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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서치 Jul 14. 2022

모스크바는 호곡장이 아니었다.

목 놓아 울어보기 좋은 곳, 호곡장(好哭場)     

연암 박지원이 사절단의 일원으로 청나라의 수도 연경으로 향할 때의 일이다. 박지원이 광활한 요동 벌판을 마주하고 처음 내지른 탄성은 바로 “좋은 울음터다. 가히 한바탕 울어볼 만하구나.”(好哭場 可以哭矣)였다. 옆에 있던 정 진사가 “이 좋은 장관 앞에서 웬 울음 타령이냐”라며 반문하자 박지원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사람들은 칠정(七情, 희노애락애오욕) 중에서 '슬픔(哀)'만이 울음을 내는 줄 알지, 칠정 모두가 울 수 있는 줄은 모르오. 울음은 지극한 감정이 터져 나오는 것으로, 천지(天地)에서의 우레에 비할 수 있는 것이오. 참된 울음은 갓 태어난 아이가 어미 배 속에 있다가 탁 트인 넓은 곳으로 빠져나오며 거짓 없이 감정이 다 하도록 참된 소리를 질러 보는 것과 같소. 나도 이곳에서 꾸밈없는 울음을 울어보고 싶구려.”


 『열하일기(熱河日記)』, 「도강록(渡江錄)」 中


모스크바는 내게 호곡장(좋은 울음터)이 아니었다. 가급적 A가 닿지 않는 먼 곳으로 가고 싶었다. 내 안에 주홍글씨처럼 새겨진 A의 존재를 모르는 곳으로 가서, A를 유기하고 싶었다. 스스로 만든 허상 속에 갇혀 지낸 십 년. 마침표를 찍어 줄 명분이 필요했다. 살아가는 힘과 좌절을 동시에 주는 A는 내가 반드시 넘어야 하는 허들 같은 존재였다.       

    

꿈 많던 십 대 시절 A를 만났다. 지란지교를 꿈꾸며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드러내도 괜찮은 사이라 여겼다. 어느 날, A를 내 친구에게 소개해주게 되었다. 둘 사이에서 나는 낯선 감정을 마주하게 되었다. 내 친구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아니라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만약 A를 좋아하게 된다면 나 역시 상처받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동시에 스쳤다. 친구라는 관계는 괜찮아도, 연인으로서의 A는 위험하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누구나 그러하듯 피하고 싶다 해서 피해지지 않는 일이 인생에서는 종종 발생한다. 친밀감의 표시로 나를 걱정해주고 챙겨주는 행동과 말들은 남들에게 오해를 만들기에 충분했다. 지인들에게서 어느 순간부터 A가 너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말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완강히 부인했고, 시간이 갈수록 반신반의하며 그가 던지는 말들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A를 생각하는 시간이 늘어가게 되었다. 내 마음을 알아차렸을 때는 모든 것이 늦어버렸다.   

       

마음을 들키지 않게 연기라도 할 수 있는 나였다면, 처음으로 내 마음을 드러내던 순간이 안녕을 고하는 말이 아니었다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까? 나는 왜 A에게 당차게 좋다는 말 대신 마음을 감당하지 못해 안녕을 말했던 것일까. 그랬다면 좀 더 일찍 종결될 감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했다.     


나는 두려웠다. 당시에 편지에도 썼듯이 소탐대실의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A를 원했던 마음으로 인해 지란지교를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 말이다. 그렇다면 그 두려움은 어떤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에 대한 물음이 생겼다. 유기에 대한 공포였다.


누군가에 대한 마음이 자라나는 순간 나는 유기에 대한 공포를 인지하지 못한 채 본능적으로 도망쳤다. A가 내 친구에게 했듯이 내게 그러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나의 유년 시절의 경험이 나의 연애 감정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부모님의 별거 중 주위 사람들은 “엄마가 너희를 버렸다, 도망갔다.”라는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떠들었다. 소중한 사람이 나를 버릴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잠식했다. 누군가 내게 일보 다가오면, 나는 이보 도망쳤다. 그 순간들이 매번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뭔가 늘 삐거덕거리는 미성숙한 모습을 보였다.  


A는 내가 그러했듯, 내 마음을 모른 척했다. 나는 그 시간 왜 스스로 빗장을 닫고 제 발로 마음의 감옥으로 걸어 들어갔을까. A는 일종의 방어벽이었던 셈이다. 그런 A를 공식적으로 내쳤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놓지 못한 채 기생하면서 지냈다. 반사적 광영이라도 누릴 요량이었던 것일까.      

     

모스크바는 나의 호곡장도 곰스크도 아니었다. 나의 십 대와 삼십 대를 관통한 A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곳일 뿐이었다. 나의 호곡장은 글을 쓸 수 있는 모니터였다. 그 안에서 나는 통곡하고 절규했다. 글을 쓰면서 나를 찾고, 용서하고, 이해했다. 그 과정을 통해 나는 성장하며 스스로 만들어 낸 허상과 방어벽을 허물 수 있었다.            


<<글쓰기 수업 중 작성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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