비서에게 말을 걸 것이다.
그렇다면 넥스트 창업의 기회는 어디에 있는가? 바로 그 '인공지능 비서'가 가져다 쓸 수 있는 인프라를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의 고객은 이제 변덕스러운 인간이 아니라, 효율성만 따지는 알고리즘이다.
어떻게 해야 내 서비스가 사람의 눈이 아닌, 기계의 알고리즘에 의해 '선택'되고 '사용'될 것인가? 이것이 관건이다. x402 같은 프로토콜이 등장하는 맥락도 이와 같다. 기계와 기계가 소통하고 거래하는 판을 까는 것.
나는 이제 사람을 위한 서비스를 기획하지 않는다.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지배 종족에게 "제 데이터를 써주십시오"라고 공물을 바치는 제단을 쌓거나, 그들이 다닐 고속도로를 닦는 기획을 한다.
씁쓸하냐고? 글쎄. 리서처의 머리로 미래를 보면 이게 정답이고, 기획자의 가슴으로 보면 이건 생존 본능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건배를 든다. 우리의 새로운 고객님, 인공지능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