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 다이어리
어제 꽤나 과음을 했나 보다. 아무래도 마지막에 먹은 인삼주가 문제였지 싶다. 아침에 일어나니 머리가 깨지게 아프다. 아픈건 아픈거고, 그래도 조식은 챙겨 먹어야지. 9시까지 누워있다 일어나서 카페로 향한다.
아직 조식 준비가 안되어 있다. 사장님도 어제 같이 먹고 나서 숙취로 일어나시기 힘들어하시나보다. 방에 좀 들어가 있으니 인기척이 들린다. 나와보니 어느새 준비를 마치셨다. 대충 먹으면 되는데 스프랑 음식을 정갈하게 마련해 놓으셨다.
식당까지 침입한 까뮈랑 놀아주다 아침을 먹는다. 커피를 내려주신다는데 오늘은 몸 상태가 안 좋아서 그냥 우유랑 주스를 먹는다. 그래도 든든하게 먹어야지 숙취도 없어지지.
어제 얘기를 들어보니 내가 인삼주를 먹고 한방에 갔단다. 그 전까지는 괜찮다가 인삼주를 먹은 후에 내가 이 얘기를 하고 또 했단다.
"내일 고기 구워먹어요!"
이런. 어제 마당에서 고기 파티가 나에게 꽤나 인상 깊었나 보다. 그래도 작은 주정이지 큰 실수를 한건 아니니 귀엽게 넘어가 주시겠지 뭐.
머리가 아파서 다시 방으로 들어와서 좀 더 잔다. 두통약을 먹을까? 일단 지금 가지고 있지도 않지만 약을 먹으면 하루종일 영향을 받는 편이라 고민을 해본다. 내려가는 길에 약국은 하나 본 기억이 있다. 일단은 좀 더 자두자.
한두어 시간 더 자니 머리 아픈 게 조금은 나아졌다. 그래도 아직 나다닐 상황은 아니다. 오늘은 좀 숙소에서 뒹굴거려야겠다. 원래 여행 와서의 숙취는 정말 바보 같은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이리되다니... 뭐 한번 정도는 이런 날도 있어야지.
1시가 돼서 사장님 내외분은 외출을 하신다고 한다. 그래도 뭔가 먹어야 할거 같아서 게스트하우스 카페에 있는 컵라면을 좀 먹는다. 사장님 내외가 외출하시고 이제 내가 여기를 지키고 있다. 카페로 나와서 어제 여행기를 좀 쓴다. 노래를 틀고 홀로 카페에 앉아 글을 쓰고 있으니 좋다. 설거지를 하러 가니 다른 설거지가 있길래 이왕 하는 김에 다 같이 해놓는다. 내 집 같은 느낌이다.
조금 있다 나가서 일몰도 보고 고기도 사 와야겠다. 내가 고기를 사고 사장님이 불이랑 술을 준비해주시기로 했다. 근데 아직도 머리가 좀 띵하다. 타이레놀을 한알 먹을까? 아님 이지엔6? 뭐 일단 조금만 더 쉬다 나가봐야겠다. 근데 그러고 보니 이따 게스트하우스에 손님이 더 오면 고기파티때는 어쩌지? 그러고보니 사장님과 나 둘 다 그 가정 자체를 못했다. 아이고 사장님... 뭐 오면 같이 먹으면 되지. 근데 어쩐지 오늘 손님이 올 거 같지는 않다...
외출할때는 사장님이 늘 까뮈를 묶어놓는다. 지금도 묶여 있길래 심심할 듯해서 가서 옆에 앉아서 쓰다듬어준다. 내가 옆으로 가니, 이놈 바로 내 무릎을 아무렇지도 않게 베고 누워버린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잔다. 헐. 대단한 친화력이다. 햇살도 좋아서 나도 나쁘지 않아 잠시 그렇게 앉아있는다.
까뮈를 무릎에 누이고 햇살을 쐬고 있는데 사장님 내외분이 돌아오신다. 오늘 마을에서 식당이 하나 개업했는데 거기 가서 밥을 얻어먹고 오셨단다. 확실히 제주도는 아직 시골의 정이 느껴진다. 대평리에서도 마을 사람 한분이 결혼한다고 마을 전체의 가게가 문 닫아서 밥 먹을 곳을 찾기 힘들었던 날이 있다. 나도 따라가서 같이 먹을걸 그랬나? 그러기엔 머리가 아직도 지끈하다.
그래도 좀 나가보기로 한다.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이만 간단히 닦는다. 그러고 보니 이틀째 샤워를 안 했다. 뭐 씻기도 귀찮고, 언제부터 그리 잘 씻고 다녔다고... 그래도 오늘 저녁에는 좀 씻어볼까나? 나가면서 사장님한테 외출한다고 얘기를 하고 자전거에 오른다.
내려오는 길에 빵 가게에 잠시 들린다. 어제 못 사간 식빵을 오늘이라도 현영이한테 사다 줘야겠다. 헌데 문이 닫혀 있다. 오늘 영업을 안 하시나? 손님이 많지 않으니 열고 싶을 때만 여나보다. 메인 거리인 고산길까지는 자전거 타고 가면 금방이다. 특히 내려오는 길은 내리막이라서 금새 도착한다.
고산길에서 일단 약국에 들린다. 아무래도 두통약을 한알 먹어야겠다. 이 길에만 약국이 2개 있다. 이 좁은 마을에서 있을 거 다 있는 게 항상 신기하다. 영업을 유지할 정도의 수요가 되나? 많으면 뭐하나. 약국 문도 역시나 닫혀있다. 왜지? 문득 떠오르는게 있어서 달력을 보니 오늘이 일요일이다. 날짜 개념 없이 살다 보니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여행은 이제 진짜 이틀 남았구나. 젠장.
혹시나 싶어 다른 약국을 가도 역시나 닫혀 있다. 일요일이라 그런가 보다. 일단 GS마트에 간다. 서울의 GS마트가 아닌 고산 마트 말이다. 마트에서 식빵을 하나 사면서 카운터에 혹시 주변에 약국 오늘 영업하는 곳이 있는지 물어본다. 오늘은 없단다.
뭐 어쩔 수 없지. 풀밭 카페로 향한다. 가는 길에 편의점이 보여서 혹시 몰라 들러본다. 여기에 타이레놀이 있다! 다행이다. 한통 사서 현영네로 간다. 오늘도 역시 앞에 커튼이 쳐져 있다. 동네 주민들은 역시나 와 있으려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의외로 현영이 혼자 있다. 웬일이지? 물어보니 오전에 이미 왔다 갔단다. 그럼 그렇지. 들어가서 식빵을 주니 별거 아닌데 꽤나 좋아라 한다. 자리에 앉아서 물과 함께 타이레놀을 한알 먹는다.
현영이가 맥을 샀는데 쓰는 방법을 잘 모른다고 한다. 나름 오랜 맥 유저로서 가르쳐주겠다고 한다. 자리에 앉아서 현영이 컴퓨터를 켜본다. 멕프레 15인치다. 이 귀한 것을 남자친구가 사줬단다. 현영이 남자친구는 살아있는 성인, 생불이다. 그보다 착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컴퓨터를 보고 있는데 현영이가 어제 여행기에 자기 현영이 사진이 적나라하게 나왔단다. 그럴리가? 자세히 보니 정말 문 앞에서 대빵만하게 나왔다. 남의 얼굴 사진은 절대 안 넣는데 실수를 했나 보다. 이미 볼 사람은 다 봤겠지만 바꿔주겠다고 했었다. 사진이 너무 적나라해서 나라도 민망하겠다. 같은 구도의 카페 사진을 한장 찍어야겠다.
앞에 사진을 찍으러 나가보니 누가 소시지 두개를 문 앞에 꽂아 놨다. 가지고 들어와서 이 소시지의 정채를 현영이한테 물어보지만 자기도 누구의 소행(?)인지 모른단다. 아, 역시 시골 인심이 좋다. 아님 얘를 사모하는 동네의 젊은 남정네인가? 어쨌든 배고팠던 차에 잘됐다. 까서 같이 나눠 먹는다.
맥을 열고 작업을 하려고 보니 아무 설정이 안되어 있다. 남자친구가 사준 거라 쓰긴 쓰는데, 맥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단다. 이 명기를 이리 방치하다니, 그건 죄악이다. 필수 프로그램 몇 개 깔아주고 아이포토 등 기본 프로그램을 설명해준다.
서울에 있는 내 맥프레는 잘 있으려나. 떠나기 전에 같이 가지고 올까 한참 고민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안 가져오기 잘했다는 결론이다. 자고로 여행 다닐 때는 짐이 적어야 자유로운 법이다. 어깨에 지닌 게 많으면 자연스레 둔해진다. 생각도, 여행도, 그리고 인생도.
어제 올린 여행기에서 현영이가 적나라하게 나온 그 사진을 바꾸고 앉아있으니 오늘도 역시 짜이랑 빵을 가져온다. 전자렌지에 돌린 식빵을 귤잼과 버터에 발라먹으니 꿀맛이다. 이거 진짜 맛있다. 이거 그냥 메뉴로 만들어서 팔라고 얘기를 한다. 이렇게 해서 2천 원 받으면 부담도 안되고 괜찮을 거 같다. 특히나 짜이는 정통 방식 그대로라 쉽게 맛볼 수 없는 정말 제대로 된 짜이다.
왠지 이리 앉아서 먹고 있으면 냄새를 맡고 동네 주민들이 들어올 거 같다. 항상 어찌 알고 먹을 거만 생기면 딱 들어온다. 대단한 히피분들이다. 근데 오늘은 조용하다. 물어보니 다들 수영하러 갔단다. 이 날씨에? 역시 대단하다.
앉아서 책도 좀 보고 잉여로움을 즐긴다. 사람들은 항상 여유롭기를 바라고, 잉여롭기를 희망하지만 막상 자신들에게 실제 여유가 생기면 오히려 당황한다. 잉여를 즐기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다.
짜이가 한잔 정도 남았을 때 동네 주민1이 들어온다. 그럼 그렇지. 수영은 안 하고 문어 낚시를 했는데 잡지는 못했단다. 남은 짜이 마지막 한잔과 식빵을 먹는다. 맨날 현영이 꺼를 뺏어먹는 거 같아서 좀 얄밉다. 근데 뭐 서로 주고받는 게 있겠지.
여기는 사유재산 개념이 좀 애매하다. 막 들어와서 가져가고, 또 막 내어 준다. 김치랑 야채는 달라고 안 해도 주민들이 마구 나눠주신단다. 가끔은 외출하고 오면 사람들이 빈집에서 놀다 간 흔적도 있단다. 주인이 없어도 막 들어오는 거다. 정이 많은 동네다.
5시 반이 돼서 자전거를 타고 나선다. 동네 주민1도 같이 나온다. 어디 가냐고 물으니 수월봉에 간단다. 난 거북바위로 갈 예정이니 다행이다. 일몰만은 누군가한테 방해받지 않고 혼자서 보고 싶다.
분명히 어제 왔던 길인데 하루만에 방향이 헷갈린다. 게다가 미련하게 지갑과 장갑을 현영이네 두고 왔다. 맨손으로 이 추위에 운전하자니 손이 시리다. 돌아갈 때 마트에 들려서 장도 봐야 되는데 지갑이 없어서 현영이네를 굳이 다시 들렸다 나와야 한다. 미련한 것.
조금 헤매긴 하지만 그래도 잘 찾아온다. 자전거를 오름 밑에 세워두고 올라간다. 여기서는 집 문을 안 잠그듯이 자전거도 아무데나 그냥 막 세워둔다. 하긴 기어도 고장난 자전거니 가져갈 사람도 없지 싶다.
어제 이 길을 내려갈 때는 쉬웠는데 반대로 올라가려니 꽤나 힘들다. 어제 과음 때문에 체력이 떨어졌나?
거북바위에 오르니 역시 경관이 절경이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일몰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기에 주변 구경을 좀 해본다. 멀리 보이는 저 자그마한 마을이 고산리다. 위에서 보니 참 작아 보인다.
이제 진짜 여행은 내일이 마지막이다. 모레는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 이제 여행이 익숙해져 버렸는데 벌써 끝이다. 돌아가면 많은 현실이 기다리고 있겠지. 여행 중에도 몇몇 사건이 있었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하지만 어차피 현실은 극복하지 않으면 안 없어진다. 내일까지 여행을 즐기고 이제는 돌아가야 한다.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앉아있으니 아주머니 두 분이 올라와서 합류한다. 조용한 나만의 평화를 방해받는다. 하지만 내 사유지도 아니니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나만의 일몰을 즐기고 싶다. 가볍게 인사하고 앉아서 계속 해를 바라본다.
안개는 좀 껴있어도 구름이 없어서 잘 보일 줄 알았는데 중간에서 해가 구름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아쉽군. 일몰을 제대로 본건 10여 일 동안 단 두 번이다. 아주머니들은 올라온지 5분도 안돼서 후딱 내려가신다. 왜 올라오신 거지?
한번 구름 속으로 들어간 해는 나올 기미가 없다. 오늘의 일몰은 실패다. 고산리에서의 마지막 일몰인데... 사실 해는 전국 어디서든지 진다. 당연하지만 매일같이 꼭 한 번은 지는 법이다. 단지 우리가 일몰을 앉아서 바라볼 여유가 없을 뿐이다. 서울에 돌아가면 여행에서처럼 일출과 일몰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여행을 일상처럼, 일상을 여행처럼' 여행 다닐 때의 좌우명을 이번에는 일상에서도 지켜보자.
조금 앉아있다 일어난다. 너무 어두워지면 가기 힘들다. 내려오니 역시 자전거는 올라오기 전에 놔둔 그대로 있다. 뭐 이 자전거를 가져갈 사람이 있을까 싶다만... 그래도 이 자전거 덕분에 편하게 동네를 돌아다니고 있다. 고마운 자전거에 올라타고 다시 마을로 향한다. 가는 길에 밭이 넓게 펼쳐져있다. 고산리는 전경이 참 좋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뭔가가 있다.
지갑도 가지러 가야 해서 일단 다시 풀밭 카페로 간다. 현영이 혼자 있다. 왠일이지? 동네 주민들 없이 현영이가 혼자 있는 걸 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오렌지 다이어리 사장님이 기다리고 계실 듯해서 바로 떠난다. 어제 먹으려고 준비해놓고 못 먹은 감자를 챙기고 현영이도 어서 준비하고 오라고 일러두고 먼저 마트로 향한다.
고산리에는 대형 할인마트가 두개 있다. 고기는 GS마트보다 하나로마트가 좀 더 낫단다. 가는 길에 보니 오늘 오픈했다는 고마루 식당에 아직도 동네 주민들이 바글바글하다. 우리가 게스트하우스 사장님도 아까 낮에 저기서 점심을 얻어먹고 오셨었지. 이거 공짜로 나눠주는 건가? 동네 주민이 2,000명뿐이라니 서로 다 알고 있어서그런지 이런 전경이 낯설지 않다.
마트에 도착해서 자전거를 앞에 세워두고 들어간다. 정육점 코너를 가니 일반 돼지랑 흑돼지 두 종류가 있다. 제주도에서 먹는 고기 마지막일 듯해서 흑돼지로 삼겹살 한 근, 목살 한 근을 산다. 4명이니까 이러면 300g씩이다. 충분하려나? 앞에 전지를 싸게 팔길래 같이 살까 하다 만다. 충분하겠지 뭐.
사장님이 고추를 사 오라고 했던 기억이 나서 고추도 하나 챙겨 든다. 계산하니 3만 원가량 나온다. 나름 지출이지만 그래도 제주도에서 먹는 마지막 고기일 듯해서 아깝지는 않다. 어제는 제대로 못 먹었으니 오늘 제대로 한번 먹어봐야겠다.
자전거에 올라타고 이제는 오렌지 다이어리로 향한다. 해가 진지 얼마 안됐는데 벌써 사방이 앞이 안 보일 정도로 깜깜하다. 미세 먼지 때문에 오늘은 별도 그다지 많이 보이지 않는다. 이놈의 미세 먼지 때문에 일몰도 제대로 못 보고. 에잇.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하니 사장님 내외분이 역시나 나를 기다리고 있다. 배고파 죽는 줄 알았다며 왜 이리 늦게 왔냐고 귀엽게 타박하신다. 아직 7시 밖에 안됐다며 응대한다. 마당 한편에서 숯에 불을 붙이고 계시기에 어여 가서 도와드린다. 일반 숯이 아닌 참숯임을 강조하신다. 집안에서 공기정화용으로 놔둔 거를 가지고 나오셨단다. 근데 이거 지지리도 안 붙는다. 습기가 있는지 탁탁 튀기만 하고 불은 안 붙는다.
앉아서 계속 붙인다. 이거 붙이는 가스로 고기를 그냥 구워도 되겠다. 종이도 넣어보고 별짓 다 하지만 뭘 해도 잘 안 붙는다. 쪼그리고 앉아서 거의 한 시간을 붙인다. 뭐 그래도 지도 숯이라고 계속 그러고 있으니 결국 붙긴 붙는다.
마당의 이 공간은 여름에는 극장으로 활용하실 예정이시란다. 영화는 공짜로 틀어주고 가운데에 얼음통을 두고 맥주를 넣어 한병에 5,000원 정도 받으실까 하신다. 아이고 형님, 5,000원 너무 비싸요. 제주도니까 좀 더 비싸게 받는다 해도 한 3000원만 받으시라고 조언한다.
좀 있으니 현영이가 자전거를 타고 온다. 이제 다 왔으니 불가에 다 같이 모여 앉는다. 고기를 올리고 있는데 현영이가 동네 주민2도 오는 길에 만났다며, 오늘의 파티에 대해 말할 수 밖에 없었다고 양해를 구한다. 이런. 4인분으로 생각하고 사 왔는데. 괜찮으려나?
동네 주민2도 도착하고 다 같이 자리를 잡고 앉는다. 고기는 내가 굽는다. 사랑스러운 여자 친구님이 고기는 절대로, 진짜 절대로 안 굽는 바람에 노하우가 다년간 깊이 쌓여있다. 삼겹살을 먼저 올리고 곧 뒤따라서 목살도 올린다. 그러는 동안 사장님은 막걸리를 일행들에게 한잔씩 돌린다. 분위기를 돋구고자 내가 노래도 선곡해서 튼다.
불이 좀 약해서 익는데 시간이 걸리지만 그래도 익긴 익으니 됐다. 적당히 익은듯해 보여 잘라서 한 점씩 먼저 돌린다. 다 같이 막걸리로 건배를 하고 첫 고기를 먹어본다. 아 역시나 맛있다. 숯도 좋고 고기도 좋고 막걸리도 좋다. 맛도 맛이지만, 이런 공간과 분위기 자체가 너무 좋다. 사장님 내외분과도 며칠새 꽤나 친해져서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여기가 내 집 같이 편안하다.
술이 좀 들어가니 사장님 내외분이 어느순간 '형님'과 '누님'이 된다. 편한 게 좋은 거지. 누님이 주방으로 가더니 찌개와 밥을 가지고 나오신다. 숟가락이 없어서 찌개는 그냥 오손도손 그릇채 들고 마신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고기가 거의 바닥났다. 막걸리도 그새 거의 다 먹었다. 이제 한참 분위기가 오르는데 아쉽다.
고기를 더 사 올까 고민하니 동네 주민2가 자기가 사 오겠단다. 스쿠터를 가지고 있어서 금방 간단다. 이 친구 개념 있다. 제주도에 사는 소위 히피들의 삶은 어떻게 보면 자유롭고, 어떻게 보면 한심하다. 자기들만의 사정이 있겠지만 무위도식하는 삶이 그저 좋게 보이기만 하는건 아니다. 그래도 그런 삶 속에서도 이렇게 개념 있게 행동하는 친구들은 사랑스럽다. 이 친구는 언제까지 제주도에 머물려나. 뭐 그런 계획이 없으니 더 자유로운 거겠지.
주민2는 스쿠터를 타고 진짜 금방 갔다 온다. 막걸리 세병과 전지를 사왔다. 아까 살까 말까 고민하던 그 전지를 결국 먹게 된다. 다시 자리를 잡고 고기를 올린다. 이제는 불이 꽤나 잘 붙어있어서 금방 익는다.
전지, 이거 맛있다! 어떻게 이게 흑돼지 같은 비싼 것에 비해서도 제일 맛있는 거 같다. 괜히 비싼 삼겹살 목살을 샀다. 다음에 숯에 구워 먹을 일이 있으면 꼭 전지만 사서 먹어야겠다. 그런데 사실 제주도 돼지 자체가 워낙 맛있어서 부위 불문하고 일단 기본은 한다.
이것도 금방 다 먹는다. 그래도 이제 배는 어느 정도 찼다. 하지만 마음은 다 차지 않았다. 술도 아직 남아있고 아쉬워서 카페로 들어가서 더 먹자고 제의한다. 다들 환영이다.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으니 다들 정리하고 들어온다. 막걸리가 이제 한 두병 남았던가?
막걸리 떨어지면 이제 먹을거 없어서 어쩌나 고민하고 있는데, 현영이가 데낄라도 가져왔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난 섞어 마시면 내일 일정에 지장이 있을까 봐 막걸리만 먹는다. 대신 누님이 천주교에서 미사주로 보통 쓰이는 마주앙 와인을 어디선거 꺼내오신다. 이건 몇 잔 마셔본다. 예전에 성당 다닐 때 먹었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오렌지 다이어리 사장님은 우리나라에 손꼽히는 만화 전문가다. 예전에 편집장 생활을 하실 때 우리나라에서 지금 유명한 만화의 거의 대부분을 직접 출판하셨단다. 그래서 이곳에는 시중에서 구하기 힘든 만화도 굉장히 많이 보인다. 만화 얘기가 나오니 갑자기 흥이 나시는지 열정적으로 얘기를 해주신다. 내가 좋아하는 아다치 미츠루부터 예전 어릴때의 아톰까지, 갑자기 만화를 주제로 이야기 꽃을 활짝 피운다.
누님은 영화 쪽에서 일을 하셨었다. 그래서 당연히 음악도 좋아하신다. 술을 먹다가 갑자기 누님이 LP판을 어디선가 꺼내서 트신다. 야 LP라니! 아날로그한 음악 소리에 분위기가 더 살아난다. 술을 마시면서 이번에는 음악 얘기를 나눈다. 내가 이승환의 광팬이라고 하니 말 없이 이승환 1집 BC603의 LP판을 또 어디선가 꺼내오신다. 헐. 저게 LP로 존재했단 말인가. 학창시절 수없이 들었던 1집 노래를 오랜만에 들으니 감개무량하다. 술이 그냥 쭉쭉 들어간다.
이오공감 앨범도 연이어 꺼내오신다. 현영이랑 동네 주민2는 어려서 이오공감을 모른다. 이런 게 세대차이군. 오태호를 모르다니... 하긴 윤종신도 가수였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도 있다지 아마?
이문세 1집부터 NIRVANA까지 계속해서 보물들이 쏟아진다. NIRVANA가 lP 음반이 있는지도 역시 오늘 처음 알게 된다. 술도 취했겠다 다 같이 노래도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면서 이 순간을 즐긴다. 술에 취해, 음악에 취해, 그리고 사람에 취해 기분이 한결 들뜬다.
막걸리는 어느새 다 떨어졌고 이제는 마주앙과 데낄라만 남았다. 형님과 누님은 데낄라를 먹고 난 마주앙을 먹으며 계속해서 얘기를 나눈다. 이제 꽤나 취해서 정신이 몽롱하다. 내 기억은 여기까지. 아마 버티지 못하고 먼저 들어가서 잔 듯하다.
내일이면 고산리를 떠나는 날이다. 아마도...? 그냥 여기 더 있을까? 일단 아침에 일어나서 생각해봐야겠다. 대평리로 돌아가서 티벳풍경에서 하루 더 있고 싶기도 하고, 여기서 마지막 남은 하루를 보내고 싶기도 하다. 긴 줄 알았던 14일이 생각보다 정말 짧기만 하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인연을 만들었고, 또 많은 좋은 추억을 가슴에 담았다. 일단 내일은 주변에 유명하다는 산방산 온천이라도 가봐야겠다.