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를 들이킬 때 목 안에서 톡톡 터지는 탄산이 내가 아는 맥주 맛의 전부일 정도로 나는 맥주를 잘 알지 못한다. 에일의 진하고 쌉싸름한 풍미를 알게 된 것도 최근의 일이다. 한 번은 J가 벨기에 맥주를 한 박스 주문한 적이 있다. 맥주 가게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술이기도 하고, 가격이 비싼 편이어서 직접 주문을 했다고 한다. 대게 즉흥적 판단으로 술을 구매하는 나로서는 꽤 치밀한 그리고 뜻밖의 쇼핑 중 하나로 기억한다. 그래서 술이 도착했을 때 상기된 표정으로 냉장고에 한병씩 차곡차곡 넣는 J와는 달리 나는 그 모습을 심드렁하게 쳐다봤다.
이 맥주는 대체로 신맛과 약간의 과일 맛으로 이뤄져 있다. 불투명한 검붉은 색상을 띄고 있고, 탄산은 적은 편이며 맥주보다는 와인으로 분류해도 수긍할 수 있을 정도로 기존의 맥주와는 완전히 다른 맛을 갖고 있다. 이 신맛이 오묘한데 장시간 숙성됐음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적당하게 혀끝과 입안 양쪽의 침샘을 자극한다. 그렇다고 식초처럼 지나치게 자극적이지는 않다. 이후로 이 맥주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맥주 중 하나가 됐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런 신맛을 내는 맥주를 말 그대로 신맛 맥주(Sour beers)라고 따로 분류할 정도로 맥주계에서는 어느 정도의 지분을 갖고 있는 편이다.
코펜하겐을 여행하면서 제일 좋았던 장소는 니하운도 뮤지엄도 유명한 가구 숍도 아닌 미켈러 바였다. 10년 전 고등학교에서 수학과 물리를 가르치던 미켈이 코펜하겐에 있는 본인의 집에서 맥주를 양조하기 시작한 이래로 미켈러는 현재 40여 개국으로 수출하고 있는 세계적인 브루어리가 되었다. 미켈러의 본거지답게 코페하겐 도시 곳곳에는 다양한 형태의 미켈러 바가 운영되고 있다. 4일 동안 세 곳의 미켈러 바를 방문했는데 정작 덴마크의 국민맥주 칼스버그 양조장은 방문하지 못할 정도로 이곳에서 맥주를 마시는 일에 빠져있었다.
그중 기억에 남는 곳은 코펜하겐 중앙역 근처에 위치한 곳이다. 반지하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서너 개의 계단을 내려가야 하는데 가장 먼저 시선이 멈추는 곳은 벽에 걸린 맥주 메뉴판이다. 1번부터 20번까지 분필로 큼지막하게 맥주의 종류, 도수, 가격이 작성되어 있고 그 아래에 맥주 탭이 일렬로 줄지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그중에는 알코올 함량이 10%가 넘는 맥주들도 꽤 있기 때문에 네발로 기어서 집으로 가고 싶지 않다면 신중한 선택을 해야 한다.
오늘의 목표는 10잔이라고 다짐을 하며 첫 번째 잔으로 신맛이 나는 맥주를 스텝에게 추천받았다. 맥주에 대한 감상을 영상으로 남겨보기도 하고, 양손바닥을 비비며 '다음 잔은 뭘로 마실까?'라는 고민에 서너번 빠지고 나니 깊어가는 밤만큼이나 얼큰하게 취해버렸다. 맥주 품평회 영상은 연이은 NG로 쓸모없게 돼버렸고, 술을 고작 석잔 밖에 마시지 못하는 이유를 형편없는 간 탓으로 구시렁거리며 집으로 돌아갔지만 맥주 몇 잔 발견한 일이 이렇게 꽉 찬 기억으로 남을 줄은 몰랐다.
J가 온라인으로 주문한 그 맥주는 지금 런던에 머물고 있는 집의 냉장고에도 두병이 보관되어 있다. 글쎄 '나 몰래 캐리어에 넣어왔다니, 세상에나!' 하고 놀랐던 게 3개월 전. 이제는 아까워서 마시지 못하는 술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