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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서치 Sep 05. 2022

아들의 고백

  


몇 해가 지나면 오늘을 기억하는 일이 점점 흐려지겠지. 열한 살 아들의 달콤하고 귀여운 사랑 고백을 전해 들었다. 1학기 방학식을 하루 앞두고, 반 친구들과 롤링 페이퍼를 만들어 짧게 인사를 나눴던 모양이다. 가운데는 아이의 평소 표정을 닮은 얼굴 그림과 짤막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빼곡히 적혀 있는 인사들을 읽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아들이 마음에 들어 하는 여자아이의 이름을 찾아봤다. “여름 방학 잘 보내. 2학기 때 만나자!”라고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아들에게 물었다. “너는 **에게 뭐라고 써 줬어?” 아들은 쑥스러워하면서 말했다. “다른 애들과 비슷하게 써 줬어. 방학 잘 보내고 2학기 때 보자고.” 별말 아닌 말을 하면서 아들은 그 여자아이를 생각하는지 얼굴에 미소가 가득 번졌다. 한 번은 점심시간에 학교에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친구들과 운동장에 나온 아들은 나를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그 아이가 누군지 말해줬다. 아들이 마음에 두는 여자아이라 내심 궁금하던 참이었다.


       

여자아이는 놀랍게도 제 동생의 외모와 닮아 있었다. 허리춤에 겉옷을 동여매고 친구와 있는 모습을 보니 꽤 발랄해 보였다. 멋도 좀 부리는 듯했고, 제스처에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모습도 느껴졌다. 아들에게 그 여자아이가 왜 좋으냐고 물었더니 마음이 착해서 좋다고 했다. 지극히 아들다운 답이다. 언제부터인가 그 아이에 대해 말할 때마다 아들의 눈빛은 빛이 났다.   


      

롤링 페이퍼에 대해 말하던 아들은 몸을 비비 꼬아가며 내게 비밀을 말해줬다. “엄마, **이의 롤링 페이퍼 가운데 있는 그림 뒤에다 ‘사랑해’, 라고 적어뒀어.” 뜻밖의 고백에 놀랍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했다.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연신 멋지다고 말했다. 엄마의 응원을 받고 안심이 된 모양이다. 동시에 현실감이 다가왔는지 “내가 그때 잠깐 미쳤나 봐….”라며 안절부절못했다. 나는 아들을 힘껏 안아주며 엉덩이를 토닥여줬다. “아니야, 너무 멋져! 잘했어. 그 친구가 꼭 발견하면 좋겠다.”  


        

고백은 했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서 모를 것이라고 했다. 또래의 짓궂은 장난스러움이 잠시 발동한 아들은 “다른 친구의 이름을 적어둘 걸 그랬나.”라고 말했다. “혹시 그랬다가 **이와 그 이름 쓴 친구와 잘 되면 어떡하려고 그래. 만약 그래도 괜찮겠어?” 잠시 그런 일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던 아들은 절대 안 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녀석, 자연스럽게 사랑을 알아가는구나!’          



잠들기 전 나에게 “천만년 곱하기 천만년의 값보다 더 사랑해!”라고 말하던 아들이다. 평소에도 사랑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아들이라 어쩌면 좋아한다는 표현이 ‘사랑해’, 라고 나온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나는 아들의 고백을 전해 들으며 마음 깊은 곳에서 안심이 느껴졌다. 나와는 다르게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자연스럽고, 마음을 표현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아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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