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이 너무 행복해서 깨지 않는 꿈이었으면 싶을 때가 있다. 반대로 현실이 너무 끔찍할 땐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바라게 된다.
분명 내 지난 결혼 생활은 '모든 게 꿈이었으면'이었는데 별거를 하고 나니 이것마저 감사해서 '꿈이라면 깨지 않기를'로 바뀌었다.
별거 이후 1년이 지나도록 내가 소송 중인 사람인 걸 나 스스로 잊을 만큼 평온했다. 남편 몰래 짐을 싸 아이들만 데리고 집을 나와 셋방살이를 하는 사람치고 그늘 한점 없는 그저 감사한 날들. 어쩜 그냥 살던 대로 살아지는지. 지난 일들은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는지. 집을 나온 순간 적응을 했는데 문득 이 자연스러운 적응이 낯설 때가 있다.
무늬만 부부였지만 그래도 10년을 내 남편으로 살았던 사람인데 왜 1도 생각이 안 나는 거니.
어쩜 이리도 빈자리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건지 놀라웠다.
나 이렇게 평온해도 되나?
10년을 마음 졸이고 산 보람이 이렇게 폭풍 후 잔잔해진 호수처럼 평화로 보상이 주어졌다.
그러다 한 번씩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순간이 있다.
입사하고 이렇게 시간이 안 가기는 또 처음이다 싶었던 지난 한 주를 겨우 보내고 고대하던 추석연휴 첫날.
아이가 최근 다니기 시작한 수학 학원에서 내 준 숙제를 하던 오늘 저녁이었다.
늘 감정 기복이 염려되는 큰 아이가 요즘 갑자기 예전에는 없던 공부욕심이 생겨 기를 쓰고 수학공부를 하는 중이다. 공부를 할 때야 말로 감정이 최고조로 오르락내리락한다.
하지만 스스로 하고자 하는 기특함도 있고 힘들 것도 가늠이 가니 요새 시중 아닌 시중을 들어가며 최대한 비위도 맞춰주고 최대한 입맛도 맞춰줘 가며 나름 나도 바짝 긴장하며 신경을 쓰는 중이었다.
수학은 최대한 초등학생까지 집에서 주도학습하도록 버티면서 시간도, 돈도 벌어 볼 요량이었는데 모르는 문제가 나올 때마다 사달이 나는 걸 보니 안 되겠다 싶어 학원에 보내게 됐다.
대형학원은 처음이라 돌아가는 시스템에도, 늦은 하원시간에도, 많은 숙제에도, 이미 먼저 나간 진도 맞추느라 해야 하는 보충에도 너와 내가 정신없이 적응 중이라 몸살을 앓고 있어 서로 예민해져 있다.
숙제를 하다 모르는 문제가 나오면 내가 설거지를 하고 있거나 급한일을 보고 있을 때에는 별표치고 우선 넘어가도록 해보아도
모르면 당장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탓에 열일 제쳐두고 달려가주는 편이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어김없이 투덜대는 딸이다.
오늘도 역시 연휴인데 늦게라도 앉아 숙제하겠다고 낑낑대는 너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으려 눈치를 봐가며 모르는 건 달려가 봐주었다.
초4이지만 심화문제는 내가 봐도 꽤 낯설고 어렵기도 하다. 그래도 너의 답답함을 해소시켜줘야 하는 임무에 충실하고자 안 돌아가는 머리 굴려봐도 헤매기 일쑤다. 그럼 너의 짜증은 네가 문제를 풀지 못한 짜증이 아닌 내가 너의 답답함을 해결해주지 못한 짜증으로 갑자기 불똥이 나에게 튄다.
너의 태도에 나도 슬슬 혈압이 오르지만 참아봤다.
그리고 달랬다. 잠깐 쉬어하든 내일 하든 머리 좀 식히고 하라고. 억지를 부린다. 오늘 하든 내일 하든 어려운 문제는 달라지지 않는단다.
문제는 달라지지 않아도 너의 기분과 태도는 달라질 거라고 또 한 번 삼키고 타일렀다.
그래도 고집을 부린다. 지금 풀 거라고.
그렇다면 나의 작은 바람은, 적어도 수학머리 없는 어미가 이리저리 짱구를 굴려보는 성의를 봐서라도 잠자코 들어봐 주는 것이었다.
근데 넌 내 설명이 못마땅하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짜증을 쏟아냈다.
그렇게 짜증 낼 시간에
네가 다시 생각을 해보던지 엄마 설명을 차분히 다시 들어보던지 하라고 달랬더니 내 설명을 들어주긴 했다. 되게 못마땅한 태도로.
난 이미 기분이 상할 대로 상했고 속이 뒤집혔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심화문제 하나를 해결하고 책상으로 돌아가 다음 문제를 금세 풀고 다시와
"엄마 이번문제는 보자마자 2분 만에 풀었어!"
하며 웃어 보였다. 자랑스럽게.
하나도 기특하지도, 기쁘지도, 칭찬이 나오지도 않았다.
그때 터지고 말았다.
모르는 문제는 학원 가서 질문을 하라고 해도 당장 못 넘어간다고 알려달라고 하면서 그저 화풀이 대상을 찾는 것 마냥 엄마설명은 받아들일 준비도 안되어 있고, 무슨 말에도 짜증만 내면서도 끝끝내 당장 가르쳐달라고 하는 태도에 화가 난데다,
그 화가 가라앉기도 전에 다음문제 금방 풀었다 자랑하는 너에게 엄마가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다고. 어느 장단에 맞춰서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넌 마치 엄마를 감정쓰레기통으로 여기는 것 같다고.
너의 기분이 태도가 되고 그 태도는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너무 아프게 한다고.
그때 잊고 살던 기억이 울컥 올라왔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울부짖었다.
정말 별거 아닌 일에 너무 별거였던 내 인생 최대 암흑기 시절의 기억이 불쑥 치고 올라와 울분을 토해냈다.
안 해도 될 말까지 하고야 말았다.
"너희 아빠가 나가서 돈 잘 안 벌리고 하던 일 잘 안되면 집에 와서 엄마 못살게 굴고 돈 쓴다고 괴롭히고 우리한테 화풀이했었지? 그리고는 온갖 욕 다 들은 엄마 감정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 기분 풀리면 아무 일 없다는 듯 엄마 기분도 풀라고 강요했던 거 너 벌써 잊었어?"
"아니"
"넌 그걸 보고 어땠어? 좋았어?"
"아니..."
"너도 똑같은 거야 문제가 잘 안 풀리면 짜증이 날 수도 있고 화가 날 수도 있어 근데 그건 너의 기분인거지 너의 감정을 엄마가 막을 생각은 없어 하지만 그 감정을 누군가에게 쏟아내선 안 되는 거야 그리고 그걸 받아내느라 엄마 기분은 상해있는데 너는 다음문제 잘 풀리니까 금세 달려와 칭찬해 달라는 듯 신나서 얘기하는 널 보니까 너무 혼란스럽고 엄마감정은 무시당하는 기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