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자랑스러운 이혼도 있어요
누군가에게는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상처겠지만 내게는 그간 감추면 살아온 비굴했던 결혼생활을 마무리하게 된 일이 자랑스럽다. 동네방네 마이크 들고 떠들고 싶은데 아이들 입장은 내가 모르겠어서 너희들 체면 생각해서 조용히 사는 중이다.
세상에 대고 외치고 싶은데. 나 이제 행복하다고.
난 거짓말은 못하는 사람이라 그동안 남편과 잘 사는 척, 사이좋은 척, 행복한 척은 못했다. 다만 남편얘기를 입밖에 잘 꺼내지 않거나 바빠서 얼굴도 못 본다, 독박육아 힘들다 등 괜한 이유로 내 힘듦을 내 선에선 최대한 표현했을 뿐.
가식은 못하는 사람이지만 내 얼굴에 똥칠은 못하겠고 '나 이렇게 살고 있어요" 대신에 "바쁜 사업가 남편이라 독박육아하느라 힘들어요"라고 나름 포장 아닌 포장을 하고 살았다. 내 딴에는 최선의 거짓말이었다.
'우리 이렇게 살아요' 떠들어댈 순 없는 노릇이라 그냥 애먼 데 투덜대는 일은, 늘 무언가 숨기고 사는듯한 편치 않는 마음에 이렇게나마 '거짓말은 아니야'라는 합리화를 만들어주었다.
오래간만에 안부인사를 전하는 지인들의 '잘 지내냐'는 질문에 늘 나 혼자 곤란했다. 그냥 잘 지낸다고 하면 될 것을 누가 검사하는 것도 아닌데 괜히 거짓말을 하는 거 같아서. 아무도 나에게 잘 지내냐, 잘 사냐는 질문은 안 해주길 바랐다.
이혼은 이런 곤란함을 끝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격스럽다. 차라리 소송 중인 이 시점이 잘 지낸다고 말하기에 한점 부끄럼이 없어 맘이 편안하다. 아무도 내 행복을 감시하는 것도 아닌데
무언가 더 큰 사건을 숨기는 것만 같아서. 정말 온마음 다해 잘 지낸다고 대답하고 싶은 게 소송을 끝내고 싶은 이유 중 하나다. 사실 정말 잘 지내기도 하고.
나 이혼했어!
소문내고 싶다. 이제 잘살고 있다고. 앞으로 더 잘 살 거라고. 자랑스럽게.
예전엔 미처 몰랐다.
슬리퍼 끌고 음식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길에도, 싱글침대에서 아이들과 셋이서 살 비비며 서로 좁다며 밀치는 순간들도 문득문득 너무 감사해서 진짜 행복이 이런 건 줄은.
내가 이렇게 복이 많은 사람이었나.
한때는 날 뿌리째 흔들 던 사람이었지만
지금에라도 진짜 행복을 알게 해 준 것도 당신이라서
어쩌면 은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얼마 전 큰아이가 학교 국어 시간에 편지로 마음전하기 활동을 했다고 말을 꺼냈다.
누가한테 쓸지 고민하다 아빠한테 썼단다.
그리고 손들고 발표까지 했단다.
너무 궁금했다. 넌 밖에 나가서 아빠를 어떤 아빠로 표현을 하고 다니는지.
평소에 아이들이 내 앞에서 아빠얘기 꺼내기를 조심스러워 한적 없고 남 앞에서 '아빠집'이란 단어를 아무런 선입견 없이 쓰는 걸 보면 따로 산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는 것 같진 않았다.
나도 그런 말을 못쓰게 한 적 없고 자연스럽게 내버려 뒀다. 가끔 놀이터에서나 아이 친구 엄마 앞에서 '아빠집' 얘기를 서슴없이 할 때는 혼자 속으로 낯 뜨겁기도 하지만.
뭐라고 발표했냐 물으니,
"아빠, 같이 살지 않지만 언제나 전 아빠 마음속에 있어요. 요즘 아빠가 착해져서 너무 좋아요"라고 했다고.
눈물이 쏟아지는 걸 눌러 담았다.
착해지긴 개뿔 어디가 착해졌는지 모르겠는 그 사람을 너희는 엄마에게 불 뿜는 아빠모습을 본지가 오래라 착해졌다 느끼나 보다. 그럴 만도 하지. 하루가 멀다 하고 머리에서 스팀이 나오고 입에서 불을 뿜는 아빠였으니.
아빠랑 따로 산다는 사실 자체도 선생님, 친구들에게 처음 고백이었을 텐데
당당히 말할 수 있는 너에게 고마웠고
너의 말대로라면 선생님, 친구들 모두 감동받아 그렁그렁 눈물 날 것 같다고 했다는데 속으로야 무슨 선입견이 생겼을 망정 감동하고 손뼉 쳐 준 그들에게 고마웠다.
그리고 서글프고 미안했다.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너희 귀한 줄도 모르고 자주 보러도 오지 않는 당신을 어리고 철없는 아이는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는구나` 하고.
그 후로 몇 날 며칠을 그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났다.
자꾸만 너의 속내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용기 내어 떠들었을 그 마음과 그 발표를 듣고 내 딸을 짠하게 봤을 선생님 눈빛, 워낙 야무져서 똑 부러지다 못해 진짜 부러질 듯 한 친구의 사연을 듣고 의아했을 반 친구들의 모습이 상상됐다.
선생님께서 교과서에 쓴 그 편지를 잘라서 아빠 가져다 드리라고 그럼 좋아하실 거라고 했다는데 가져오지 않았다. 찍어서라도 보여주게 가져와보라고 했더니
역시나 그런 편지 따위에 감동받지 않을 아빠라는 건 너도 나만큼이나 이미 잘 알고 있어서 괜한 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나도 "아니야 아빠 고맙고 미안해서 눈물 뚝뚝 흘릴걸! 분명 감동의 도가니탕일 거라고!"라고 말하지 못했다.
이런 딸이 또 있을까. 이런 보석 못 알아보는 넌 진짜 등신이다.
이렇게 감동스러운 딸을 보고도 감동을 느낄 줄 모르는 당신이 또 한 번 불쌍해졌고, 그런 당신의 딸이 내 딸이라는 게 먹먹해졌다.
어쨌든 부끄러워하지 않고 친구들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우린 승리했다.
나도 빨리 자랑하고 다니고 싶은데 왜 소송은 안 끝나는 건지.(헛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