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미안 (2)
내가 경험했던 일들에 대해 줄곧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다행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계산을 해보고 손익을 따져보니 정말 다행이었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다. 나에게는 아빠가 돌아가신 일 역시 그렇다.
아빠는 어느 날 갑자기 혈액암을 진단받고 6월에 돌아가셨다. 그해의 여름은 이례적인 폭염이 지속되어 뉴스에서 자주 열사병을 떠들던 아주 뜨거운 여름이었다. 내가 아는 아빠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그 어떤 무더위도 밭에 나가는 아빠를 말릴 수 있었을 거 같지는 않다. 아빠는 우리 가족의 첫 여름휴가(고작 집 근처 계곡에서 몇 시간을 놀고 온 일이지만)를 두고도 빠듯한 농사일을 포기하지 못했다. 그래서 휴가일 직전까지 몇 날 며칠을 날이 깜깜해지도록 밭에서 깨를 떨었다. 그 모습을 보고 안타까움이 들었던 이장 아저씨 내외가 와서 같이 일을 거두어줘서 무사히 휴가 전날에 일정을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탓에 아빠는 휴가에서 돌아오자마자 지독한 몸살에 걸렸다. 그게 우리의 온 가족(엄마와 아빠, 오빠와 새언니, 나와 상봉이)이 함께한 첫 가족 여행이자 마지막 가족 여행이었다. 그래서 그건 아마 아빠의 67년 평생 가장 설레고 뿌듯한 여행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농사일을 손에서 내려놓지 못했던 것이다.
아빠는 내리쬐는 땡볕이 무서운지도 모르고 밭에서 묵묵히 일을 하느라 온 팔에 오돌토돌 독이 올라 있던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 해 35도를 넘나들던 날에도 아빠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구름 자리가 유일한 그늘이 되는 허허벌판에서 두피에 딱지가 지도록, 온몸에 열독이 오르도록 묵묵히 밭을 매고 고랑을 만들고 깻모를 심고 있었을 것이다. 아빠가 그런 날을 하루라도 덜 보내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다다음 해 겨울에는 코로나가 시작되었다. 아빠는 아마도 당신의 20대 때부터 천식을 앓았는데 점점 증상이 심해져 내가 중학생일 때는 호흡기 질환 장애 3급을 판정받았다. 가만히 앉아 있을 때도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시느라 아빠의 어깨는 늘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그래서 암 병동에서 간호사가 아빠에게 마스크를 쓰라고 계속 권했음에도 아빠는 답답하다며 절대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나와 엄마도 줄곧 아빠에게 마스크를 쓸 것을 권유했지만 아빠는 우리 말을 듣지 않았다. 마스크를 쓰지 않는 아빠는 암에 걸리지 않았다면 분명 코로나에 걸렸을 것이다. 부모의 보살핌 없이 대부분의 시간을 외롭게 지내온 아빠가 생의 마지막 날을 병동에서 홀로 보내지 않아서 다행이다. 엄마와 내가 그 곁에서 아빠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숨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러니 나는 아빠가 코로나에 걸리기 전에 일찍이 암에 걸려 돌아가신 일을 다행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때로는 이렇게 다행이었다는 말에 이르는 일이 자의적인 퍼즐 맞추기뿐이라고도 생각한다. 내가 그 말을 저울대에 올릴 때 그 반대편 접시에는 차마 다행이었다고 말하기 어려운 다른 마음들이 올라와 있기 때문이다. 아빠는 당시로서는 매우 늦은 나이인 38세에 결혼을 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늘 나이가 많은 아빠였다. 내 기억 속에 아프지 않았던 아빠는 없었다. 늘 숨이 차서 힘들어하기도 했지만 이따금씩 사건 사고를 겪고 생의 끝에 닿았다가 무사히 돌아오곤 했다. 그래서인지 아빠는 자식이 결혼할 때까지 자신이 건강할 수 있을지 걱정했다. 딸의 결혼식에 지팡이를 지고 절뚝이며 입장할 순 없지 않냐고 웃으면서 얘기하곤 했지만, 평생 아픈 몸을 지고 늦깍이 아빠가 되었던 당신을 생각하니, 이제서야 그에게는 자식의 결혼이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다른 무게가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결국 아빠는 돌아가시던 그해 가을에 열린 아들의 결혼식을 보지 못했다.
아빠가 놓고 간 이런 무거운 아쉬움을 뒤로하고 그럼에도 다행이었다고 말한다. 그건 아빠를 떠올릴 때마다 입안에 안개를 한가득 머금은 것 같은 먹먹함이 올라오기 때문이다. 다행이었다는 말이 아니면 이 먹먹함을 어떻게 지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빠의 삶을 생각하면 자꾸만 위로의 말을 찾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