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를 만나러 대전에 갔다. 잘생긴 애가 번호를 물어보길래 하루동안 술이나 먹고 놀 생각으로 연락처를 알려줬다. '어차피 난 대전에 살지도 않으니까.' 가벼운 마음이었다. 새벽 5시까지 술을 마셨고 다음날 대구로 내려왔다. 다음 주 주말이 되자 그가 대구로 내려왔고 나는 차츰 그에게 빠지게 되었다.
성진은 난생처음으로 만난 '말이 통하는' 남자였다. 단지 말을 뱉는 것이 아니라 진짜 소통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대화의 주제는 일상적인 이야기부터 철학과 가치관, 도덕에 대한 생각을 넘나들었다. 말 끝마다
"너, 나야? 우리 쌍둥이 아니야?" 할 만큼 서로의 생각이 비슷하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남들이 들으면 지루하다거나 뜬구름 잡는 생각이라고 여길법한 이야기도 거리낌 없이 할 수가 있었다. 그는 무슨 말을 하든 수용해 줄 것 같았다. 그 앞에서 편안해지는 나를 느끼며 드디어 반쪽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출근을 하면 톡이 왔고 자기 전까지 연락을 했다. 주말마다 만나며 한 달이 지났다. 내가 보고 싶다고 했을 때 그도 보고 싶다고 해서 나는 우리가 사귀게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성진은 나의 연인이 되기를 거절했다.
장거리가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거절에 대한 진짜 이유는 '불편을 감수할 만큼은 너를 좋아하지 않아서'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고작 대구에서 대전일 뿐이지 않은가? 미국-대구, 서울-대구도 아닌 KTX를 타면 40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란 말이다.
나라고 장거리 연애를 환영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나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되어버려서 달려가는 마음을 멈출 도리가 없었다.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다시 생각해 보라며 설득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지만 '어떤 선택을 하든 너의 결정을 존중하겠다'라고 말했었기에 잡을 수가 없었다. 좋아했던 그에게 한 톨의 거짓도 말하고 싶지 않았고 내가 한 말을 지키고 싶었다.
좋아해 달라고 말을 하면 그는 또 거절을 해야 하겠지. 내 마음이 중요한 만큼 그 애의 마음도 중요하니까, 그가 나에게 미안해하는 상황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차이고 3일이 지났을 때, 연락이 왔다. 순간이었지만 다시 기대하고 있는 내 모습이 비참했다. 그와 연락을 하면서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어장에 갇힌 줄 알면서도 매 순간 그에게 휘둘리겠지. 나를 지키기 위해서 결단을 내려야 했다.
‘보고 싶다’ 혼잣말이 터져 나오는 마음을 간신히 누른 채 '나에게 돌아올 것이 아니라면 연락하지 말아 달라'라고 했다. 너무 좋아해서 아예 보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연락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튀어나오면 '하루만 참아야지, 오늘 딱 하루만 참아야지.' 생각했다. 어젯밤을 접고 오늘밤을 접고, 접고 접은 밤들을 켜켜이 쌓아 마음에 모아 두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있었다.
떠나가는 모든 이들의 축복을 빌어줬던 나였지만, 그에게만큼은 ‘나를 잃고 후회를 했으면 좋겠다. 마음이 아팠으면 좋겠다. 다시 돌아오고 싶었으면 좋겠다’라는 못난 마음이 비죽 솟는다.
그를 웃게 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이제 와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조용히 잊히는 것뿐이다.
너무 슬퍼서 자꾸만 잠이 온다. 내일이 되면 덜 보고 싶을까? 나는 왜 이렇게 바보 같을까? 진심으로 누군가를 좋아했던 사람들은 모두가 가슴속에 백개의 질문쯤은 안고 살아가는 것인지. 또 망해버린 사랑에 평정심을 찾지 못하는 내가 답답해 잠으로, 그저 잠으로 도망쳐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