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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기린 Mar 05. 2017

달빛 아래에 흑인 소년들은 파랗게 보인다

배리 젠킨스의 <문라이트>


영화가 가진 아름다운 능력 중 하나는 누군가의 인생을 상상초월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는 점이다. 영화에선 평범한 사람도 지구의 영웅이 될 수 있다. 우여곡절 끝에 기적 같은 사랑이 이뤄지기도 한다. 그래서 가끔 영화를 보며 상상에 빠질 때가 있다. ‘만약 저 감독이 내 인생을 연출한다면 어떨까?’ 글쎄, 홍상수라면 떠올리고 싶지 않을 술자리를 잔뜩 보여줄 것이고, 박찬욱이라면 블랙코미디, 그리고 류승완을 만나면 어디서 쥐어 터지고 다니고 다닐 확률이 높다. 


<문라이트>는 한 사람의 인생을 다룬 영화다. 인턴을 정규직처럼 자꾸 부리려는 회사 덕분에 영화 앞부분을 좀 날렸다. 어린 샤이론 ‘리틀’의 이야기를 15분이나!!! 못 봤다. 사족은 그만 쓰고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겠다. 샤이론의 인생은 어떻게 보면 불쌍하게 보일 여지가 많다. 가족 문제, 성 소수자, 가난, 마음먹으면 인종차별까지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감독은 샤이론을 불행한 사람으로 만들어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보다 그의 인생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걸 택한다. 이 영화의 아름다움은 여기서 나온다. 그로테스크하고 우울한 연출보단 영화 내내 채도 높은 색으로 연출한 감독의 의도가 돋보인다. 


방금 지적했지만, 이 영화는 색깔의 영화이기도 하다. ‘달빛 아래에 흑인 소년들은 파랗게 보인다(In Moonlight Black Boys Look Blue)’라는 원작 희곡처럼 주인공의 상황이 배경으로 전개된다. 불안과 고통을 상징하는 빨강, 강렬한 갈등의 초록, 그리고 달빛 아래 주인공처럼 아름다움의 파랑. 영화 중간 깜박 꺼리는 네온도 연출의 세련미를 더했다.


케빈을 만나는 ‘파트3. 블랙’의 모든 장면은 관객의 감정을 극대화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해도 무방하다. 마치 주인공들을 따라가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처음 샤이론이 케빈을 만나기 전까지 느끼던 불안까지 전해진다. 케빈이 음식을 만드는 장면,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가는 장면에서 이전 파트에 비해 좀 더 노골적으로 감정이입을 유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내심 불안하긴 했다. 혹시라도 케빈이 이상한 사람이면 어떡하나-둘이 안 좋게 이별하면 어쩌나 고민이 많았다. 다행히 영화는 주인공이 사랑하는 사람 옆에서 안정을 느끼는 장면으로 마무리되었다. 사실 파트3 내내 왕가위가 떠올랐는데 감독이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말한 내용을 봐서 역시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비열한 인간-선량한 인간밖에 없었나 싶을 정도로 명확한 선악 구도가 판을 치는 영화들 사이에서 오랜만에 즐겁게 본 것 같다. 한편으론 이 영화가 단조롭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주인공이 불행한 인생을 살긴 했지만, 극단적인 상황에 놓인 적도 없고, 연출도 자극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내 인생을 연출할 누군가가 이 영화의 감독이 되었으면 좋겠다. 인생에 암울한 면이 있고, 어떻게 보면 불쌍하게 보일 여지까지 있지만 행복할 자격도 있는. 사랑하는 사람의 품 안에서 편안해할 시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큰 위안이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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